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연구사료 광주의 빨치산 사관
북한의 5.18사관과 광주의 빨치산 사관 The North Korean Perspective of 5.18 
광주사태 동영상
광주사태 사진

광주사태 진실탐구 토론장

광주사태 카페 자료실

광주사태 증언자료 카페

BBC 뉴스 동영상 칼럼
미국시사해설

영어설교 방송실
시사 칼럼
영화상영관
시사동영상
추천사이트
사이트맵
도서 검색창

무엇이 빨치산에 대한 광주시민의 사관인가?




탈북자들과 탈북군인들이 이구동성으로 광주사태 때 북이 개입하였다고 증언하는 이유는 북한주민이 남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광주사태에 대하여 잘 알고, 또 객관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북의 개입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들 중 두가지를 든다면 5월 18일부터 북한에서는 광주사태(북한용어로 광주인민봉기)를 생중계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5.18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5월 21일 오후 무장시민군이 점령한 후에야 남한에서는 이것이 봉기라는 사실이 인지되었으며, 5월 22일 운동권이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발행함으로 그제서야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미리 알고 있었으며, 5월 18일부터 생중계할 준비를 갖추어놓고 있었다.

북한이 광주사태 때 개입하였다는 또 하나의 유력한 증거가 광주사태 때부터 5.18사기꾼들이 전세계에 유포해 온 "전두환 5,000명 학살" 유언비어이다. 5.18사기꾼들은 그 유언비어를 내내 유포해 오다가 1988년 12월 광주사태 청문회 때가 되어서야 2,000명 이하로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그러면, 5.18사기꾼들 중 그 누구도 5,000명이란 수를 계수해 본 적이 있었는가? 아니다. 광주의 의사들과 목회자들과 수사관들이 최종 확인한 시신의 수는 160 여구였으며, 20 여년이 지난 지금 그 숫자는 정확한 숫자임이 명확히 확인되었고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5,000명 사망" 유언비어는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그것은 이북방송에서 온 것이었으며, 위의 동영상에서 보는 바 북한의 광주인민봉기 생중계를 다수의 광주 시민군이 청취하고 있었다.



위 사진에서 우리는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5.18 기념 집회를 보는바, 광주사태 발생과 때를 같이하여 북한에서는 "광주인민봉기 지지대회"가 열렸는데, 북한은 광주시민군이 들으라고 방송했으며, 실제로 광주시민군이 그 방송을 들으면서 시민군 군사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광주사태 당시 폭도들이 방송국들을 불태운 이유 중의 하나는 이북방송을 들으라는 강요였다. 주파수로는 이북방송 가청지역이 아닐텐데도 북한이 어떤 준비를 했길래 광주시민군 중 다수가 이북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타 지역에서는, 심지어 이북방송 가청지역이었던 경기도에서도, 북한의 광주사태 생중계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광주시민군은 알고 있었고 듣고 있었다.



광주인민봉기 생중계와 더불어 북한군은 남침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니 북한주민들에게 광주사태는 제2의 한국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갔었다는 생생한 경험이었다. 요즘 탈북자 단체가 북한에 삐라를 뿌릴 때 그 예상 독자는 북한 주민이다. 이처럼 광주사태 당시 평양방송이 광주인민봉기 생중계 방송을 하였을 때에도 그 예상 청취자 중에 광주시민군이 끼어있었으며, 그래서 방송의 목적은 선동이요, 자극이었다. 북이 "5,000명 사망설" 유언비어를 흘렸던 이유는 시민군 선동 수단이요 대남 심리전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광주사태 선동이 목적이었던 북한의 광주인민봉기 생중계 내용이 정확하였을리 없다.



그러나 적어도 광주사태에 대한 영상물 정보에 관한 한 북한이 남한보다 20여년 빨랐다. 1980년 5월 28일자 대한뉴스는 평양방송이 방영한 광주사태 뉴스를 잠깐 보여준다.  그러나, 이 뉴스는 TV에서 보여준 뉴스가 아니라, 극장에서 영화 상영 전에 보여주었던 뉴스였기에 그날 극장에 가지 않았던 대다수의 국민은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북한 주민이 본 그 광주사태 장면이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가 찍은 영상물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최근 몇년간 KBS가 푸른눈의 목격자가 촬영한 것이라며 보여주는 영상물과 똑같은 영상물을 북한 주민들은 이미 20여년 전에 보고 있었으니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구나 KBS가 보여주는 영상물은 진품이 아니다. KBS는 시민군쪽에 불리한 장면을 삭제편집하여 방영하니 진품이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광주사태 영상물을 전혀 보지 못했으므로 광주시민군이 장갑차를 몰고 다녔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20여년이 지나 보는 푸른눈의 목격자 영상물도 KBS가 시민군측에 불리한 장면들을 여과한 것이요, 5공화국 드라마는 광주사태의 실상과 거리가 멀며 영화 "화려한 휴가"는 완전 엉터리 픽션이다. 대다수의 국민은 여태껏 5.18무장단체의 사실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시민군에 대한 말을 들었어도 시민군이 어떻게 무장하고 있었는지 상상이 잘 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북한주민은 광주사태가 발생한 바로 그때부터 실상을 그대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에 어떻게 북한에서 광주사태가 생중계되었으며, 광주사태 영상물이 방영될 수 있었는지 실로 놀랍지 아니한가!

5.18측도 푸른눈의 목격자 이름을 팔아 장사하는 KBS도 힌츠페터 영상물의 진품을 보여주지 않기에 오늘날도 우리는 광주사태 장면을 있는 그대로 보려면 북한이 방영하였던 영상물을 보아야 하는데, 1980년 5월 28일 대한뉴스에서 잠깐 보여주었기에 우리의 영상 정보는 아직 제한되어 있다. 이렇듯, 광주사태 영상 정보에 관한 한 북한이 28년 이상 앞선 것이요, 더구나 북한에서는 전 주민이 그 영상물을 시청하여야 했다. 이렇듯, 탈북군인들과 탈북자들이 광주사태에 북이 개입하였다가 증언할 때에 그들은 그들의 경험과 데이터를 가지고 증언하는 것이다. 광주시민군에 대해 그들은 우리가 아직 몰랐던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이렇듯 광주사태 때 북한세력이 광주사태 광경을 촬영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바로 이 점이 미스테리이다. 이것은 최첨단 영상 장비를 갖춘 간첩이 광주에 침투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자들은 사진찍는 것조차 시민군에게 불리한 장면을 찍으면 필름을 통째로 시민군에게 압수당하였다. 그런데, 북한세력은 전혀 시민군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광주사태 장면을 촬영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였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광주사태 당시의 북한 방송 영상물과 탈북자들의 증언은 분명히 그런 사실이 있었음을 입증하여 준다.



북한에서는 단지 청년들을 동원하여 광주인민봉기 지지대회를 하였을 뿐이었는가? 아니다. 위의 사진에서 우리는 북한의 금자탑격인 초거대 건설장비에 "5.18청년호"라는 휘호가 붙어있음을 본다. 그러면, 도대체 "5.18청년"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북한에도 5.18청년이 있었다는 말인가?  탈북자들의 증언은 광주사태 때 1980년판 빨치산들이 광주에 침투해 있었음을 시사한다. 5.18묘지에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자들이 수십 명 묻혀있다. 과연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5.18묘지는 북한 당국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래의 그림 파일에서 우리는 노무현 정권시절 6.15민족통일 대축전에 참가한 북한대표단이 국립 5.18묘지를 공식 참배하였다는 기사를 읽는다. 북한에서 참배의 대상은 김일성의 이름이 붙은 기념관이나 사적지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북한대표단이 5.18묘지를 공식 참배하였다. 서울에 온 북한대표단이 서울 가까이 현충원의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것을 꿈에라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멀리 광주에까지 달려가 5.18묘지를 참배하였다. 도대체 어떤 정체의, 어떤 국적의 시민군들이 안장되어 있기에 북한대표단이 참배하였다는 말인가? 만약, 그들 용어로 광주인민봉기가 민주화운동이었다면 그들이 참배할 리 있겠는가? 그들 나름대로 객관적으로 아는 바로는 5.18은 전혀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 그들의 사관에서 5.18은 연방제 적화통일 수순이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아래 기사에서 김영대 단장은 그런 그들의 사관을 그대로 밝힌다:



민족자주 조국통일이란 연방제 적화통일을 의미한다. 1975년 월맹은 정규전이 아니라, "민족자주 조국통일"이란 미명 하에 빨치산을 동원하여 월남 중부 지방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시민군을 조직하여 빨치산 시민군이 사이공에 진격하여 수도 대통령궁을 함락시키는 방법으로 적화통일을 달성하였다. 빨치산 시민군이 수도로 진격해 오고 있었을 때 좌익 언론과 좌익 종교인들은 민주화운동 세력이 오고 있다고 사기쳤으며, 월남 국민은 빨치산이 어느 편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월남 국민이 빨치산의 정체성에 대해 혼동하고 있자, 미국은 월남 문제는 월남 국민의 선택에 맡긴다며 참전하지 않았고, 월남은 너무도 어이 없게 적화통일당하였다. 1976년부터 김대중은 한반도도 똑같은 방법으로 연방제 통일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북한대표단은 5.18의 의의는 연방제 적화통일을위한 수순이었다는 그들의 사관을 밝혔다. 그런데, 아래 사진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안에도 빨치산을 통일운동가로 미화시키는 세력이 있음을 본다.



만약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던 지리산 빨치산이 통일애국열사라면 그들에게 학살당했던 양민과 순경들은 누구라는 말인가? 바로 여기에 사관의 충돌의 문제가 있다. 죽는 그순간까지 김일성의 충성스런 빨치산 전사로 남아있었던 그를 용서해 주자고 하면 우리는 동의할 수 있다. 죄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빨치산이 통일애국열사라는 사관은 결코 수용할 수 없다. 지금 몇몇 무지한 언론인들과 좌익이 지만원 박사를 헐뜯고 있지만, 이 문제는 사관이 충돌하는 문제이다. 과연 작금의 모모 무지한 언론인들은 그들의 무지 때문에 지리산 빨치산이 통일애국열사라는 사관을 옹호하려는 것인가?

2005년 4월 7일 광주발 뉴스들은 <류락진 선생은 통혁당 재건 사건으로 30년 넘는 장기수 복역을 했던 통일운동가로 한국전쟁 직후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했다가 구속>이라고 보도했다. 문제의 이 기사들은 영화배우 문근영이 외할아버지 부의금 5천여만원 전액을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라는 적화통일단체에) `통일기금'으로 기부해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967331 ). 도대체 지리산 빨치산이 통일운동가요, 겉모양만 바꾸었을 뿐 적화통일 야욕 목적은 동일한 현대판 빨치산 세력 범민련에 바친 돈이 `통일기금'이라는 주장은 어떤 사관에 뿌리를 둔 주장인가?

익명으로 기부한 천사가 문근영이라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발표한 것도 허위발표였다. 만약 익명으로 기부하였다면 어째서 작년(2007년) 1월 9일에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하였다는 기사가 경향신문 등에 크게 실릴 수 있었겠는가? (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view.html?cateid=1011&newsid=20070109191710785&p=khan) 그리고, 정말로 기부 천사였다면 어째서 서울에서 활동하는 연예인의 기부 대상이 전남 해남을 제외하면 모두 광주 단체들로 집중될 수 있단 말인가? 선행은 선행이되 광주사람들끼리의 잔치였다는 말인가?

문근영양의 외할머니, 즉 빨치산 고 류락진의 부인 신애덕(74)씨가 여태껏 문양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부 대상이 누구의 손에 의해 결정되었겠는가? 광주의 단체들과 광주 인맥은 문근영을 국민여동생으로 키워주고 띄워주었으며, 문양의 기부금의 수혜자들을 보면 광주 내에서만 배분되었다. 그들끼리의 잔치 -- 과연 이것이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라고 말하는 이들의 민주주의 철학인가? 선거를 해도 99% 몰표요, 기부 대상 지역조차 광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인가? 사실이 이러함에도 기부 천사로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은 문근영을 이용해 좌익 프로파겐다를 하겠다는 냄새를 피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광주시민군은 우발적으로 창군되었던 것이 아니라 빨치산 모델이 있었으며, 5월 18일 난동자들이 파출서들을 파괴하고 순경들을 인질로 납치한데 대한 진압이 있었기 때문에 5월 21일 무장시민군이 도청을 점거하였던 것이 아니라, 5월 18일 이전에 이미 김대중의 전국연합의 치밀한 계획이 있었다. 광주시민군은 아무 밑그림 없이 조직된 것이 아니라, 빨치산 모형과 베트콩 모형이 있었다. 1975년 4월 베트콩식 빨치산에 의해 월남이 패망되는 것을 본 김대중은 그 이듬해부터 베트콩식 모델을 한반도에 적용하는 것만이 연방제 통일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해 왔었다.

10.26사태 직후에 김대중의 일성은 김재규가 아니었더라도 광주로부터 서울로 치고 올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였다. 즉, 부마사태와 때를 같이 한 광주사태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인데,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여기 1979년 10월 17일 조선일보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한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은 표면상으로는 반체제를 가장하면서 『베트콩』방식을 도입, 데모와 테러, 게릴라활동으로 사회를 혼란시켜 국가변란을 기도한 적색 집단 이었다. 경찰조사 결과 『남민전』을 공산당식으로 서열을 정해 조직원에게 고유번호를 주고 가명을 사용케한 점조직으로, 조직원 1명을 일본을 통해 북괴에 보냈고, 1명을 유럽에 파견하는등 해외활동도 벌여왔다는 것이다. >>

기본투쟁전략은 ▲ 반정부적인 일부학생, 지식인, 근로자등을 선동, 대규모적인 민중봉기를 선동, 대규모적인 민중봉기를 일으킨다 ▲ 봉기한 민중과 『남민전』무장전위대로 인민해방군을 조직, 전국 각지에서 국가전복 투쟁을 전개한다 ▲혁명시기가 성숙되면 김일성에게 북괴군의 지원을 요청, 남한의 혁명세력과 북괴의 배합으로 투쟁을 강화한다 ▲ 공산민족혁명이 성취되면 모든 용곡세력을 규합, 사회주의 국가체제로 남북연합정부를 수립한다는것 등이다.

비록 베트콩식 빨치산 전법으로 국가를 전복시키겠다는 남민전의 음모는 10.26사태 직전에 실패하였으나, 결국 그 잔당이 광주시민군 조직의 주체였던 것이며, 김대중의 최측근으로 김대중의 전국연합의 핵심세력이었던 것이다. 북한은 3월에 그 정보를 정확하게 입수하였으며, 김일성이 4월에 중국으로 달려가 남한에서 빨치산 전법으로 유혈폭동을 일으키면서 남침하겠다고 보고하였으나, 핑퐁 외교로 간신히 미국과의 외교 정상화 물꼬를 텄던 중국으로서는 제2의 한국전쟁은, 즉 또 다시 중국이 미국과 전쟁하는 것은 중국 경제의 영원한 사망을 의미하였으므로 일본과 미국에 김일성의 남침 음모를 알려주어 광주사태를 이용하여 남침하려 했던 김일성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 빨치산에 대한 광주시민의 사관인지 광주시민에게 물어야 한다. 지리산 빨치산도 동정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지리산 빨치산이 통일운동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넘어서는 아니되는 선이다. 과연 그런 주장이 광주인들의 공식 입장인가? 과연 그것이 그들의 5.18사관과 초지일관된 사관인가? 지금 북한 당국은 민주화를 위한 삐라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5.18에 대한 북한의 사관을 광주인들은 지지하는가? 반대하는가? 만약 지리산 빨치산이 통일운동가라는 것이 광주시민의 사관이라면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은 자가당착일 수밖에 없다. 광주시민에게 묻는다. 무엇이 빨치산에 대한 광주시민의 사관인가?


지식 검색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는 1980년판 빨치산 총탄에

5.18시민군 중에 불순세력이 있었다는 김영택 기자의 증언

김대중과 김일성의 거래관계에 대한 증언들

광주사태의 진실탐구 자료실
 


[BBC동영상 뉴스][기독교 영화][미국시사해설][영화][동영상][광주사태 사료][도서 검색][아마존 외국서점][International Shop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