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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의 정읍 동학제와 정의구현사제단의 난

1988년 11월 30일의 광주청문회 때 김대중이 평민당이 정기용 씨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담당 군 검찰관으로 출석시켜 심문하고, 평민당 의원은 마치 정동년과 일면식도 없다는 김대중의 말만 진실인양 큰소리치고, 방송사는 김대중의 주장만 뉴스로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이 어떤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마치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오백 만원 주었다는 누명을 쓰고 그에게 사형이 구형되었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광주사태 직후 진행된 재판에서 김대중에게 반란혐의가 적용된 것은 그가 한민통이라는 반국가 단체 수괴였기 때문이었지 결코 광주사태 주동 혐의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1973년 한민통 수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중형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수사 당시 군 검찰은 1973년 이후의 한민통과 김대중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민통이 김대중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고 북한이 한민통을 시켜 광주사태 공작을 한 사실 등을 검찰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김대중은 수사 방향이 그와 한민통과의 관계로 흐르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소사실 기록이 정동년과의 관계로만 채워지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김대중의 내란음모사건 재판에 미국이 간섭하여 아무런 형벌도 받지 않게 한 것은 사실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이런 간섭으로 말미암아 한민통 수괴로서의 김대중의 활동 경력이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포장되었으며, 그 결과는 종북 암세포가 한국에서 자라나게 된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 미국의 속을 썩이는 북핵 문제이며, 종북 좌파의 반미주의 등은 그때 김대중을 도운 미국의 자업 자득이다. 이 사실을 언급해야 하는 이유는 이런 역사적 전망에서 우리가 1988년의 광주청문회를 다시 관전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정동년에게 수백 만원 주었다고 말하는 것은 안전을 보장받는 길이요, 한민통과의 관계를 은폐하는 길이었다. 정동년과의 관계로 공소사실이 채워지게 한 뒤 그 말이 미대사관 등 미국측에 전달될 때는 정동년이란 학생이 존경하는 정치인 방문한 것이 뭐가 죄냐는 논리로 설명하여 동정을 샀다. 평민당이 주도하는 1988년 광주청문회 때는 김대중이 갑자기 말을 바꾸어 자기는 정동년에게 돈을 준 적도 정동년을 본 적도 없는데 재판기록에 자기가 자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조작이라고 몰아붙였다. 교활한 김대중은 광주청문회를 다시금 국민을 속이고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는 가혹한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한국 근현대사 논리를 위해 중요한 문제이기에 광주청문회 때 김대중은 무엇을 감추며 숨기고 있었는지를 냉철한 눈으로 관찰하기 위해 광주청문회를 다시 관전해 볼 필요가 있다. 

1980년 3월 정동년이 16년만에 전남대에 복학하자마자 전남대 총학생회장 선거가 있었으며, 재야 정치권의 김대중의 사조직들이 박관현을 총학생회장으로 당선시키기 위하여 총동원되어 선거운동을 하였다. 고학생 박관현에게는 돈이 없었고, 정동년이 선거운동 자금을 지원해 주었는데, 도대체 왜 재학생 회장 선거운동 자금을 갓 복학한 정동년이 지원해 준 것이었으며, 16년간 어렵게 살다가 복학한 그에게 어떻게 그런 거금이 있었던 것인지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갓 복학하여 박관현 얼굴도 몇 번 보지 않은 그가 일반 직장인 봉급 몇 달치에 해당하는 거금을 내놓았다. 누군가가 활동 자금을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이것이 중요한 점임에도 광주청문회는 이런 의혹들을 피해 갔다.
 

1.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 비화

시계가 5월 18일 0시를 알릴 때 전두환 장군이 김대중을 연행하니깐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설은 5.18측이 지난 33년간 되풀이해 온 거짓말이다. 5.18사건의 인과 관계에 있어서 두 가지가 사실이다. 광주사태는 사전 준비되어 있었다. 김대중을 연행한 이는 전두환 장군이 아니라 김대중의 심복이었다. 5월 17일 밤 김대중 연행의 주체는 당시 중앙정보부 총무국장으로서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이종찬이었다. 1972년 김재규의 부하 이종찬이 김지하 시인과 손 잡고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세우려 하다가 그 정보가 노출되어 중앙정보부 보안차장보 보좌관직을 그만 두어야 했으며, 1973년 주영국대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했다. 김대중은 이때 일본으로 도망가 조총련에 포섭되어 한민통을 조직하는 반국가 활동을 하다가 1973년 여름 중정에 의해 강제 귀국당하였다. 김지하 시인도 자서전 등에서 몇 번 발표하였으며, 이종찬도 시인하였듯이 첫 번째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은 1972년에 있었다. 그런데 8년 만에 이종찬과 김대중의 합작의 내란음모 기회가 왔던 것이며, 김재규의 부하로서 승승장구하여 중앙정보부 수장의 위치에 있던 이종찬이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측면 지원해 주다가 5월 17일 연행하였던 것이다. (이종찬이 김대중 연행을 지휘하던 1980년 5월 17일 그는 중앙정보부 총무국장겸 기획조절실장으로서 중앙정보부 인사권 및 실무를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 이종찬 중정 총무국장이 김대중의 내란음모를 지원해 주고 있었다는 것은 극비 정보였으며, 만약 타 수사기관이 김대중을 연행하였더라면 그 꼬리가 잡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종찬이 자기 품 안에서 김대중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극비 정보는 새나가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이종찬과 김대중의 밀착관계는 계속되어 1997년 12월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이종찬이 국정원장이 되어 경험 많은 안기부(국정원) 직원들을 해고하였다. 김대중은 이종찬을 시켜 대공 분야의 전문가들을 해고한 다음 노벨 평화상 수상 공작에 국정원을 이용하였는데, 이 일을 이종찬에게 맡겼다. 극비로 진행되는 노벨 평화상 수상 공작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심복에게나 맡길 수 있는 일이며, 이 일을 이종찬에게 맡겼다. 1980년 봄 중앙정보부 수장으로서의 이종찬과 김대중의 관계는 20년이 지난 후 국정원장 수장으로서의 이종찬과 김대중의 관계에서 보이듯 늘 한결같았다. 만약 광주사태 당시 이종찬이 김대중의 적이었다면 훗날 그에게 김대중 후보 선거위 위원장, 김대중 정부 인수위 위원장, 김대중 정부 국정원장 등의 중책 및 노벨 평화상 수상 공작 등을 그에게 맡기었겠는가? 이종찬은 1980년 봄 김대중에 대한 충성이 재확인된 심복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그는 김대중의 적이 아니라 심복이었다.

오늘날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재판은 재판을 누가 주관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마련이다. 만약 인민군 혹은 종북 법관들이 재판을 주관하면 그들의 법 지식은 이석기를 보호하는데 이용된다. 김대중 연행도 그의 심복이 주관하면 심복 지휘 하의 수사관은 그의 수사관의 지위를 김대중을 비호하는데 활용한다.

김대중 내란음모 담당 수사관은 김대중의 심복 이종찬의 부하 이기동이었다. 그는 전남 광양 사람이었는데, 전남에서도 광양, 순천, 광주, 무안, 목포 출신들은 동향 출신이라는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엄청난 혈세를 낭비하면서 이용자 없는 무안공항을 지은 것도 바로 그런 지연 때문이 아니었던가? 김대중 내란음모 담당 수사관이 바로 이런 지연으로 얽힌 이기동이었으며, 그후 그는 김대중 가문의 가신과도 같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5월 17일 김대중 연행에 헌병들이 동원되었으나, 그 인솔자는 김대중 보호작전의 특명을 받은 이기동씨였다. 그는 김대중 연행과정을 이렇게 진술한다:

  이날 밤 10시가 조금 지나 진과장과 김수사관, 그리고 나는 승용차 편으로 헌병 1개 분대를 실은 트럭을 인솔하여 동교동으로 향했다. 김대중씨 집 근처에서 대기하던 중 밤 11시30분을 기하여 평소 김대중씨 집을 수시로 방문한 바 있는 김수사관이 초인종을 눌렀다.

김대중씨의 비서는 김수사관을 확인한 후 자연스럽게 대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헌병 분대 (장교 1명, 사병 18명)를 이끌고 순식간에 대문을 박차고 뜰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아래채(비서실 겸 숙소)에 있던 김대중씨의 개인비서 10여명이 마당으로 몰려나와 김대중씨를 보호하려 했으나 이미 착검한 헌병들이 본채와 아래채의 중앙을 일렬로 막아 차단했기 때문에 고함소리만 요란할 뿐 본채로 접근하지는 못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에서 작은 제목 "아, 김대중 쪽을 맡는구나" 마지막 두 단락.)

이어 이기동씨는 김대중의 내란음모의 결정적인 증거물이었던 "예비내각명단"을 어떻게 자기 선에서 처리함으로서 김대중을 보호해 주었는지를 이렇게 진술한다:

  나는 오대위에게 밖에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까지 김대중씨를 안내하고 대기중인 수사관에게 김대중씨를 정중히 남산으로 모시라고 지시한 후 이희호씨를 만나기 위해 거실로 올라섰다. 막 거실로 올라서는데 약간 열려 있는 안방 문틈으로 이씨가 화장대 서랍 속에서 무언가 꺼내 황급히 핸드백 속에 넣는 게 보였다.

핸드백을 들고 태연히 방에서 나온 이씨는 아직도 볼일이 남았느냐며 자신은 잠시 밖에 좀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자리에 앉으라고 한 후 “이 여사님, 우선 안방에서 핸드백 속에 넣으신 서류를 저에게 건네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희호씨는 “핸드백에 무엇을 넣었다고 그래요? 화장품 좀 챙겼는데…”라며 핸드백 열기를 완강히 거절했다.

나는 “이 여사님, 제가 직접 보았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여기 군인들을 시켜 강제로 회수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저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이씨는 체념한 듯 A4용지 두 장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두 장 중 한 장에는 소위 ‘예비내각’ 명단(당시 일간지에 발표)이 적혀 있었고 또 한 장에는 5월22일 정오에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한 각 지방 시청 앞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류를 압수하고 이희호씨에게 말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에서 작은 제목 "이희호씨 핸드백 속의 문건 압수" 일곱째 단락부터 네 단락.)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

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시청자들은 군 검찰관 정기용 씨가 정동년씨 건으로 김대중에게 내란 누명을 씌운 장본인이란 착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김대중의 심복 이종찬의 지휘 하의 중앙정보부에서 결정적인 내란 증거물들은 걸러내고 경찰로 수사를 넘겼으며, 경찰은 다시 군 검찰로 넘겼으며, 이 과정에서 예비내각명단 등 결정적인 내란음모 증거물은 감추고, 수사 방향이 정동년씨 사건에 집중되게 함으로써 김대중을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오늘날 이석기의 내란음모사건 수사에도 이석기 편에서 숨바꼭질 전략이 있다. 김대중의 내란음모사건 수사 때도 정동년에게 돈을 주었다고 진술하는 것이 김대중이 재기하는 길이었다. 형량이 가장 가벼운 것으로 공소사실이 기록되어 재판이 종결되게 하는 것이 큰 것을 감추는 길이었다.

 

2. 김대중의 광주청문회 위증

맨위 동영상에서 기세 당당한 평민당 조찬영 의원이 정기용 씨에게 "김대중 씨는 지난번 청문회 증언에서 분명히 정동년 씨는 본 일도 없고 만난일도 없고, 군 수사 기관에서 오히려 그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반문하면서 사진 좀 보자, 이렇게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 증인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 심문한다. 정기용 씨 답변은 "제가 검찰에 송치 되가지고 조사 받으실 적에는 그 점은 순순히 시인하셨기 때문에요"이다.

조찬용 위원의 논리는 김대중이 잡아떼면 그 말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청한 적이 없다고 잡아뗀 김대중의 말도 거짓말로 판명되었으며, 대북비밀송금한 적 없다고 잡아뗀 김대중의 말도 거짓말로 판명되었다. 김대중의 겯호원으로서 김대중의 전모를 밝힌 베스트셀러 '동교동 24시' 저자 함윤식씨는 김대중이 동교동 자택에서 정동년을 두 번 이상 만난 사실을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증언하였다:

  다만 제 기억으로는 정동년씨는 분명히 5 · 18이 나기 전 동교동을 두 번 다려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정씨와의 만남은 늘 그렇듯이 방안에서 두 사람만 있는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또 거사자금이 전달되었는지는 제가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정동년씨 뿐만 아니라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대표 10여명이 5. 18 직전 두 차례에 걸쳐 동교동을 다녀간 사실도 있습니다. (여기를 클릭하여 작은 제목 "5 · 18전 학생대표 등 만난 김대중씨" ).

이렇듯 함윤식 씨는 광주사태 발생 직전 복학생 정동년 등 전남대 학생들뿐만 아니라 조선대 학생대표들도 동교동을 다녀간 사실이 있음을 증언한다. 이 증언이 사실임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측 증언에서도 광주사태 당시 조선대학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 김인원의 증언으로 확인된다:

 5월 14일 이전 김대중 씨를 만나러 갈 기회가 생겼다. 자세한 날짜는 기억에 없고 다만 김대중 씨측에서 학생들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함께 간 것이었다. 관광버스 한 대를 구하여 약 38명이 함께 올라가게 되었다. 그중에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구교성 씨도 있었고 김대중 씨 비서관들도 몇 명 끼여 있었다....

회담이 끝난 후 밖으로 나와서 김대중 씨 자택에서 기념으로 사진촬영을 했다 (김인원 1989).

김인원씨 증언에서 김인원씨가 보았던 김대중 씨 비서관들 중에 함윤식씨도 있었다. 그리고 회담이 끝난 후 기념사진촬영까지 하였다. 이로써 함윤식 증언의 진정성은 명확하게 입증되었으며, 따라서 광주청문회에서 김대중이 위증한 사실이 드러났다.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 동교동 자택에 온 적이 없다는 새빨간 거짓말과 달리 김대중이 광주의 전남대는 물론 조선대 운동권 학생들까지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초청하였다. 민중봉기를 집권 전략으로 삼았던 김대중이 삼십 대 중후반의 정동년을 따돌리고 십대 후반의 청소년들만 집으로 불러들여 교제하였다는 말인가? 김대중이 차편과 숙박과 선물을 제공하며 자택으로 초청한 학생들은 광주에서 민중봉기를 조직하던 운동권 학생들이었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며칠 전인 14일부터 16일까지의 가두시위 때 정동년이 도청 분수대 앞에서 등장하여 김대중의 성명문을 낭독하였다. 정동년은 어떻게 그 성명문을 구하였는가? 정동년이 그 성명서를 낭독하는 것은 김대중의 와곽단체 <국민연합> 대표 자격으로 낭독한 것이다. 정동년이 수업을 빠지며 상경하여 김대중 자택에서 그 성명서를 받아올 때 활동비는커녕 교통비 명목의 활동비조차 주지 않았다는 말인가? 김대중의 성명서를 광주에서 누가 낭독하느냐가 김대중에게 몹시 중요하던 때였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아니라 정동년이 김대중의 성명서를 낭독하였다. 김대중이 광주에서 낭독될 성명서를 작성할 때 자신과 자신의 외곽단체를 대표하여 낭독할 인물이 누군지 모르고 있었다는 말인가?

숨겨둔 혼외자녀 문제에 대하여 김대중과 비교할 때 채동욱이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내연의 술집 마담 사이에서 생긴 혼외자녀 숨겨두기에 관한 한 김대중이 대선배 아니던가? 그럼에도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도 5년 채웠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한가지 차이기 있다면 국정원 원장과의 관계 문제이다. 김대중의 경우 대통령이 되자마자 그의 심복 이종찬 국정원장이 김대중의 딸을 꽁꽁 숨겨 주었다. 광주사태 당시 중앙정보부 수장의 직책을 김대중의 내란음모 증거를 감추어 주는데 사용하였던 이종찬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국정원장 직책을 김대중의 혼외자녀를 감추어 주는데 사용하였다. 지금 국정원 개혁을 주장하는 쪽은 국정원이 채동욱의 혼외자녀를 숨겨주지 않았다는 불만 때문에 그런다. 일국의 국정원이 김대중의 딸이 사람들 만나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해 존재하였는가? 지금 국정원 개혁을 주장하는 민주당은 어째서 김대중이 국정원 시켜 딸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고 있을 때는 가만 있다가 지금 개혁하자고 야단법석인가? 만년 실업자 김대중이 두 집 살림하느라 생활비 마련에 쪼들렸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몇 시간 전이었던 5월 17일 심야에 이희호의 핸드백 속에서 3천만 원이 발견되었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에서 작은 제목 "이희호씨 핸드백 속의 문건 압수" 끝에서 세번째 단락.). 이 돈은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이석기 집 신발장에서 발견된 현찰 수 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부자들도 이런 거액을 핸드백 속에 두지 않는다. 이 돈이 그녀가 그 다음 날인 5월 18일 장보러 가기 위해 필요했던 돈이었는가? 아니면 김대중의 내란음모 행동대장들에게 계속 활동자금을 지원해 주기 위해 가지고 있던 돈이었는가?
 

3. 정의구현사제단의 동학난

노무현 정부 시절 김대중의 내란음모사건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판사는 그 이유를 김대중의 내란음모는 별로 위험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안보적인 위기가 위험하지 않았다는 판단이 객관적으로 타당한 판단인가?

5.18 재판 때 주무검사 채동욱이 5.18 사건을 엉터리로 기록한 후에는 그 뒤 재판들이 모두 그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김대중의 내란음모사건 주동자들 대부분이 문익환 목사 등 종교인들이었다는 점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내린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가 김대중의 내란음모사건을 재조명해야 할 이유일 것이다. 동학난은 문익환 목사의 민중신학에 중요하므로 제2의 동학난이 일어나야 한다며 그가 김대중과 더불어 전국적 민중봉기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이 음모에 개신교 민중신학자들만 참여하였던 것이 아니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도 대거 참여하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들이었는데, 이들의 지도를 받는 가톨릭농민회가 5월 19일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하고 무장봉기를 일으키려는 계획을 사전에 세워두고 있었다. 유혈 시위 배후가 천주교 신부들이었다는 사실로 놀랍거니와 악성 유언비어 유포자들이 바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었다는 사실이 경악스럽기만 하다. 전옥주를 데리고 유언비어 가두방송으로 유혈시위를 선동하던 차명숙의 배후 역시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극단적이고도 과격한 종북 이념에는 33년 전 광주사태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가 있다. 그리고 그 뿌리를 보아야만 정의구현사제단의 종북 이념 형성 과정의 그림이 그려진다. 도대체 정의구현사제단은 광주사태 당시 어떤 일을 저지르며, 어떤 일을 벌려 놓고 있었던 것인가?

광주청문회를 주관하며 주도하는 쪽에서는 처음부터 그 목적의 광주사태의 진실 규명이 아니라,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누명을 씌우는데 있었다. 광주청문회를 보도하던 뉴스 매체 역시 여론몰이식 인민재판 분위기 조성에 한몫을 하였다. 그래서 김대중의 에비내각명단 등 결정적인 내란음모 증거에 대해서는 일체 보도하지 않고, 정동년이 김상현을 통해 김대중에게서 받았다는 활동자금에 대한 공소사실은 조작이었던 것으로 몰고 갔다. 여러 해 동안 김대중의 경호원으로서 1980년 봄 늘 김대중 옆에 붙어 있었던 함윤식씨는 5월 11일의 정읍 동학제 연설은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연설이었다고 밝혔다. 따라서 정읍 연설 이후 한 주간 김대중이 어디서 무엇을 했었는지를 추긍했어야 했다. 역사가 바로 기록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우리가 그 작업을 해야 한다. 5월11일 김대중은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동학제'에서 5만 청중에게 동학난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연설하였는데, 동학난의 본질은 농민들의 무장봉기였으므로 이 연설은 1980년 5월 제2의 무장봉기가 일어나야 한다는 취지로 들렸다.

김대중이 동학교도인가? 왜 동학제에서 연설하였는가? 동학정신은 서학의 앞잡이인 천주교를 몰아내자는 것이었는데, 천주교 신자임을 자처하던 김대중이 동학제에서 무슨 연설을 하였는가? 김대중의 제2의 동학난이 일어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은 이런 연설을 하는 김대중에게 '묻지마" 지지를 보냈다. 그런데 동학제가 가톨릭농민회 등 천주교의 잔치판이 되면 그것이 서학제이지 어찌 동학제라고 할 수 있겠는가?

광주사태 당시 가짜 가톨릭신자가 바로 김대중이었다. 자신이 예수 동생임을 자처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던 김대중이 가짜 신자라는 것은 정의구현사제단 편에서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던 듯하다. 김대중은 가톨릭신자인척 하는 것으로 정의구현사제단은 물론 한국 천주교회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가 정치9단이라는 말을 사람 속이는 실력이 9단이라는 뜻으로 풀어야 그 말의 의미가 정확해진다. 2000년에는 5억 달러 이상을 김정일에게 비밀대북송금을 한 후 6월 13일 순안공항에서 악수하는 사진 한 장으로 온 국민과 전세계와 심지어 노르웨이 노벨평화상 심사위원들까지 속였다. 그러니 광주사태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하여 한국 천주교회 전체가 가짜 신자 김대중에게 홀딱 속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리라. 김대중이 한국 천주교회를 그의 지지세력으로 만들었을 때 그것은 로마 교황청의 비호를 받는 것이었다. 아마 바로 이 점이 금번 이석기의 내란음모사건과 김대중의 내란음모사건간의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일 것이다. 이석기는 현 국회의원 신분이다. 그러나 그에게 국제사회의 보호를 받을 만한 강력한 종교 보호막이 있는가? 김대중은 내란음모 거사에 앞서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르든 국제사회의 보호를 받을 장치를 만들어 놓았다. 진리 편에 서야 할 천주교회가 김대중의 거짓을 수호하는 세력이 되어 있었다.

오늘날 종북세력은 빨치산의 후예들 혹은 빨치산의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받은 자들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종북세력의 특징은 동학난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며 동학혁명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이런 주장의 효시가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바로 한 주 전이었던 1980년 5월 11일자의 김대중의 정읍 연설이었으며, 그 연설문은 광주운동권을 원격 조종하며 광주사태를 조직하고 있었던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써 준 것이었다. 

그런데, 동학난이 진보였던가? 동학난은 서학, 즉 서양학문과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할 목적으로 일어난 무장봉기였다.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극심한 반대가 무장봉기로 표출되었다. 일본보다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에 한 발 늦었던 청나라는 청일전쟁 패자가 되었으며, 동학세력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 근대화의 시계가 아예 정지되어 있었던 조선은 머지않아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근대화를 반대하는 것이 진보인가? 아마존 밀림지대에서 근대화를 반대하는 것이 진보일 수 없듯이 신문명 개화기에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 진보일 수 없다. 단적으로 말해, 동학혁명의 논리대로라면 오늘날 동학혁명의 정신을 실천하려면 자동차도 서학의 산물이니 타고 다니면 안된다. 그러나 산업화를 진전시켜 자동차를 미국에 수출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요 진정한 애국이 아니겠는가?

또, 동학난이 민주주의 혁명이었던가? 당시 서학이란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었던 서양의 학문과 문물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동학 지도자들은 서학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반대하였다. 근대화가 선행되지 않은 민주주의 혁명은 불가능하다. 영세 농업국에서 민주주의의 실현을 불가능하며, 영세 농업국에서 가능한 유일한 정치체제는 봉건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일 뿐이다. 농민 무장봉기로서의 동학난의 취지는 산업화를 원천적으로 봉쇄하여 조선이 영구적으로 영세 농업국에 머물러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토록 극렬하게 조선의 근대화를 가로 막는 것이 바로 미래의 민주화를 가로 막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그것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인가? 동학 지도자들은 전혀 민주주의 사상가들이 아니었다.

동학난은 그 본질이 민주주의 혁명이 아니라 신흥종교 혁명이었다. 동학난 지도자들이 바로 천도교라는 한 신흥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제2의 동학난을 선동하는 김대중의 정읍 연설과 더불어 예비내각 명단이 작성되었다. 제2의 동학난으로서의 전국적 민중봉기가 성공하여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전복되고 김대중이 집권할 때 그의 첫 목표는 박정희 대통령이 육성한 중화학공업 시설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악성 유언비어 유포로 5.18 유공자가 된 박창신 신부가 오늘날 천주교회에서 산업화 때문에 농민들이 못살게 되었다고 강론할 때 그 논리는 33년 전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논리 그대로였다. 그러나 만약 광주사태가 성공하여 김대중이 중화학공업 시설들을 모두 파괴하였다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후진적인 농업국으로 복귀하여 영영 민주주의 체제가 불가능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광주사태가 만주화운동일 수 있다는 말인가? 김대중은 반란 거사가 쉽게 성공할 것으로 예상하고 내각을 미리 임명하여 놓았다. 그런데, 예비내각이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문익환과 안변무 등 대부부 민중신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민중신학을 20년간 관찰한 후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Moltmann) 박사가 말했듯이 민중신학은 기독교 신학이 아니라 한 신흥종교의 주장이었다. 동학사상이 19세기말 조선의 한 신흥종교 사상이었듯이 민중신학 또한 20세기 후반 한국의 한 신흥종교 사상이었다.

김대중이 유혈투쟁으로서의 제2의 농민무장봉기를 선동하는 정읍 연설을 하던 5월 11일 정의구현사제단의 지원 하에 가톨릭농민회는 이미 5월 19일을 D-day로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완료해 놓고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정의구현사제단의 사상 역시 기독교 사상이 아니라, 천주교에 기숙하고 있는 또 하나의 신흥종교 사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1980년 5월 11일 정읍에서 아주 희얀한 일이 펼쳐졌던 것이다. 민간인이 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무장하였다는 데에 동학난과 광주사태의 공통점이 있다. 동학난 때는 민간인 무장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었는가? 동학 지도자들이 서학의 앞잡이로 간주한 기독교 공격의 명분이 민간인 무장을 정당화하였다. 기독교는 동학운동의 공적이었다. 그런데 그 동학난을 기념하는 정읍 동학제에 천주교가 몇 만 명의 인파를 동원해 주는 희얀한 일이 벌어졌다. 천주교와 동학은 하나일 수 없는데 어찌된 일이었는가? 정의구현사제단이 옹호하는 가톨릭농민회가 인원을 동원해 주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운동권 사상은 동학운동 사상처럼 하나의 신흥종교 사상이었기에 이렇게 서로 통했던 것이다.

박창신 신부의 연평도 포격 발언

지난 11월 22일(2013년)에도 박창신 신부는 "노동운동하면 빨갱이여 농민운동하면 빨갱이여 잘살자고 하면 빨갱이여 좌파여 좌빨 빨갱이여 그것이 요즘 좀 고상하게 해가지고 종북 종북 주의자여 북한이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북한과 닮았다고 해서 종북주의자입니다. 종북주의자가 적입니까? 여러분"이라는 말로 북한정책을 감싸고 종북주의자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다음 "NLL에서 한미군사운동을 계속하면 북한에서 쏴야죠. 그것이 연도 포격이에요"라고 외쳤다.

"NLL에서 한미군사운동을 계속하면 북한에서 쏴야죠. 그것이 연평도 포격이에요"가 기독교 복음 메시지인가? 그 말은 기독교 복음 메시지가 아니라, 종북 이념이다. 이 말을 한 박창신 신부는 5.18 유공지이다. 신부가 시민군이었기 때문에 5.18 유공자인 것이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이 악성 유언비어를 퍼뜨렸기 때문에 유공자가 되었다. 광주사태 당시 김현장의 역할은 구례 천안사에서 간첩이 불러주는 대로 작성한 악성유언비어 유인물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을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문정현 신부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었으며, 문정현 신부는 전주성당 고속 복사기로 만 장을 복사하여 정의구현사제단 조직망을 통해 전국에 유포하였다. 익산 여산 주임신부였던 박창신은 그 유언비어 유인물을 재유포하였다 하여 5.18 유공자가 되었다. 그런데 33년 전 그가 유포한 악성 유언비어가 결코 기독교 복음 메시지일 수 없듯이 최근의 종북 발언 또한 기독교 복음 메시지일 수 없다.   

박창신 신부의 궤변은 종북주의를 이런 말로 정의하는 것이다: "노동운동하면 빨갱이여 농민운동하면 빨갱이여 잘살자고 하면 빨갱이여 좌파여 좌빨 빨갱이여 그것이 요즘 좀 고상하게 해가지고 종북 종북 주의자여." 그러나 우리에게 보다 정확한 정의가 있다. 빨치산의 후예들, 혹은 그 종북 세계관을 물려받은 자들이 바로 종북주의자들이다.

박창신 신부는 북한을 노동자와 농민의 천국으로 묘사한다. 북한 정책은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이기 때문에 북한은 노동자와 농민의 천국이다. 국군이 몇 명이 죽고 연평도 주민들이 어떤 피해를 당하건 그는 아랑곳 없다. 그가 신부복을 걸치고 하는 운동의 목적은 남한도 북한처럼 노동자와 농민의 천국이 되게 하는 것이요, 이것이 그가 말하는 정의구현이다. 그는 이 목적을 위하여 광주사태 당시 전라북도 익산에서 악성 유언비어 유포한 것을 정당화하며 5.18 유공자가 되었다. 그가 악성 유언비어 유포한 것을 회개하거나 고해성사한 적이 있는가? 그의 종북 이념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든 정당화되기에 회개가 없다. 그는 이런 논리 구도에서 연평도 포격을 이해하기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의 천국이 남한을 향하여 쏘는 연평도 포격은 정당화된다. 그는 북한이 북한체제 유지를 위하여 취하는 모든 수단은 심지어 그것이 우리 국민 머리 위로 쏘는 포격이라도 정당화된다고 설교한다.

광주사태는 목포와 광주에서 일어났는데, 갑자기 전라남북도 여러 지역의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조직적으로 유언비어 유포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정의구현사제단이 광주사태 당시 삐라로만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던 것이 아니다. 광주사태가 30여년이 지나도록 오랫동안 베일이 싸여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전옥주를 데리고 유언비어로 시민군 선무 방송을 하였던 차명숙이 잠시 구금되었을 때 끝까지 윗선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윗선은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었다. 2007년 4월 30일자 시민사회일보에서 비로서 차명숙이 밝혔듯이 그녀와 가장 가깝게 지내던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는 함세웅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녀는 남편과 함께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하고 있다. 2007년에는 정의구현사제단 명의로 작성된 한미 FTA 반대 유인물을 유포하였다. 시민군 선무방송 담당이었던 차명숙이 안동에서 홍어를 안주로 곁들 술집을 열도록 도움을 준 신부가 바로 함세웅이었다. 기독교인이 술을 마셔서는 아니 되는데 도대체 함세웅 신부와 차명숙의 관계는 어떤 관계이기에 함 신부가 그녀에게 술집을 차려 주었는가?

김대중이 5월 11일 정읍에서 광주사태를 선동하였다. 광주는 전라남도에 위치해 있었는데, 전라도에서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최종 연설 장소는 전라북도 정북이었다. 광주사태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발생하였는데, 정의구현사제단 문정현 신부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박창신 신부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수 만 장의 유인물로 악성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퍼뜨렸다.

전주에서의 광주사태 조직 핵심인물은 문정현 신부였으며, 광주사태 주동자들과 문정현 신부는 상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윤상원 등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발행한 5월 22일자 투사회보 셋째 줄과 넷째 줄에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도대체 전주에서는 폭도들이 도청을 장악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여하튼 이 정보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에게는 몹시 중요한 정보였다. 광주에서 무장폭도들이 전라남도 도청을 완전히 장악함과 동시에 전주에서도 폭도들이 전라북도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폭도들이 전라남북도 양 개 도청을 모두 장악하였을 때 그 상징적 의미가 무엇이었던가?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그 의미를 "이제 승리의 날은 머지 않았다"라는 말로 기록하였다.

5월 22일자 투사회보

아래는 1980년 5월 21일 대낮에 일단의 폭도들이 영강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과 실탄을 탈취하였음을 기념하는 5.18사적비 비문이다. 그런데 비문에 기록된 것과 실제 사실은 좀 다르다. 영강 예비군 무기고 습격에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괴한들이 동원되었다. 이들에게 선동당하여 따라다닌 나주시민들이 몇 명 있었을지라도 주동자들은 전주에서 동원된 괴한들이었으며, 이들은 5월 21일 오전에 미리 나주에 와 있었다. 광주사태인데 어째서 전라북도 전주에서 일단의 괴한들이 나주 영강으로 몰려들었다. 나주 영강 주민들은 예비군 무기고가 털리고 외지에서 온 폭도들에게 총기가 탈취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전주에서 온 괴한들이 협박을 하였다. 우리는 이 괴한들이 누군지 모른다. 그러나 다섯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가톨릭농민회 및 가톨릭청년운동권 조직들이 광주 일원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는데 동원되었다.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로서 전주성당 주임신부였던 자는 문정현이었다. 문정현이 악성 유언비어 유인물 제작 및 유포 등으로 광주 무장봉기를 지원하고 있었다. 광주 소재 전남도청과 전주 소재 전북도청은 5월 21일 동시 점거되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며, 시민군 기관지에는 시민군이 두 도청을 동시 점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문정현 신부와 상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영강 5.18 사적비

앞에서 언급한 대로 광주사태 발생 한 주 전 김대중이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연설을 한 장소도 전라북도 정읍이었으며, 전라남도의 가톨릭농민회가 정읍 동학제에 인원을 동원해 주었다. 그리고 이 날 이미 가톨릭농민회는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완료해 놓고 있었다. 5.18 사건은 전라남도 광주에서 일어났는데 전라북도에서 군 무기고를 털고 광주로 무기를 수송하는 세력이 정읍에 있었다. 김종환 현 참깨방송 대표에게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수도 콜럼비아에서 한국음식 식당을 경영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2002년 김종환 기자에게 증언하기를 "5.18 당시 정읍에서 군복무중이었는데 검문소를 설치하고 근무 중인데 전북대 강사라는 자가 승용차를 몰고 광주 쪽으로 간다기에 트렁크를 열어보니 카빈소총이 가득 들어 있어 체포했다"고 한다.

겉보기에는 전혀 시민군 표시가 나지 않은 승용차 트렁크 속에 카빈소총이 가득 들어 있었다. 동학난이라 불리는 무장봉기의 진원지 정읍에서 광주로 가는 승용차 속에 카빈 소총이 가득 들어있었다는 것은 정읍이 다시금 무장봉기의 한 진원지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광주사태를 조직하고 지원하는 세력이 전라북도 전주와 익산과 정읍 등에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구례 천은사에서 간첩이 불러주는 대로 악성 유언비어 유인물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을 작성한 김현장이 정의구현사제단 문정현 신부를 찾아 저 멀리 전북 전주성당으로 갔다. 그곳은 승용차가 있어도 구례에서 한나절 걸리는 거리요, 버스와 기차편을 이용하면 족히 하루 걸리는 여행 거리였다. 1980년 봄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김현장에게 승용차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광주에서 동편으로 저 멀리 구례까지 가는 데도 여러 시간 걸린다. 김현장의 설명대로라면 5월 21일 구례 천안사로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은 오후 세시 반 이후에 광주에서 출발하였다. 광주 외곽 봉쇄를 뚫고 그 사람들이 천안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절에서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난 뒤였다. 8절지 크기 갱지 2매에 빽빽이 쓴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은 그 분량이 길어 육필 작성에만 족히 하루 걸리는 문건이었다. 22일 새벽에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계엄령 하에 18일부터 야간통행이 금지되어 있었다. 전주성당이 문정현 신부가 그 유인물을 일 만 장 복사하는데도 한나절은 걸린다. 그 유인물을 광주로 배달하는데 다시 한나절 소요된다. 그런데 정의구현사제단 문정현 신부는 이미 22일 오전에 일 만 장을 광주와 전라도 전 지역은 물론 서울에까지 살포하였다.

구례에서 살던 김현장도 전주에서 살던 문정현도 광주사태를 본 적이 없었다. 5.18측이 2011년에 5.18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을 때 김현장이 작성하고, 문정현이 배포한 성명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을 세계기록유산으로서 보존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박창신 등 정의구현사제단들에게는 이 악성 유언비어 유인물이 5.18의 바이블이다. 그러나 거짓과 유언비어의 기록물도 기록물인가? 김현장과 문정현과 박창신은 단지 거짓과 유언비어 전달자들이었을 뿐이요, 그들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하며 이 유인물을 배포하였다.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들이 조선대학교 학생들이었는가? 전주성당 문정현 신부와 익산 성당 박창신 신부가 이런 위장 명칭을 사용하여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http://www.study21.org/518/photo/nk/bad-rumor.htm 에서 그 육필 원본을 볼 수 있는 악성 유언비어 유인물 문건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은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발표한 문건으로서 오늘날 홍보되고 있다. 비록 김현장이 작성해 온 문건을 문정현 신부가 복사한 것이지만 만 부 이상 복사하였을 때는 일종의 출판이다. 문정현 신부가 먼저 일만 부를 복사하고, 박창신 등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계속 또 복사하여 유포하였다. 최근 연평도 포격 관련 종북 발언으로 유명한 박창신 신부가 괃주시민군이 아니었음에도 5.18유공자가 된 이유는 전북 익산에서 이유언비어 유인물을 배포하였기 때문이다. 천주교 신부들이 배포하는 유인물이기에 공신력 있는 기록물로 간주되어 전국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런데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라는 위장명칭을 사용하였다. 명의 도용은 일종의 문서 사기인데, 명의가 도용된 문건도 기록물이라 할 수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한 가치가 있는가? 그들이 도용한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라는 명칭은 광주사태를 조직하고 있던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가 조선대학교 운동권에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 하부 조직 명칭으로서 붙여준 종북 명칭이었다. 대부분이 광주시민들은 조선대하교 내에 이런 종북 조직이 있었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어떻게 수 백리 떨어진 전라북도 북부의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어떻게 광주 조선대 내의 이 종북 조직 명칭을 알고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일까? 

김영진 장로를 위시한 5.18 단체들이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을 광주시민들이 기록한 기록물로서 유네스코에 등재하였을 때 이것은 유네스코를 기만하는 행위였다. 도대체 김현장과 문정현과 박창신 중 그 누가 광주시민이었다는 말인가? 그들은 광주사태를 보기는커녕 광주에 오지도 않았었다. 외지인들이 제작한 유인물이 광주에 삐라로 뿌려져 유언비어 쓰나미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 유언비어 유인물 제작자들은 외지인들이었다. 그들이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라는 명칭을 도용하였다 하여 외지인들이 광주시민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80만쪽의 5.18 기록물이 있다고 하나 오로지 정의구현사제단이 유포한 이 유언비어 유인물만 널리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윤상원과 황석영의 극단 광대 단원들이 제작한 유언비어 유인물들조차 광주 바깥으로 퍼지지는 못했다. 문정현과 박창신은 그들의 천주교 사제단의 지위와 종교적 권위를 악성 유언비어 유포에 사용하였을 때 그 파급 효과는 엄청났다. 문정현 신부는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을 서울대 운동권에도 보냈고, 서울대 운동권은 천주교 신부가 보낸 유인물을 100 퍼센트 진실로 여기고,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제작하여 전국 대학가에 배포하였다. 전두환 관련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하려는 북한세력의 의도를 정의구현사제단이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처럼 광주사태에 종교계의 역할이 있었다. 지난 33년간의 5.18 담론을 이 유인물이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의구현사제단의 잘못된 신학에 대하여 말하여야 할 때이다.

이 유인물이 1980년대 주사파 양성에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주사파 양성 1등 공신이 정의구현사제단이었다. 5.18 정신이 민주정신이었는가 아니면 거짓 종교사상이었는가? 만약 민주정신이었다면 유언비어 유인물 내용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려는 지성적 자세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정의구현사제단의 종교적 권위는 신도들에게 맹목적으로 유언비어를 맹신할 것을 강요하였다. 지금도 사람들이 광주사태의 진실 규명을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유언비어들을 맹신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종교적 영향 때문이다.

간첩이 김현장을 시켜 유언비어 문건을 보내 주며 배포를 요청하였을 때 진정한 종교 지도자라면 먼저 그 정보가 허위정보인지 진실인지를 파악해 보아야 했다. 전혀 객관적인 사실 확인 없이 유언비어를 맹신하고 전파하는 것은 서학(西學)이 아니라 종교이며, 이러한 종류의 종교는 나쁜 종교이다. 거짓말에서 출발하는 신학은 나쁜 신학이며, 거짓말에서 출발하여 구현되는 정의란 것은 없다. 도대체 정의구현사제단은 어떤 방법으로 정의를 구현하려 하였는가? 가톨릭농민회가 제2의 동학난으로서의 무장봉기를 일으키려 하는 것을 지원해 준 것이 정의 구현 방법이었는가? 악성 유언비어 유인물을 제작하여 배포한 것이 정의 구현 방법이었는가?

만약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어야 했을 만큼 중요한 기록물이었다면 광주청문회를 위해서도 중요한 기록물이여야 했다. 전두환이 광주살육작전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은 주체사상 못지 않게 미친 신앙이다. 노무현이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에 명패를 던지고 청문회 스타가 되었듯이 광주청문회의 전반적 분위기는 이 미친 신앙과도 같은 거짓된 주장을 맹신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은 누가 작성하였는지를 묻지 않는가? 어째서 그 자를 증인으로 출석시켜 전두환이 광주살육작전 명령을 내렸는지를 어떻게 알았는지 심문하지 않았는가? 바로 이런 질문이 광주청문회의 기본이어야 했다. 김현장은 수백 리 떨어진 전주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가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으며, 김현장이 구례와 전주 사이를 신속하게 오가도록, 그리고 문정현 등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전라도 전 지역과 서울 등에서 유언비어 유인물을 신속하게 살포할 수 있도록 차량을 제공하는 제3의 조직이 있었는지를 물어야 했다. 이미 김대중과 정웅 장군과 소준열 장군 등 많은 5.18 당사자들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광주청문회를 다시 열 수 있는 시기는 지나갔겠으나, 김현장과 정의구현사제단에 이제라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4. 5월 11일의 정읍 동학제에서 5월 18일의 광주사태 발발까지 한 주

오늘날 5월 18일이 광주사태 생일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5월 22일이었으며, 그 전에는 아무도 광주사태가 일어난 줄 몰랐다. 물론 5월 18일 광주에서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와 더불어 과격시위가 시작되었으나, 5월 15일 서울에서 있었던 과격 가두시위에 비교한다면 지방의 한 작은 소요에 불과하였다. 5월 20일 밤에 폭도들이 방송국과 관공서 등에 방화하자 사람들은 폭동이 일어났음을 실감했고, 21일에는 무장폭도들이 전남도청을 점령하자 사람들은 무장폭동이 일어났음을 목격하였다. 사실, 광주사태 주동자들 중 그 누구도 5월 18일을 D-day로 정하지 않았다. 그 날은 일요일이요 시위대를 모으기 힘든 날이라 5월 18일은 전혀 거사일로 고려되지 않았었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의 지도를 받은 가톨릭농민회는 5월 19일을 무장봉기 거사일로 정했으며, <민청협>과 <남민전>은 5월 20일을 거사일로, 그리고 김대중은 5월 22일을 거사일로 정했었다. 그들이 5월 20일과 22일을 선호했던 이유는 그때가 김재규 사형 예정일이었으며, 김재규 사형 당일에 민중봉기를 일으켜야 김재규 부하들의 지지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계산을 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5월 18일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5.18이란 숫자에 아무런 상징적 의미도 없었다.

가두시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를 따진다면 5월 11일의 정읍 동학제이다. 계엄 하에서 가두시위는 불법이다. 그런데 동학제를 명분으로 정읍에 5월 11일 오 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들었다. 2008년 광우병 사태 때 만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 일대에 모여도 그 시위 규모가 엄청난 것이었으니, 1980년 5월의 정읍 동학제에 모인 인파의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정읍 동학제는 범김대중 세력에게 계엄 하에서도 종교 행사를 명분으로 세워 가두시위하면 계엄사가 전혀 막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한 사건이었으며, 그날로 5월 19일 가톨릭농민대회를 명분으로 19일 그 군중이 다시 광주에 집결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킨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김대중이 5월 11일 정읍에서 본 것은 전라도에서는 가톨릭농민회 등 여러 조직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킬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대규모 민중봉기에 명분을 주는 타이밍이 중요했다. 즉시 서울의 대학생들이 가두시위를 해 주어야 전라도에서의 대규모 민중봉기가 명분을 갗출 수 있다는 것이 김대중측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5월 11일 밤 늦게 서울로 돌아와서 몇 시간 자는 등 마는 등 그 다음 날 12일 황급하게 북악파크 호텔 521호에 한승헌, 이문영, 이해동, 예춘호, 서남동, 문익환, 계훈제, 김종완 등의 <국민연합> 간부들과 이현배, 장기표, 조성우, 심재권 등의 민주청년협의회 간부들을 소집하여 전략회의를 하였다.

당시 대학가 시위 주도는 각 대학교 복학생협의회를 통해 전국 대학교 총학생회를 원격 조종하고 있던 민주청년협의회가 하고 있었으며 이미 대학가 시위를 학내 시위에서 가두시위로 탈바꿈시킬 준비를 완료해 놓고 있었다. 미리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에서 결의한 시위 조직 방법대로 장기표와 심재권과 이현배와 조성우 등 유급 '홍위병'들이 김대중에게 보고한 내용은 다음날인 13일부터 학생 시위를 교내시위에서 가두시위로 전환되도록 유도하는 방안이었다. “학생시위를 교내시위에서 교외시위로 유도하고 그 다음에 구호를 학내문제에서 정치적인 이슈로 바꾸고 그래서 시위가 과격화되면 군경하고 충돌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지켜보던 흥분한 군중들이 학생들한테 가세할 것이다” (제144회 국회 청문회 1988, 13:97).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과 김대중의 사조직 <민주청년협의회>의 12일의 비밀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그 회의에서 결의된 과격시위 방안도 즉각 행동에 옮겨졌다.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 간부 심재철과 유시민 등이 복학생 이해찬 등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았으므로 먼저 13일에 연세대 학생들을 가두시위로 내몰았다. 본래 계엄령 하에서는 가두시위가 불법이었는데, 연세대가 5월 13일 첫 가두시위를 했으며, 그것은 학생들이 자진해서 했던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사조직이 장악하고 있던 복학생협의회를 지렛대로 사용하여 선동한 가두시위였다. 13일의 첫 불법 가두시위는 학생들의 뜻이 아니라, 12일 김대중 세력이 결정해 놓은 것이었다. 이 점에서 광주사태의 발화는 5월 13일의 연세대의 가두시위였다. 계엄령 하에서 연세대 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하는 데도 계엄군이 전혀 진압을 하지 않는다는 소식에 접한 전남대 학생들도 14일부터 가두시위를 시작하였다. 18일에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14일부터 16일까지 광주에서 불법 가두시위가 있었다. 

5월 13일 연세대가 가두시위의 포문을 열자 서울대에서는 총학생회장 심재철과 간부 유시민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본래 왕년의 빨치산 박현채와 김대중 세력은 서울대 총학생회 선동 공작에 가장 많은 노력을 쏟았으며, 그래서 서울대 교정에 괴성명서를 뿌리고, 학생회 간부들에게 금품을 제공하고, 복학생 이해찬 등을 시켜 압력을 넣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가두시위를 선동했었다. 운동권 복학생들의 이런 압력에도 불구하고 불법 가두시위를 안 한다는 것이 서울대 총학생회의 입장이었으나, 5월 13일 연세대 총학생회가 가두시위를 하는 것을 보고 못 본체 할 수는 없었다. 당시 서울대생의 자부심은 시위의 주도권을 연세대에 빼앗기지 않는 것이었다. 심재철과 유시민 등 서울대 총학생회 간부들이 주도한 15일의 저 유명한 '서울역 집회'의 직접적인 동기는 시위 이슈가 아니라, 시위 주도권을 연세대에 빼앗겨서는 아니된다는 서울대생의 경쟁심리였다. 아니, 심재철과 유시민은 서울대 총학이 연세대 총학에 시위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비판을 두려워했다는 표현이 옳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이해찬 선배에게 꼿꼿하게 맞섰던 유시민이 과격시위에 적극 협조하게 된 계기는 5월 11일경 밤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유시민이 받은 괴전화였다. 그 날이 5월 10일과 12일 사이 어느 날이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5월 11일 김대중이 전북 정읍 동학제에서 김대중이 연설하였을 때 오 만 명의 청중 동원을 위해 전남대 학생들까지 동원되었을 즈음 저녁 늦은 시간에 몇몇 서울대 총학생회 간부들은 총학생회 사무실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유시민과 한홍구가 5월 10일경이라고 술회하는 날의 정확한 날자는 5월 13일인지도 모른다. 그 날 밤 군부 군데타가 일어났다는 괴전화를 받은 유시민은 5.16 20 주년에 제2의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줄로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 거짓 정보에 입각하여 과격 행동을 취하였다. 이 거짓 소문은 순식간에 서울 시내 각 대학교로 쫙 퍼져 나갔고, 무려 십 만의 인파를 헤아리는 5월 15일의 대규모 시위가 금방 조직되었다. 그런데 제2의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유언비어가 기폭제가 된 5월 15일 시위 구호는 "최규하 퇴진" "신현확 퇴진" "(직선제) 개헌 반대"였다. 누가 제2의 5.16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유언비어를 괴전화로 흘렸을까? 5월 15일의 시위 구호를 만든 김대중 세력이 배후였는지 의심스럽다.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5월 15일 오후 한시 반경 시위대가 남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경찰이 한 줄로 남대문 앞에 서 있었는데 시위대 속에서 뛰쳐나온 괴한들이 시내버스 한 대를 탈취하여 전속력으로 경찰들을 향해 돌진하여 한 명을 현장에서 즉사시키고 4명에게 중상을 입히는 방법으로 경찰의 남대문 저지선을 뚫었다는 사실이다. 특수부대원 실력의 도시 게릴라 작전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은 그 괴한들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대학생들이었을까? 경찰을 그토록 처참하게 죽이는 대학생은 없다. 그러면 북한군 특수부대원이었을까? 당시 괴한들에게 버스를 빼앗긴 운전사는 급커브로 버스를 돌진시켜 순간적으로 경찰들을 압사시킨 다음 다시 급커브로 차를 꺽어 경찰의 추적을 따 돌리고 빠르게 사라지는 그런 운전을 학생들이 할 수 있기는커녕 남한의 시내버스 운전기사들 중에는 아무도 그런 운전을 할 수 없다고 밝혔었다.

시위대가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경찰을 깔아 죽이는 흉기로 삼았다는 것도 엄청난 사실이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보다 큰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경찰이 남대문은 사수해야 했다. 경찰이 한 줄로 남대문 앞에 서 있었을 때 심재철과 유시민은 감히 경찰의 대한민국 공권력에 도전하려 하지 못했다. 만약 경찰의 공권력을 무참히 짓밟는다면 그는 더 이상 학생이 아니다. 폭력시위가 그들의 목적은 아니었다. 양순한 학생들은 폭력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을 엄두를 전혀 내지 못하고 있는데, 난폭한 괴한들이 경찰을 버스로 깔아죽이는 잔혹한 방법으로 경찰 저지선을 뚫었다. 시위대 속에서 뛰쳐 나온 괴한들이 시민버스를 탈취하여 경찰을 죽임으로써 경찰의 공권력을 짓밟았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보다 더 큰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중동 순방 중에 시위대가 광화문 사거리에 이어 남대문까지 완전히 장악했다는 것은 시위대가 맘만 먹으면 금방 청와대를 점령할 수 있는 모든 고지를 장악했다는 의미가 있었다. 김대중의 사조직 <민청협>이 시위를 조직하였을 때 가두시위에서 시작하여 가두시위로 끝나는 시위가 아니었다. 그들의 목적은 경복궁에서 남대문 반경 내의 정부청사들을 점령하여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고 김대중을 청와대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남대문 앞에서 시위대 버스에 경찰이 압사당한 사건에는 정말로 그 날 대한민국 정부가 전복될 뻔하였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민청협>은 청와대 점령을 선동하였고, 유시민도 어느새 운동권 복학생들의 지시에 추종하는 쪽으로 선회하였는데,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그 날 저녁 시위대를 해산시켰기에 오늘날까지 운동권은 '서울역집회'를 '서울역회군'이라고 일컫고 있다. 이처럼 '서울역회군'이라는 용어 속에는 만약 심재철로 인해 회군하지 않았더라면 그 날로 폭력시위에 의해 김대중이 청와대 주인이 되게 할 기회를 영영 놓쳤다는 아쉬움이 담겨 있다.

청와대는 광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있었다. 따라서 간첩들이 광주에서만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5월 15일의 시위대 속에 끼여 있던 불순세력들 중에는 간첩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동교동 사람들이 있었다. 학생 시위대 속에 김대중의 비서들은 물론 경호원들까지 총동원되어 있었다.

5월 15일 밤 청와대를 점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심재철의 '서울역 회군'으로 무산되자, 김대중 세력은 5월 16일 한편으로는 신현확 총리 내각 총사퇴를 5월 19일까지 하라는 시한부 최후통첩을 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적 민중봉기 수순을 밟았다. 5공화국 대통령 선출을 위한 과도정부였던 최규하 대통령 정부에는 여당이 없었다. 여당 의원 수가 안 되어도 대통령이 힘을 쓰고 레임덕에 걸리는 법인데, 여당 의원 한 명도 없는 정부 대통령이 힘을 쓸 수 있었겠는가? 그나마 신현확 총리 내각이 있어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김대중이 내각 총사퇴를 강요하였을 때 그것을 사실상 최 대통령 정부는 붕괴되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5월 15일의 대규모 시위로 김대중 세력의 힘은 충분히 과시되었다. 김대중은 만약 신현확 총리 내각이 19일까지 총사퇴를 하지 않으면 그런 규모의 시위를 전국에서 동시에 일으키겠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이 신현확 총리 내각이 5월 19일까지 총사퇴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을 때 그 말은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사퇴하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국가원수가 국내에 없을 때 국무총리가 사퇴하는 것이 가능하며, 내각이 총사퇴하는 것이 가능한가? 세상에 내각 총사퇴 요구를 하는 국회도 없다, 하물며 일개 실업자 김대중이 무엇이관데 대통령 해외 순방 중에 내각 총사퇴를 요구한다는 말인가? 김대중은 2월 중순 다시는 소요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각서를 썼고, 그 각서를 믿고 최규하 대통령이 2월 29일 특별사면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 각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김대중이 최 대통령보다 더 높은 사람 행세하며 신 총리 내각더러 총사퇴하라고 지시하고 있었으니 최 대통령이 볼 때 이 얼마나 꼴불견이었겠는가? 그리고 국무총리 편에서 국가원수 부재시에 그 압력에 굴복할 수 있는가? 김대중은 만약 19일까지 신총리 내각이 총사퇴하지 않으면 내란을 일으키겠다고 협박하지만 총리는 대통령의 유고 혹은 부재시에 국가원수의 임무를 대행한다. 만약 대통령 해외순방 중에 어느 나라 총리와 내각이 총사퇴하면 그 나라는 그 날로 붕괴한다. 더구나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남침 절호의 기회로 보고 북한이 호시탐탐하고 있을 때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고 내각이 총사퇴하지 않으면 내란을 일으키겠다고 협박할 때 물러날 수 있겠는가? 그 누가 그때 총리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김대중이 물러나라고 하는 말 한마디에 대통령 부재시에 즉각 물러날 총리는 없다.

김대중이 <민청협> 간부들이라는 유급 홍위병들을 풀어 대학가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은 만약 부마사태같은 사태가 또 일어나면 나라가 망할 상황이었다. 그럴 때 총리가 의지할 곳은 계엄사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찾아갔었던 것이며, 대통령 부재시에는 총리가 국가원수 대행인지라 계엄사령관은 신 총리 요청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5월 17일 심야 국무회의를 거쳐 18일 0시에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선포되고 휴교령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부마사태같은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으므로 김대중 세력의 요구대로 19일 사퇴하되, 대통령이 없을 때 사퇴할 수는 없으므로 대통령 중동 순방 일정을 단축해 달라고 호소하는 한편 계엄사도 제2의 부마사태 예방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충분히 예상되는 소요 예방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끌어들인 인물은 신현확 총리였다. 5개월이 채 못 되는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신현확 총리가 한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과격시위 예방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신현확 총리가 5월 18일 자기를 끌어들이고, 바로 다음 날인 19일에 사퇴할 줄은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총리의 요청이 곧 대통령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발을 담그게 된 것이었는데, 19일 신 총리 내각이 총사퇴하자 광주에서의 소요에 대처하는 일을 떠안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요라고 보고받았는데, 21일 무장폭도들이 전남도청을 점거하면서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제2의 부마사태 이상의 사태를 일으키려는 김대중과 그것을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신현확 총리 사이의 줄다리기가 팽팽하게 진행되는 숨가쁜 사흘간이었다. 김대중은 신총리 사퇴 압박을 가하는 자신의 거리 정치에 그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은 내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정치 9단 김대중도 신 총리가 사퇴 직전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시위 진압에 끌어들일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김대중이 강공으로 몰아붙인 16일의 내란음모 일정은 김대중이 대학가에서 선동하는 소요가 사태로 악화되는 것을 예방할 목적으로 신 총리가 계엄사를 끌어들이는 비장한 카드를 쓸 것을 전혀 예상치 못한 채 진행된 일정이었다.

김대중 세력은 당시 계엄을 물계엄으로 보고 있었으며 그 사실은 5월 13일부터 15일까지의 가두시위로 재삼 재사 확인되었다, 계엄 하에서 가두시위는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5월 13일의 연세대 가두시위를 계엄군은 전혀 진압하지 않았다. 김대중의 사조직 <민첩협>이 복학생들을 움직여 14일에 광주 등 지방에서도 여러 지방 대학들이 가두시위를 하게 하였으나 여전히 계엄군은 가만 있었으며, 15일에는 시위대가 탈취한 버스에 경찰이 깔려 죽고, 십 만 명의 시위대가 언제든 청와대를 점거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여전히 계엄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 계엄은 있으나 마나인 물계엄이라는 판단 하에 김대중은 16일의 그의 내란음모 일정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희성 계엄사령관 편에서 계엄사령관에게 입법과 사법과 행정 중 그 어느 권한도 없으니 도대체 무엇이 계엄사령관의 역할인지가 애매모호하던 때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시던 날 최규하 권한대행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제주도를 계엄지구에서 제외시켰다. 이 때문에 계엄사령관의 권한에 대한 해석이 애매모호해졌다.  물론 계엄사령부도 계엄 하에서의 불법 가두시위를 마냥 방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부가 치안 유지를 위해 계엄군을 사용하기를 원하면 계엄사 편에서는 행정적 근거가 필요하였으며, 그것이 바로 제주도를 계엄지구에 포함시키는, 이른바 비상계엄 전국확대였다. 

김대중 측에서 거사 날짜까지 5월 20일이라고 명시하며 전국적 민중봉기를 선동하는 성명서를 각 언론사에 배부하였으니 정부 입장에서도 아주 다급한 주말이었다. 이것은 주동자 사전검거가 예방책인 사안이었다. 따라서 수사기관들이 주동자들을 연행할 수 있게 하려면 당시 계엄이 더 이상 물계엄이 아니라는 선언이 필요하였으며, 이런 필요에 전국 지휘관들도 국무위원들도 공감하였다. 김대중의 내란음모는 상대가 있는 게임이었으며, 이것을 막아야 하는 쪽에서도 김대중 못지 않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 5월 중순이었으며, 운동권의 허를 찌르며 5월 18일 0시에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계엄사의 이런 반전을 김대중측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김대중은 5월 22일 자기가 새 내각을 임명하면 대부분의 계엄사 장군들은 자기를 지지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설사 계엄사가 물계엄에서 반전하려 한다 해도 그것은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을 순방하는 중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대중측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 일정을 단축하고 귀국하여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김대중 논리에서 민중의 힘이 가장 컸으며, 민중은 자기 편이었다. 천주교가 자기 편이요, 5월 11일 정읍 동학제에서 오 만 명의 인파가 자기 연설을 들었으며, 15일 서울에서의 대규모 시위도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김대중은 이런 분위기에 들뜬 채로 5월 16일에 다음 주로 예정된 전국적 민중봉기 마무리 준비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의 외곽단체와 사조직 간부들이 북악파크호텔에 다시 소집되었으며, 김대중이 심재철에게 이해찬을 보내 5월 22일 총궐기대회를 한다고 통보하였다. 15일 밤 서울역 회군을 단독으로 결정하고 강행하여 두고두고 운동권의 원성을 사게 된 심재철은 22일로 에정된 총궐기 대회에 협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사 날짜를 놓고 김대중과 <민청협> 사이에 엇박자가 있었다. 5월 16일은 김대중 일당에게는 양김씨 회동 기자 회견 등 아침부터 몹시도 바쁜 날이었다. 그런데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했던가! 그 날 심재철이 전국 58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을 이화여대 대강당으로 소집하여 연석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그때에 총궐기 대회 날자를 통보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그런데 문익환 목사도 사공이요, 김대중도 사공이다 보니 여기에 엇박자가 생겼다. 북한이 이석기 기념우표를 발행하여 줄 것인가? 문익환 목사 기념우표는 발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친히 문익환 목사에게 친필 서신을 전달해 주고 있었다. 이석기에게 'RO' 조직이 있다면 문익환 목사에게는 <민청협>이란 조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민청협> 고문이었기에 북한이 문익환 목사 기념우표는 발행하였다. 이처럼 <민청협>을 직접 통솔하는 문익환 목사도 김대중과 더불어 '거리정치' 사공이었다.

그 날 문익환 목사가 총궐기 대회 날자는 5월 20일이라고 각 언론사에 통보하였을 때 김대중의 마음이 불같이 급하였다. 만약 20일 전국적 민중봉기를 시작하였는데, 그 날 조간신문에 신현확 총리 내각 19일 오후 총사퇴 기사가 나면 국민 보기에 모양새가 좋지 않다. 무엇보다도 내란 음모가 사전에 준비되어 있었다는 티가 날 것이다. 따라서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김대중측의 시한부 최후통첩에 어떻게 응하는지 20일 보도기사를 읽고, 신현확 총리 내각이 총사퇴하지 않았을 경우 22일에 총궐기대회를 개최하여야 내세울 명분이 있다. 이미 <민청협>이 이해찬을 시켜 심재철에게 20일로 거사 날짜를 변경하였다는 통보를 했다는 말을 들은 김대중은 즉시 심재철에게 사람을 보내 거사 날짜는 예정대로 22일이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김대중의 내란음모 행동대장들이었던 <민청협> 간부들 입장에서는 22일은 너무 늦었다. 계엄령 하에서의 불법 거리정치 배후가 언제 탄로날지 몰랐다. 계엄사가 언제까지 무대응으로 있을 것인가? 거사가 성공하려면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일을 완료하여야 했다. 그래서 거사 날짜를 20일로 앞당겨 조종했고, 문익환 목사는 <민청협> 간부들의 건의 대로 20일로 총궐기 대회 날짜를 정하고 각 언론사에 통보하였다. 도대체 문익환 목사가 무엇을 하였기에 그가 죽은지도 어언 20년이 지난 지금껏 운동권의 세계에서는 그가 신화적 존재인가? 그것은 그가 여러 해 동안 <민청협>을 키웠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날 5월 16일의 상황에서 <민청협>의 건의는 문 목사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러나 4월부터는 자기가 보스라고 생각하는 김대중 편에서는 어째서 이 중요한 문제를 문 목사가 자기와의 상의 없이 임의로 성명서 하단의 총궐기 대회 날짜를 바꾸어 언론사들에 배부한 것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언성을 높여 <민청협> 간부들에게 총궐기 대회 날짜는 예정대로 22일이라고 말하였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이틀 전이었던 1980년 5월 16일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소집된 전국총학생회장단 연석회의에 58개 대학이 참여하였고, 그 사회자는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으나, 실은 김대중이 <민청협>을 시켜 배후조종하는 회의였다. 1988년 11월 30일의  광주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한 심재철의 숨바꼭질은 그 회의의 배후에 재야 정치단체 국민연합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추는 것이었다. 그런데 위의 청문회 뉴스 동영상에서 보듯, 심재철은 이 숨바꼭질을 하다가 자기 입으로 세가지 사실을 노출하고 만다. 첫째로, 심재철이 총궐기 대회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가 실제로 5월 20일과 22일로 사전 예정되어 있었으며 그 날짜가 5월 16일에 확정적으로 잡혀 있었다. 둘째로, 김대중의 사조직 <민청협>은 심재철이 보기에도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과 동일 조직이었다. 셋째로, 실제로 <민청협>과 김대중 사이에 거사 예정일을 5월 20일과 22일 중 어느 날로 정하느냐의 혼선이 있었다.

최규하 과도정부는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고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탄생한 정부였으므로 선거법 개정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여당은 존재하지 않고 야당은 협조하지 않으므로 최 대통령과 신 총리의 마지막 방법은 개헌심의위원회 구성뿐이었다. 1980년 4월부터의 상황은 선거법이 직선제로 개정되면 김영삼씨에 밀려 대통령 출마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인지 김대중은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개헌을 방해하였고, 그 내용이 5월 16일 각 언론사에 배포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선언문' 전문에 포함되어 있었다. 선언문 제목은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선언문'이라고 붙였으나, 실상 그 내용은 최 대통령의 과도정부가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것을 방해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려는 내용들뿐이었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원래 계획은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으며, 김대중이 문익환 목사를 시켜 5월 16일 각 언론사에 배포한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선언문'은 5월 20~22일에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기 위한 수순이요, 포석이었다. 선언문 내용은 5월 19일 오전 10시까지 '비상계엄 즉각해제, 신현확 총리의 퇴진, 개헌심의위원회의 해체'를 하지 않으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겠다는 협박이었다.  

과도정부의 취약점은 안보였다. 이런 안보의 취약점 때문에 하루속히 5공화국 대통령이 선출되어야 했고, 새 대통령이 선출되어 5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는 비상계엄이 유지되어야 과도정부가 헌법을 개정하고 선거관리를 할 수 있는 것인데, 김대중이 비상계엄 즉각해제를 요구한 것은 사실상 과도정부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한 것이었다. '신현확 총리의 퇴진' 이것은 신 총리가 수용하여 5월 19일 퇴진하였다. 그러나 여당이 존재하지 않은 과도정부에서 내각마저 총사퇴하면 대통령 혼자 헌법을 개헌할 수 있는가? 이것은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지 못하도록 김대중이 최 대통령의 손발을 다 묶는 행위였다. 세 번째 요구 사항이 '개헌심의위원회의 해체'였다. 최 대통령의 과도정부는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개헌이었는데,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최 대통령 과도정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요구였는데, 그것을 과도정부가 수용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세 가지 요구 중에서 두 가지 요구는 과도정부가 수용하기 불가능한 것이므로 김대중의 내란으로서의 광주사태는 예고되어 있었다.

5월 21일부터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광주사태'라고 명명한 5.18 사건의 명칭은 얼마만큼 타당한가? 김대중의 본래 계획은 전국적 민중봉기였다. 그러나 전국적 민중봉기는 처음부터 불가능하였다. 광주와 목포 등 전라남도 서남부 지역, 그리고 정의구현사제단이 포진하고 있는 전라북도 몇 개 도시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도시에서도 호응하지 않을 것이었다. 서울?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일차 목표는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것이었으며, 윤상원 등 광주의 광주의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광주사태 기간 중에 5월 15일 규모의 시위만 서울에서 한번 더 일어나도 4.19 때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였듯이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5.16군사혁명 20주년에 최규하 대통령에게 유신잔당 낙인을 찍으며 시위를 선동하는데 서울시민들이 호응해 주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광주의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예상한 서울의 상황과 실제 상황은 전혀 달랐다. 5월 19일 서울의 <민청협> 간부들이 아무리 시위를 선동해도 서울 시민들의 반응은 싸늘하였으며 아무도 호응해 주는 이가 없었다. 전국적 민중봉기는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라남북도 여러 지역에서, 특히 전라남도 서남부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한 5.18 사건은 광주사태라는 명칭이 함축하는 의미보다는 그 지역적 해당 범위가 훨씬 넓은 사건이었다.

 

* 윗글 끝에서 두번째 단락의 김인원의 증언은 역사로서의 5.18 제3권: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비화들 64~68쪽에서 상세히 읽으실 수 있습니다.

* 광주청문회의 재관전을 위해서는 역사로서의 5.18 제3권: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비화들 9~78쪽 필독을 권합니다.

* 이 글을 옮겨가실 때 사용하실 출처 링크는 http://www.study21.org/518/doc/5-17.htm 입니다.

글 작성일: 2013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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