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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재판의 거짓 판단을 고발한다 False Judgments of 5·18 Co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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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재판의 허위주장 고발 (1): 5월 18~21일 사건에 대한 원심 판단

 5·18 재판 1심인 서울지방법원 1996. 8. 26. 선고 95고합1228 판결문 중 ‘범죄사실’에서 1980년 5월 17일 저녁 상황에 대한 이 판단은 타임머신 독심술에 의해서만 가능한 판단이다: “피고인 전두환, 같은 노태우는 공모하여, 피고인 노태우가 같은 날 17:00 경 전군 주요지휘관회의를 마치고 수경사로 돌이와” (서울지방법원 1996).  도대체 전두환과 노태우가 어디서 대화를 하였다는 말인가? 그리고 대화 내용이 무엇이길래 공모라고 하는가? 아무리 타임머신 독심술이라지만 대화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야 평가가 가능한 것이다. 대화 내용은커녕 대화를 하였는지 여부조차 모르면서 공모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장관에 대한 아래의 판단은 전문가의 판단을 존중해 주는 민주주의의 이상과 잘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피고인 이희성, 같은 주영복은 같은 날 21:42 중앙청에서 신현확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제42회 임시국무회의에 참석하여, 피고인 주영복은 제주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계엄법상 비상계엄 선포가 가능한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과 적의 포위공격이라는 상황이 발생한 사실이 없음에도, 단순히 북괴의 동태와 전국적으로 확대된 소요사태 등을 감안할 때 전국 일원이 비상사태하에 있다고 판단되어 계엄확대 선포안을 제출한다고 제안 설명을 한 후 반대 토론 없이 8분만에 의결시키고, 이어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같은 날 23:40 경 정부 대변인인 이규현 문화공보부장관으로 하여금 같은 날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고 발표하게 하고 (서울지방법원 1996).
 국가는 안보전문가들에게 안보 전략의 판단을 맡겼다. 그런데 공소시효가 지난 후에 후대의 법관들이 그 정책 판단이 완전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이 타당한가? 김영삼 정부 법정이 1980년의 안보 전문가들의 안보정책 판단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린 바로 그때 김영삼 정부 경제 전문가들은 정책 판단을 잘못하여 IMF 환난이 초래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정책 판단이 완전하지 못했다고 하여 후대의 정부가 김영삼 정부 경제 관료들을 대상으로 사법적이 심판을 할 수 있는가? 이처럼 1980년 5월 17일에도 당시 상황이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필요하였는지의 여부는 일차적으로 당시 안보전문가들의 판단의 몫이었다.  동 판결문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포고령 10호 발령에 대하여 이렇게 판단한다:
피고인 이희성은 위와 같이 비상계엄의 시행지역이 전국으로 확대됨에 따라 같은 달 18. 01:00 경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정치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 금지, 언론, 출 판, 보도,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 ○○대학 포함)의 휴교, 공공집회에서의 목적 이외 의 선동적 발언과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 불허, 포고령 위반자에 대한 영장 없는 체포, 구금, 수색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계엄포고 제10호를 발령하고, 이에 따라 국회의원들 의 국회의사당과 정당 당사 출입까지도 통제하도록 지휘하고 (서울지방법원 1996).
 포고령의 취지는 김대중의 거리정치를 막자는 것이었고, 5·18 재판의 취지는 김대중의 거리정치를 정당화시켜 주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살피면 포고령이 선포되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김대중의 조직들이 신현확 총리 내각을 총사퇴시키기 위해 언론 메체를 활용하여 19일부터 대규모 시위를 개최하고, 총궐기대회라는 명칭으로 20일과 22일에 전국 규모의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래서 언론이 그런 거리 정치에 이용되는 것을 저지할 필요가 있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당시 광주의 시위대들이 “최돼지 물러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포고령의 내용이 전?현직 국가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를 금한다는 것이었다:
마.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1) 전·현직 국가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
2) 북괴와 동일 주장 및 용어를 사용, 선동하는 행위
3) 공공집회에서 목적 이외의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는 일체 불허한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9:578).
 시위대더러 화형식으로 전?현직 국가원수를 모독하거나 현직 국가원수를 최돼지라고 호칭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것이 군사독재요 쿠데타인가? 1980년은 최소한의 국가 기강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던 때였다. 우리는 포고령 10호를 그런 시대 배경에 비추어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5월 18일 아침 사건 발단에 대하여 1심은 이렇게 판단한다:
사전행동지침에 따라 광주 북구 용봉동 300 소재 전남대학교 정문에 모이기 시작하여 같은 날 10:00 경에는 2백여명에 이른 학생들이 공수부대원들의 학내 잔류 학생에 대한 구타행위를 비난하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공수부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등 시위를 하자, 위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의 강제 해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외에 머리 등을 무차별 가격하고 체포한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여 충돌이 발생하고 (서울지방법원 1996).
 18일은 일요일이었으며 19일로 예정된 가톨릭농민회 전국대회 행사 준비 마무리를 위해 심야에 학교에서 활동하던 운동권 학생들이 있었다. 휴교령 업무를 위해 들어온 7공수 장교는 그 학생들에게 귀가를 권했다. 그들에게 구타하였는지의 여부를 그때 바깥에 있던 학생들이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7명씩 두 줄로 정문 경비를 서고 있었던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이 돌을 던졌을 때 피하지 않고 부동자세로 있다가 얼굴이 이그러졌다. 판단을 공정하게 하려면 최초의 부상자는 공수부대원이었다는 사실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어 동 판결문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그 날 오전에 보고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학생들이 같은 날 10:30 경 다른 학생 6백여명과 함께 광주 시내 중심지로 이동 집결하여 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 등을 요구하면서 경찰 병력과 격렬한 공방을 벌이는 등 시위가 확산되자, 피고인 전두환, 같은 이희성, 같은 황영시, 같은 정호용은, 광주 ○○구 ○○동98 소재 전투병과교육사령부(이하 전교사라 한다) 등으로부터 위와 같은 시위 상황을 보고받고, 광주에서의 시위가 피고인들의 정국 장악에 상당한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의 확산을 방지하고,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회 및 행정부를 전복 또는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할 목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 사법, 행정을 통제하는 비상기구의 설치, 운영 등의 조치를 계속 추진하기 위하여, 광주 시위 상황에 대한 언론보도를 통제하면서 강력한 진압이 예상되는 공수부대의 시내투입과 증파로 이를 조속히 제압할 의도하에, 피고인 이희성은 윤홍정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이하 전교사령관 이라 한다)에게 계엄군을 투입하여 조속히 시위를 진압하라고 독려하고, 위 윤홍정은 다시 정웅 31사단장에게 7공수여단 33, 35대대를 광주시내로 투입, 시위를 진압하도록 지시하여, 전남대학교와 조선대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위 부대원들이 금남로 일대로 출동 (서울지방법원 1996).
 그런데 아무리 타임머신 독심술에 의한 주장이라지만 이런 주장은 불가능하다. 보안사령관이 5월 18일 오전 10시 반에 보고를 받았다는 주장은 보고 장소와 보고자 성명이 있어야 가능하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보안사령관에게 보고를 한다는 말인가? 훗날 노무현 정권 때 명명백백하게 밝혀졌듯이 전교사는 광주사태 기간 중에 전혀 보안사령관에게 보고를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원심의 이 판단은 완전 거짓이다:
광주에서의 시위가 피고인들의 정국 장악에 상당한 장애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의 확산을 방지하고,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회 및 행정부를 전복 또는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할 목적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 사법, 행정을 통제하는 비상기구의 설치, 운영 등의 조치를 계속 추진하기 위하여, 광주 시위 상황에 대한 언론보도를 통제하면서 강력한 진압이 예상되는 공수부대의 시내투입과 증파로 이를 조속히 제압할 의도하에 (서울지방법원 1996).
 그런 의도가 있었다고 하는 픽션 소설이 타임머신 독심술의 걸작은 될 수 있을지언정 전혀 판결의 근거는 되지 못한다. 오전 10시 반에는 아무도 그 날 광주사태가 일어날 줄 예상하지 못했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등장한 것은 12시경이었으며 그때서야 시위대가 화염병을 들고 동명동 파출서 등 파출서들을 습격하여 파괴하고 방화하기 시작하였다. 경찰의 마지막 진압 수단은 페퍼포그였는데 이것마저 시위대가 불태우자 안병하 도경국장이 자신의 육사 동기 윤홍정 전교사령관에게 군 병력 지원을 요청했었던 것이다.  타임머신 독심술의 또 하나의 걸작은 원심의 이런 판단이다:
한편 전날 부상을 입은 시민 김경철(남, 23세)이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한데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유언비어가 난무하면서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같은 날 10:00경부터 시민들이 대규모로 가세하면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며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자, 이들을 소총 개머리판과 진압봉으로 무차별 가격하고 심지어는 일부 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하는 등 강경한 진압작전을 감행하여 그 과정에서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고, 그 중 김안부(남,34세)가 전두부열상 등으로 사망하고 (서울지방법원 1996).  광주사태 기간 중에는 그 어느 광주시민도 김경철 군 사망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사실은 유네스코에 세계유산기록으로 등재된 5·18 기록물로도 분명히 확인된다. 김경철 군에 대한 주장은 광주사태 최초 사망자들이 시민이 아니라 군인과 경찰들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해법으로서 여러 해 후에 등장한 것이요, 그가 언제 어디서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조차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누가 길에 쓰러져 있었을 때 누군가가 적십자병원으로 후송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시위대가 경상도 번호판이 달린 트럭들을 불태우고 그 운전사들에게 몰매를 가하여 길에 쓰러져 있었을 때 군인들은 병원으로 후송해 주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병원으로 후송해 준 착한 사람이 가해자인가?
 김경철군의 어머니는 김군이 5월 20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은 알려진 사실이 아니요, 그의 사망원인이 광주사태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도 없다. 그에 대한 주장들이 계속 바뀌었다는 것은 여러 번 거짓말이 반복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가 19일 사망했다는 주장은 최초의 사망자들이 군인과 경찰들이라는 불편한 사실에 대한 해법으로 등장한 것인데, 그 경우 그는 광주사태와 관련이 없는 사고를 당하였다. 19일 사망설은 그가 18일 점심시간에 부상을 입었다는 것인데, 그때는 광주 시내에 아직 공수부대원 그림자도 없었다. 시위대에 인질로 납치된 경찰 병력을 구조하러 공수부대가 처음 동원된 떼는 오후 5시경이었다.  김경철군 사고에 대한 유일한 자칭 목격자들은 그의 농아 친구들인데, 그들은 10년도 더 지나서야 수화로 그런 주장을 하였다. 수화를 통역한 이에 따르면 김경철 군이 낮에 시위하다 부상을 당하였다는 것인데,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를 들을 수 없었던 그가 시위에 참여하였을 리가 있었는가? 그리고 통역의 말이 김군의 어머니 증언과 너무 다르고 사실과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김군의 어머니 임금단씨 증언에 따르면 김군은 시위하러 외출한 것이 아니라, “1980년 5월 18일 10시 경철이는 처남이 서울서 내려 와 영암집엘 간다고 하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배웅을 나갔다.” 임씨에 따르면 김군은 19일 저녁 8시에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여 20일 사망하였다. 김군이 병원에서 사망헸음을 어머니가 알게 된 날이 20일이었다. 김영택 기자 역시 김군 사망일자로 20일로 기록한다.
 자, 5·18 법정은 19일 아침에 대규모 시위가 시작된 원인은 그 날 김경철 군이 사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어디에도 그런 기록과 증언이 없는데 법관들이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가? 김군이 그널 저녁 병원에 입원하여 다음날 사망할 것을 미리 알고 시위를 시작하였다는 말인가? 김군 사망은 광주시민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정동년 등 고소인들이 전두환 등을 고소한 후에 드러난 사실, 즉 최초의 사망자들은 시민이 아니라 군인과 경찰들이라는 불편한 사실에 대한 해법으로서 재판용으로 김경철에 대한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뿐이다. 김경철군에 대한 거짓말은 19일의 대규모시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말이다. 설사 타임머신 독심술에 의한 판단이었다 할지라도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19일 아침 시민들을 자극했던 것은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였지 결코 그 날 밤 김경철이 병원에 입원할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가해자가 계엄군이었다는 주장은 군인들이 그를 병원으로 후송해 주었다는 것인데, 그는 처음에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다. 군인이 후송하였으면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하였을텐데 왜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던 것일가? 보호자 없이 입원한 그가 사망하자 적십자병원은 즉시 그를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하였다. 광주의 민간병원이 김경철 군 가족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저버린 그를 국군통합병원은 받아서 시신을 씻고 영안실에 보관하며 가족을 찾으려 노력했을 뿐이다. 광주국군통합 병원은 민간인들을 위해서도 선한 일을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계엄군이 가해자 누명을 써야 할 이유였는가? 김군은 후두부 열상을 입었다. 시위현장에 있었던 이들은 이구 동성으로 시위대가 던진 돌이 시민 머리 위로 떨어졌다는 사실을 이구 동성으로 증언한다. 시위대가 뒤에서 던진 돌이 앞에 있는 시민 머리 위로 떨어져 머리를 크게 다치고 후송된 시민이 있다는 시민군 증언이 있다.  앞의 판결문에서 “일부 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하는 등”이란 문구는 공수부대원들이 대검을 사용하였다는 주장인데, 어떻게 전혀 아무런 확인 없이 이렇게 판단하는가? 공수부대원들은 대검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검을 허리에 찬 군인들은 광주시민들이었다. 처음 시위진압에 동원된 부대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공수부대였던 것이 아니라, 광주시민들로 구성된 광주향토사단 방위병들이었다. 방위병들은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을 때는 현역과 똑같은 군복을 입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대검이 없는 공수부대원들과 달리 방위병들은 대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던바 그 사실을 방위병 서만복이 증언한다:

5월 18일. 드디어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오후 2-3시경 11경비대대 2중대의 175명 정도가 군용트럭을 타고 광주은행 본점 앞으로 출동하였다. 우리는 현역 군인들과 똑같은 군복을 입고 명찰과 계급장 등은 모두 떼어버렸다. 모두 M16으로 무장하고 곤봉은 들지 않았으며 대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서만복 1989).   그 175명이 누구였던가? 광주시민들이었다. 누가 대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는가? 공수부대원들이었는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광주시민들이었다.
 김안부의 사망원인에 대해서도 법관들은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는 픽션소설을 썼다. 판결문대로라면 김안부가 시위하다 계엄군 진압봉에 맞았다는 것인데 도대체 그렇게 판단할 증거나 증언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선 법관들은 김안부씨 사망 날자에 대하어 거짓말을 하였다. 그는 20일 오후 5시에 사망하였다. 판결 논리대로라면 김안부가 19일 사망하였으니 그 후의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정당하다는 것인데 이것은 사건 진행 순서의 앞뒤를 뒤바꾸는 것이다. 광주시 서구 월산동 23의 22 4통1반에 거주하는 김안부(金安夫, 36)의 사망일자는 5월 19일이 아니라 20일었다. 그는 그날 오후 5시경 광주공원 근처 전남주조장 앞 공터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사망원인이 광주사태와 관련이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만약 그의 사인이 광주사태와 관련이 있었다면 한가지 단서는 그날 그곳은 이미 시민군 혹은 시위군중 점령 지역이었다.  20일 이미 계엄군은 도청광장에 갇힌채 시위군중에 사면팔방으로 겹겹히 포위되어 있었다. 그 날 오후에 단 한 명의 계엄군이라도 광주공원 근처에 얼씬거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만약 김안부씨 사망사건에 가해자가 있었다면 그 범위는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하고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던 세력으로 좁혀진다.  희대의 타임머신 독심술 걸작품 판단이 동 판결문에서 이어진다:
그 무렵 피고인 전두환은 광주지구 보안부대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으면서 그 보고 및 조치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1980. 5. 19. 경 최예섭 보안사 기획조정처장과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최경조 대령, 중앙정보부 박정희 과장을 광주에 파견하여 상황을 보고받거나 연행자 조사 등을 지원하도록 하는 한편 피고인 이희성에게 시위의 조속한 진압을 요구하고, 피고인 전두환은 현지로부터의 건의에 따라 같은 이희성에게 시위 진압에 소극적인 윤홍정 전교사령관을 교체하도록 요구하고 (서울지방법원 1996).
 도대체 보안사령관이 언제 광주지구 보안부대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다는 말인가? 광주사람 홍성률을 광주로 파견한 것은 권정달의 결정이었다. 독심술사들의 위의 주장은 한편이 픽션소설이었음이 노무현 정권시절 드러났다. 독심술사들이 쓸 수 있는 픽션소설의 한계는 역사적 사실 조작의 한계 때문이다. 그 어느 픽션소설가 “피고인 전두환은 광주지구 보안부대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으면서”라는 수동체 픽션 소설을 쓸 수 있다. 그런데 보고자가 누구였느냐를 조작할 수는 없다. 즉, “누가 보안사령관에게 어떤 방법으로 보고하였다”라는 능동체 문장으로 가공인물을 조작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무현 정권 때 국방부 과거사위원회에 의해 확인된 또 하나의 사실은 19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소집한 광주사태 대책회의 때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출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위의 픽션소설이 한낱 엉터리 픽션소솔에 지나지 않았음이 다 드러난 지금도 여전히 그런 엉터리 픽션소설에 의거한 판결이 유효하여야 하는가?
 5·18 재판은 시민군의 차량돌격에 대하여도 몹시 불공정한 판단을 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같은 달 20. 다시 엠(M)16 소총 등을 휴대한 3공수여단 병력 장교 255명, 사병 1,137명을 광주에 보내, 시위 진압에 추가 투입하고, 같은 날 오후 들어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중심이 되어 차량 시위가 전개되면서 트럭, 버스 등의 돌진 공격이 계속되자, 3,7,11 공수여단 병력들이 최루탄과 진압봉을 사용하여 진압을 계속하고, 같은 날 24:00 경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 12,15대대 장교들이 시위대의 차량 공격에 대응 발포하여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고 (서울지방법원 1996).
 시위대의 차량 돌격은 군경을 목표물로 하는 도시 게릴라전 방법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차로 사람을 덮치며 그 차에 깔린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는 기본 상식이다. 그 날 이미 군인 한 명과 경찰 4명이 시위대 차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재판이 공정하려면 시위대 차량 돌격의 군경희생자에 대한 언급도 있어야 할텐데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공수부대의 과잉 진압에 격분한”이란 문구는 사실의 왜곡이다. 그 날 택시기사 한 명이 사망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택시기사들을 상대로 집중적으로 퍼뜨리는 조직이 있었다. 택시기사들이 그 유언비어에 속아 선동되고 이용당하였던 것이지 결코 택시 기사를 상대로 하는 과잉 진압에 격분하였던 것은 아니다.  “광주역 앞에서 3공수여단 12,15대대 장교들이 시위대의 차량 공격에 대응 발포하여 많은 광주 시민들이 부상을 입고”이란 문구도 거짓말이다. 도대체 누가 발포하였으며 누가 부상을 입었다는 말인가? 1989년 1월 27일의 광주청문회 때 임수원 광주사태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장은 "E-8 가스탄 발사기의 가스 소리가 기관총 소리와 흡사해서 생긴 오해"라고 증언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시민군 김수영 역시 동일한 증언을 한다. "광주역에서는 군인들이 쏘는 신호탄이 다다다다 소리와 빨간 불꽃을 내며 날아다녔다" (김수영 1988).  동 판결문의 이어지는 판단은 21일 무장시민군 등장 및 최초의 발포 사건 등 아주 중요한 사건에 대한 판단이다:
피고인 이희성, 같은 황영시, 같은 정호용은, 같은 달 21. 10:00 경 정웅 31사단장으로부터 전교사를 통해 시위대의 주장 내용이 정치적인 것이므로 물리적인 수습보다는 정치적인 수습이 최선이라는 내용의 사태 수습방안을 건의받고, 같은 날 08:00 경부터 전라남도청(이하 전남도청 이라 한다) 앞에서 수만명의 시위대에 의해 철수를 요구받고 있는 11공수여단 대대장들로부터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여 줄 것을 건의받았으나 이를 무시함으로써 같은 날 12:00 경 전남대학교 앞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차량 공격 등을 시도한 시위대에게 발포하여 성명불상 운전사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고, 같은 날 13:00 경 전남도청 앞에서 11공수여단 병력이 장갑차와 버스를 이용하여 돌진해 오는 시위대에게 발포를 시작하고, 이어 인근 건물 옥상에 배치된 병력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집단적으로 발포하여 박♤환(남,26세) 등이 총상으로 사망하는 등 상당수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이에 따라 시위대들이 광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의 경찰서, 지, 파출소 등에서 총기와 실탄을 확보하여 무장 저항을 시작하자, 공수부대원들이 전남도청 일대에서 이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서울지방법원 1996).
 시민군이 전라남도청을 점거하려 한 목적은 광주판 꼬뮌으로서의 해방구를 설치하려는 것이었다. 해방구가 설치된다는 것의 정치적 의미 혹은 상징적 의미는 광주는 더 이상 대한민국 통치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엄군 철수는 대한민국 영토 포기와도 같은 것이므로 경솔하게 철수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이 사흘간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쉬지 못하였기 때문에 병력이 즉시 교체되어야 했다. 그래서 보병부대 20사단과 병력을 교체시키려 하였으나 계엄군이 사면 팔방으로 시민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헬기로 병력을 교체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시민군이 헬기를 향해 사격하였으므로 병력 수송이 불가능하였다.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을 깔아죽인 것이 어디 보통 사건인가?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을 압사시켜 군인 편에서 발생한 희생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지칠대로 치져 녹초가 되어 있고 더 이상 피할 곳도 없는 군인들을 향하여 전속력으로 장갑차와 버스가 달려올 때 그 누구라도 본능적으로 공포탄 발사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 이후의 사건 전개에 대하여 이 판결문은 허위진술하고 있다. 이 판결문 주장은 계엄군이 집단 발포하니깐 시민군 무기 탈취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군 무기 탈취는 오전 9시경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시민군은 오전 9시에 군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비아로 출발하였으며 전라도 38개 무기고에서 무기고를 탈취하기 위해 무기 탈취 특공대들이 일제히 출발하였었다. 오후 3시경부터 무장시민군들의 공격이 시작되니깐 공수부대원 몇 명이 도청 바로 옆 건물 옥상에 올리가 공포탄을 발사하며 시민군 특공대와의 총격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타임머신 독심술사들의 걸작 판단이 이어진다:

피고인 전두환, 같은 이희성, 같은 주영복은, 광주에서의 시위와 시민들의 무장 상 황을 보고받고 피고인들의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정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강경진압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여, 광주에서 피고인들의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며 저항하는 시위 대를 무장 폭도로 규정하고 그 정을 모르는 계엄군으로 하여금 광주 외곽을 봉쇄하고 자 위권 발동이라는 명목으로 발포를 하게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조속히 진압하기로 공모하고 (서울지방법원 1996).

 그런데 노무현 정권 시절 분명하게 확인되었듯이 5월 21일의 광주사태 대책회의 때도 보안사령관은 참석하지 않았다. 위의 픽션소설대로라면 시민군이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주영복 국방장관 퇴진을 요구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실제 구호는 “최규하 물러나라” “신현화 물러나라”였다. 선거로 정권이 교체되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그런데 시민군이 선거 없이 무장봉기로 정권을 교체하려 한 것이 어째서 민주화라는 말인가? 시민군의 실제 구호와 요구 사항은 대통령과 총리 퇴진이었는데 어째서 그런 언급이 전혀 없는가? 시민군은 단 한번도 이희성 계엄사령관이나 주영복 국방장관 이름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시민군이 요구한 것은 신현확 총리 내각의 총사퇴였다. 그 요구대로 신 총리 내각이 19일에 총사퇴하였음에도 여전히 시민군 구호는 “신현확 물러나라”였다.
 
퍼 가실 글 주소 http://www.study21.org/518/court/first-trial-1.htm

 

광주사태의 진실탐구 자료실
 

5.18 유족회 회장 아들 전영진 열사 가해자는 시민군이었다

계엄군과 시민군 중 누가 먼저 쏘았는가?

광주사태 유발한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

BBC International

글 작성일: 2012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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