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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의 작은 외조부가 시민군? The Communist Partisans and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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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의 작은 외조부는 1980년판 빨치산 총탄에



요즘 좌익 언론이 지만원 박사님을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 언론이 마냥 띄어주기를 하는 문근영의 선행에도 간과되어서는 아니될 그림자가 있다. 적어도 5천만원의 거액이 통일단체에 기부되었는데, 그 통일단체는 다름아닌 이적단체 범민련이라고 한다. 사실인가? 만약 사실이라면 누구든 대한민국 편에 서기를 원하는 식자는 결코 그 그림자를 긴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근자에 지만원 박사님을 매도하는 도대체 언론의 사명을 일고 있는가? 모름지기 언론의 사명은 국민에게 바로 알리는 것이다. 언론이 마냥 문근영의 가문을 띄어줄 수록 국민이 궁금해 하는 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와 문근영의 어머니 성함이 똑같다. 빨치산 류락진은 자기 남동생의 이름을 따서 자기 딸의 이름을 지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다고 하자. 그러나, 류락진의 그의 남동생 류선영의 나이차가 무려 26세이다. 류선영의 유일한 작은 외조부가 류선영인데 큰 외조부와 26세의 나이 차이가 난다는 말인가!

그리고 언론은 류선영을 1980년 5월27일 도청을 사수하였던 시민군으로 미화하지만 사실을 그러하지 않다. 문근영의 외조부는 도청 사수 시민군이 아니었는데, 왜 언론이 거짓말을 한다는 말인가? 도청 사수 시민군은 이른바 친일작가라는 김완섭씨였지, 류선영이 아니었다. 그리고, 5.18측의 요청으로 시행되었던 1995년 검찰의 조사에 따르면 류선영은 도청사수 시민군은커녕 시민군도 아니었다.



1980년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 때의 시민군 편의 경험에 대해서는 실제로 도청사수 시민군이었던 이의 증언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유일한 도청사수 시민군은 김완섭씨이다. 이 경우 문제는 그의 증언의 정확성이다. 김완섭씨는 도청사수 시민군이었기에 5.18측의 대표적 유공자이다. 그러나, 한쪽으로 쉽게 치우치며 과장하는 경향이 있는 그의 증언의 정확도는 과연 얼마인가?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좌익언론이 민주화 투사로 미화하고 있는 도청사수 시민군은 이른바 친일작가 김완섭이었지,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가 아니었다.

여기 그러면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는 누구였느냐의 의문점이 있다. 그는 1954넌의 태어났으며, 그때 류락진은 27세의 지리산 빨치산이었다. 그러면 "민중의 소리"는 <지리산 대성골에서 열린 '빨치산 추모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류락진의 1954년 회고담을 이렇게 보도한다:

<<"오늘 우리 지리산의 동지들이 50년이 훨신 넘는 세월을 건너뛰어 여기, 대성골의 칠성봉 아래에 모였습니다. 수많은 해방전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때의 가열찬 해방전쟁의 투쟁을 되새기며 이곳에 서 있습니다.

여기 모인 동지들 중에는 구빨치산 때부터 해방전쟁에 복무했던 동지도 있고 조국해방전쟁 이후 미제와 그 주구들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전략적 후퇴시기에 빨치산 대오에 들어와 활동했던 동지들도 많이 있습니다."

전라도를 대표해 추도사를 낭독한 류락진(76세) 선생은 "박헌영, 이승엽의 종파반당분자들이 심어놓은 차일평과 그 졸당들의 반역행위로 많은 아지트가 파괴되고 미제의 세균전에 의하여 많은 동지들이 재귀열이라는 병으로 죽고 시달린" 조직적 우여곡절과 함께 빨치산 전몰 당시를 회고했다.

"남은 빨치산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되어 1954년 가을, 지리산은 총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체포된 많은 동지들이 고문과 학대로 죽어나갔고, 그대로 질긴 목숨을 이어온 동지들은 인류 역사에 없는 비전향장기수라는 이름을 달고, 30년 40년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전향공작이라는 갖은 살인적인 고문과 학대를 이겨낸 동지들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
http://www.vop.co.kr/A00000010563.html>

그러면, 그해 1954년에 남동생 류선영이 태어난 셈이니 1954년에 대한 그의 회고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러나, 나이 29세에 얻은 동생과의 관계는 외형적으로는 형과 동생의 관계라기보다 부자지간의 관계로 보였으리라. 류락진이 빨치산으로서의 첫 생애를 끝냈을 무렵, 동생 류선영은 빨치산이 사라진 조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문제는 그 후 50년이 지난 2004년에도 류락진은 조국이 북조선이라고 말하고 있다는데 있다. 그에게 남동생의 조국은 어디였는가? 그에게 외손녀의 조국은 어디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여하에 따라 문근영이 류락진이 관계했던 통일단체(이적단체)에 기부한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실제로는 류선영이 도청사수 시민군은커녕 시민군도 아니었음에도 좌파 언론이 그를 도청사수 시민군으로 미화할 때 그 의미는 통일운동가 류락진의 정신을 이어받은 시민군이 된다. 그러나, 그런 미화는 류락진이 자기 동생 류영선의 조국을 어디로 보았느냐의 질문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다. 사실, 한국전 이후의 세대는 한국전이 종전되었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다. 류선영 역시 한국전이 종전되고 빨치산이 사라져 치안이 안정된 조국에서 1954년에 태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실탄 30만발을 보유한 무장시민군이 하루 만발씩 아무데나 쏘아대어 광주의 치안이 불안하던 때에 사망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그의 사망사고 원인이었는가?



김완섭씨는 지금 생존해 있는 도청사수 시민군 중 세간에 그 얼굴이 알려진 유일한 인물이요, 또 유명 논객이기에 여태까지는 김완섭씨의 주장이 5.18옹호론자들에 의해 인용되어 왔다. 김완섭씨는 도청 시민군 중 자기를 포함한 3명만 살아남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주장은 정확한 주장인가? 지금 김완섭씨가 일본에서 한국 역사가 행세를 하고 있지만, 역사가로서의 그의 자질은 그의 5.18시민군 증인으로서의 증언의 정확성 여부와 결부되어 있다. 위의 광주청문회 영상물에서 우리는 임수원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장의 증언이 훨씬 더 객관적임을 본다. 시민군 선제 사격으로 국군 두 명의 희생당한 후 맞사격으로 시민군 4명이 사망한 후에 도청시민군은 진압되었다.

도청진압 작전 후 사진과 영상으로 촬영된 상무관 관들과 시체사진들 때문에 공수부대가 누명을 써왔지만, 5월 27일 새벽 도청진압작전은 공수부대가 아닌 20사의 작전이었으며, 그 관들은 군인들이 갖고 간 것이 아니라, 이미 5월 27일 이전에 있었던 것들이다. 칼러로 촬영된 참혹한 시체 사진들 때문에 공수부대가 누명을 썼지만 실제로는 5월 27일 이전 사망자들임을 육안으로도 알 수 있다. 시민군이 5월 21일 도청을 점령하고 22일 해방구를 설치한 이래 26까지 광주에는 군인이 단 한 명도 없었으나, 시민군 총기사고와 시민군 차량사고로 인한 사망사고들이 잦았다.

사진은 5월 27일 아침에 찍혔지만 실제로는 상무관의 관들은 5월 27일 이전에 있었던 것들이었음을 전계량 광주 사태 유가족회 회장도 1988년 4월 국민 운동 전남 본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다:

<<-그 태동은 1980년 5. 24일경입니다. 당시 상무관에는 많은 시신들을 옮겨왔었는데 처음엔 청천 병력 같은 현실에 유가족은 그저 넋을 잃고 슬픔과 분노에 떨고 있었을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의 분향이 시작되고부터는 7. 8 명의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26일부터 분양 소를 지키기로 하고 한편으로는 도청에 있는 수습 대책위와 첩촉 하며 장례식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일단은 27일 도민 장으로 치르기로 합의를 했지요. 그러나 27일 새벽 저들의 가공할 진압 작전이 시작되면서 27일 망월동에 무더기로 안장되고 말았지요. 그후 삼우제인 3.1일 망월동 묘지에 90여명의 유가족이 다시 모여 그 자리에서 "광주 사태 유가족 회" 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지요.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804.html)

여기서,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의 실제 사망일은 언제였느냐가 관건이다. 왜냐하면 26일 사망이었는지 27일 사망이었는지 기록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26일 사망이었다면 그것은 그가 시민군 총탄에 맞은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22일부터 26일까지 광주에 군인이 한 명도 없는 동안 시민군이 아무데나 총을 쏘아 그런 사고의 위험이 있었음을 훗날 전남대 총무과에서 근무했던 오병길씨는 이렇게 증언한다:

『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들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

문근영의 외조부의 사망원인 역시 애매모호하다. 검찰기록으로는 5월 26일 시위구경을 나갔다가 총상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날 시위가 있었는가? 경찰이 시민군 지배 하에 있었는데 누가 어디서 시위를 했다는 말인가? 시위대가 돌과 화염병을 던지고 경찰이 최류탄 쏘는 그런 시위는 그때는 없었다. 단지, 주요 거점들을 점거한 무장시민군들의 모습이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시위구경을 나갔다가"라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며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5월 26일 총상입고 26일 사망하였다는 것인지, 그 다음날 사망하였다는 것인지, 혹은 5월 27일 총상을 입었다는 것인지도 불명료하다.

이처럼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의 사망원인과 사망일자는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5월 27일의 도청사수 시민군이 아니었다. 검찰기록으로 그는 YWCA에서 총기사고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 기록만으로는 그가 YWCA 안에서 총에 맞았는지, 밖에서 맞았는지 애매모호하다. 실제로, YWCA 안의 시민군이 바깥쪽으로 발포한 사건이 그 즈음에 있었기 때문에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가 사고를 당한 장소가 YWCA 안이었느냐 바깥이었느냐에 따라 그 해석은 크게 달라진다.

언론에서 도청사수 시민군이 쉽게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도청 사수 시민군 사망자 태반이 혹은 대다수가 중고생이라는 사실을 직시해 보았는가? 도청사수 시민군 사망자 명단에서 <1. 김명숙(여 14, 서광여중3년), 2. 안종필(남, 16, 광주상고1년) 3. 문제학(남, 16, 광주상고 1) 4. 박성용(남, 17, 조대부고3) 5. 김종영(19, 재수생) 6. 이강수(남, 19, 금호고2)> 등이 모두 중고생들이다. 대표적 도청사수 유공자 김완섭씨 역시 고교생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여중생이 왜 시민군이란 말인가? 누가 여중생에게까지 사격 훈련을 시켜 시민군으로 징집하였는가?



위 사진에서 우리는 고교생을 시민군으로 징집하려는 의도의 대자보를 본다. 그리고, 그 살벌한 문구들은 피를 흘리라고 선동하는 것이다. 피를 흘리라는 요구는 죽으라는 요구이다. 그리고, 한 특정집단의 목적을 위해 그 집단 소속 개개인들은 죽어달라는 요구는 전체주의요, 이 전체주의의 대표적 예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이다. 요즘 좌익과 우익의 대결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지만 좌익이 무서운 것은 유혈폭동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사관을 가진 공산주의자들은 혁명을 목적으로 개개인들은 죽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반면 진정한 민주주의 사상가는 이념 못지 않게 게개인의 생명도 존중하므로 그런 요구를 못한다.

위의 저 대자보는 균형잡힌 시각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편향된 주장만을 고교생들에게 강요한다. 저런 운동권 대자보가 고교생들에게 교육적인가? 누가 오늘날의 김완섭이라는 친일 작가를 만들었는가? 만일 운동권 이념이 김완섭으로 고교시절 시민군이 되게 한 것이라면, 훗날 그는 그 치우친 이념에 반발하여 또 다른 쪽으로 치우쳤다. 저 5.18선동 대자보는 조국의 이름을 팔지만 청소년기에 저런 선동을 받은 김완섭은 오늘날 자기 조국이 어딘지 잘 모르는 국가관을 가진 작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류닉진의 영향으로 그의 후손들이 자기 조국이 어딘지 모르는 국가관을 가지게 되는게 바람직한 일이 되겠는가? 무엇이 참으로 문근영을 위한 길인가?

외조부를 향한 문근영의 애정은 부정되어서는 아니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요, 문근영의 개인적인 권리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외조부의 조국 북조선이 문근영의 조국이어야만 한다는 논리여서는 아니된다. 문근영이 외조부의 이념을 그대로 본받아야 하며, 외조부의 조국을 그녀의 조국으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는 그녀를 진정으로 위하는 논리가 아니다. 그러기에 그녀의 외조부의 빨치산 투쟁을 통일운동으로 미화하는 보도는 위험한 것이다. 그녀의 작은 외조부가 도청사수 시민군이었다고 미화하는 것도 거짓 보도요, 빨치산 투쟁을 통일운동으로 보도하는 것도 허위보도이다.

위의 광주청문회 동영상에서 임수원 당시 3공수여단 11대대장은 도청진압 작전 때의 시민군 사망자는 4명이라고 증언한다. 그 증언이 객관적이라는 사실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가 바로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 사망장소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YWCA 시민군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국민 대다수는 잘 모르지만 도청 시민군 외에 YWCA 시민군 등 여러 거점의 시민군들이 있었으며 27일 새벽 지원동 등에서도 전투가 있었다. 시민군이 총을 쏘면 겁에 질린 군인들도 같이 총을 쏘는 우발적인 전투가 여러 시민군 거점에서 산발적으로 있었으나, 도청진압작전과는 엄밀히 구별되는 사건들이었다.

그간 도청사수 시민군이 민주화운동의 꽃으로 미화되면서 김완섭씨도 그 유명세를 누리고,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로 오보되어 그 가문이 미화되고 있지만, 그 당시 여러 거점의 무장시민군이 전투 대형을 갖춘채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작전을 펴고 있었다는 사실을 직시해 보라. 무엇을 위하여 무기를 들었으며 누구에게 총구를 겨누었는가? 무장봉기는 유혈투쟁의 수단이요, 그것은 민주화 운동의 방식이 아니다. 어떤 변혁을 위해 개인은 희생되도 좋으니 피를 흘리고 죽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김대중식 파시스트 선동은 절대로 민주화 운동 방식이 아니다.



탈북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증언하는 바는 봉기군 중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끼어있었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의 시각에서는 봉기군 틈에 끼어있던 불순세력은 1950년대의 빨치산의 연장선이었다. 위 사진에서 우리는 1988년 광주청문회 때 이해찬이 북한군 사진을 보여주면서 광주시민군이라고 사기치는 모습을 몬다. 만약 그때 박수치며 이해찬에게 갈채를 보냈던 광주시민이 있었다면 그는 분명 군복입은 시민군을 공수부대라고 말했던 사람이며, 그런 사람들에 의해 와전된 5.18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이해찬이 무장공비 사진을 시민군 사진이라고 사기쳤을 때 이해찬이 광주의 명예를 높였다고 여기는 것은 당착이거니와 그 무장공비 사진이 김일성에게 빨치산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위 동영상에서 우리는 광주사태 직전에도 무장공비가 침투하다가 그 중 일부가 국군에 발견되었음을 본다. 따라서 그 넓은 해안에서 얼마나 많이 침투에 성공했는지 우리는 모르며, 남한에서 봉기를 일으킬 목적으로 침투하던 무장공비들은 김일성에게는 빨치산의 연장이었다. 우리 용어로 무장공비요, 탈북자들은 특수부대원들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1950년대의 빨치산의 목적과 동일하였다. 문근영의 작은외조부가 YWCA 주변에서 총상을 입은 날자가 26일이라는 것인지 27일이라는 것인지는 애매모호하다. 그러나, 만약 26일이었다면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시민에게 총을 쏘았다는 탈북자들의 증언만이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이다.

분명한 사고일자는 아직은 미확인이라는 여백이 있다는 전제 하에,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류락진은 일평생 빨치산 전사로서 김일성에게 충성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1980년판 빨치산 전법으로 류락진의 동생을 앗아갔음을 의미한다. 탈북자들과 탈북군인들은 봉기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시민에게 총을 쏘았다고 증언하는바, 실제로 시민군 총탄에 의한 시민군 사망자 수가 허다하다. 따라서,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가 총기사고를 당한 날자가 언제였느냐에 따라 그런 개연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무엇이 한국전 전야에 김일성이 남로당에 건 기대였던가? 그것은 빨치산 전법으로 남한 도시들에서 폭동을 일으켜 적화통일 최적환경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김일성이 박헌영을 사형에 처한 이유도 미흡했기 때문이며, 류락진은 김일성이 흡족해하는 빨치산으로 언제까지나 남아있으려 했다.

류락진의 빨치산 이념은 1980년에도 변함이 없었고, 김일성의 빨치산 전법 역시 변함 없었다. 무엇이 빨치산으로서의 류락진의 목표였던가? 그것은 대한민국 공권력으로 치안유지가 안되는 해방구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1980년 5월 한때 광주가 경찰의 공권력으로 치안유지가 안되는 해방구였다. 그리고, 1980년 5월 수천 정의 장진된 총기가 돌아다니고, 시민군의 수십 만발의 실탄이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도 경찰이 시민군 지배 하에 있어 도저히 공권력으로 무기와 실탄 회수를 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상황에서 류락진은 27세의 자기 동생을 잃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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