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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유발한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

  5월 18일 광주사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전 11시에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광주역에 모여 30분을 기다려도 학생회장이나 학생운동권 리더가 안보이자 모인 이유를 몰라 모두 뿔뿔이 흩어지려 하던 찰나 누군가가 "경찰이 박관현 회장을 죽였다"고 큰 소리로 유언비어를 외치며 학생들을 선동했다. 박관현 회장은 그때 여수로 가고 있는 길이었음에도 모두 그 유언비어에 감쪽같이 속은 것이 광주사태가 하루 앞당겨져 일어나게 한 도화선이었다. 즉, 19일에 무장봉기 일으키기로 이미 열흘 전에 거사 계획이 짜여 있었으나,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18일 정오 무렵부터 폭동을 유발시켜 민중봉기가 하루 앞당겨져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날 오후 12시 30분께 한일은행 사거리에서 재집결한 5백여명의 시위대가 곧바로 공용터미널로 향하였는데 (광주매일『正史5・18』1995, 167), 그 이유는 그 다음날인 19일로 예정된 무장봉기 거사를 위해 (전남농민대회를 명분삼아) 광주로 올라오는 전남 서남지역 운동권이 거기 모여있기로 하였기 때문이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대동고 고딩으로 등장시킨 영화 ‘화려한 휴가’의 줄거리는 박관현(진우)이 5월 21일 도청광장에서 계엄군 총탄에 쓰러지자 그의 형 윤상원(민우)이 복수하기 위해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박관현은 김대중이 정동년 편으로 봉기 선동 자금으로 쓰라고 전해준 돈으로 여수 돌산에 방을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박관현은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 투입되기 훨씬 전에 여수로 갔다. 1980년 5월 18일 처음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가 등장하였을 때는 광주 경찰이 죽인 것처럼 말이 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웠고, 2007년에 제작된 엉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민우가 진우(박관현)의 피 흘리며 축 늘어진 시신을 어깨에 둘러멘 장면의 포스터로 흥행에 성공하였으며, 거의 모든 관객이 이 거짓에 속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거짓이 진실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실제 역사에서는 사건이 어떤 순서로 전개되었었는지를 사건 진행 순서 그대로 살펴보자.  
 

1. 남민전 전사들이 양성한 전남대 운동권

   박형선 등 광주일고 동문들의 광주사태 31주년 작품인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이 2011년 5월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비록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이란 명칭은 2011년 봄에 비로서 등장하였으나, 광주일고 동문들의 비리는 금년 봄에 막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박형선과 그의 처남 윤한봉 등 광주일고 동문들이 그 주동세력이었던 1980년 봄의 5.18 사건 역시 그 역사적 뿌리가 있는 사건이었다. 누가 언제 부르느냐에 따라 ‘김대중내란음모사건’ ‘광주사태’ 등으로 명명되는 5.18 사건은 그 주동자들이 1980년 5월18일에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던 것이 아니라, 여러 해전부터 양성되고 있었다. 즉, 광주일고 동문으로 전남대 복학생이었던 정용화와 영문과의 양강섭과 법대의 박관현 등 10여명이 이미1978년 3월부터 운동권 학습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때 박관현과 자신 등 10 여명의 전남대생들이 공산주의 서적, 즉 막시즘 원전으로 세포교육을 받고 있었음을 양강섭은 이렇게 증언한다:  “이때부터 민족과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초보적인 학습을 했다. 지금은 좋은 책이 많이 나오지만 그때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전환시대의 논리 등이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책이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전을 구해 산장이나 증심사 등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학습을 했다. 그렇게 우리가 사회과학의 기초를 공부하고 있는 중에 이른바 교육지표사건이 1978년 6월 29일 발생했다” (양강섭 1989).

   광주일고 동문 정용화는 박관현 등 10 여명에게 세포교육을 시킨 자들은 이강과 김남주 등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전사들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 그들은 김상윤, 윤강옥, 이강 선배들이 살고 있는 두암동에서 자발적으로 형성한 그룹 단위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김선출, 김남주 등 문화운동을 표방하는 그룹, 윤상원 등 노동현장운동을 모색하며 전단계로서 야학을 운영하는 그룹, 상대 내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는 몇몇 사람들의 그룹 등이었다. 나도 두암동에 자주 들르는 사이 여러 선후배를 알게 되었다......1978년 3월, 1학년에 복학을 하고부터는 점차 두암동 출입을 줄이고 문리대 1학년 중심으로 10여 명을 모아 사회과학을 공부하였다. 같은 연배로서 가깝게 지내게 된 영문과의 양강섭과 법대의 박관현도 함께 하였다. 1977년부터 자발적으로 꾸려졌다. 여러 그룹들도 심화된 학습을 통해 역량이 강화되고 있었다 (정용화 1989).

  그런데 전남대 운동권이 말하는 사회과학이란 막시즘 및 좌익・반미・친북 이념이었다.  세포교육으로 운동권을 양성하던 전남대의 모든 서클들이 그런 류의 이념 서적들만을 학습 교재로 사용하였다. 김윤기는 자기가 속한 서클도 이영희의 좌익서적으로 세포교육을 받았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러던 중 밖에 있던 전남대 민청학련세대들 이 학생운동을 재건하기 위해 전남대학교에 재건그룹을 만들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그룹에 열결되어 소그룹 학습을 했다. 우리 그룹은 예닐곱 명으로 노준현, 박병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숨어다니다시피 1년 동안 운동권 입문서 수준 정도의 서적을 가지고 학습을 했다. 지금이야 사회과학서적이 많이 보급되었지만 당시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김윤기 1989).

  박선정은 자신이 회장으로 있었던 얼샘회 역시 이영희의 좌익서적과 황석영의 반미소설을 세포교육 교재로 사용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런데 1978년 6월 29일 전남대 교육지표사건으로 서클회장인 신일섭 씨와 학술부장인 안길정이 구속되었다...... 문우회 멤버들이 겨울방학에 다시 모여 민족의 얼과 대학의 양심을 되찾자는 뜻의 '얼샘회'를 창립했다. 곧바로 겨울에 집중적으로 학습했다. 사회과학의 원론보다는 주로 이영희의 '우상과 이성', '베트남전쟁' 등 기초적인 사회과학책과 문학책을 읽고 학습했다. 나는 열심히 활동하여 1979년 2학기 때 얼샘회 회장을 맡았다 (박선정 1989).

  박선정에 따르면 이 얼샘회가 전남대 학생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래서 총학생회장도 인문사회과학대 힉생회장도 이 서클 회원이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이들이 민주주의 사상을 공부하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들은 공산주의 혁명 사상을 주입시키는 좌익서적류만 교재로 사용하여 학습하였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남로당 및 빨치산 2세대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세포교육만 받은 자들에게서 민주주의 사상이 싹트고 자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이들의 머리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던가?  이들의 머리 속은 생각이 비뚤어지게 하는 좌익이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의 독서물은 공산주의 서적 내지 좌익서적에 국한되고 편협되어 있었다. 요컨대 이들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십대 후반 및 이십 초반의 연령기에 반(反)민주적 책들만 읽었다.  이렇게 의식화된 운동권은 민주주의를 습득하기가 몹시 어려우며, 설사 배울 수 있다 하더라도 수십 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걸리는 법이다.  그 당시 그들은 남한 정부를 타도시키라는 구호들로 세뇌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대한민국을 대적하는 빨치산 투쟁이 빨치산 2세대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남민전 전사들이 세포교육으로 전남대 핵심 운동권을 양성하였다.  민주주의 사상을 키워주었는가? 만약 민주주의 사상을 키워주었다면 김일성에게 충성하는 남민전의 암살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지언정 결코 남민전 전사는 될 수 없었다. 남민전 투사 이재오도 남민전 전사로 승격하지는 못했을 정도로 남민전은 철저한 사상 검증을 거쳐 김일성에 대한 충성에 결코 변절이 없을 자들만을 충성 맹세와 선서의 절차를 거쳐 전사로 승격시켜 주었다. 그러기에 남민전 전사들은 자생 간첩단이 아니었던가!  북한에서 보았을 때 가장 사상이 확실하며, 또 북한방송으로 지령을 내리면 그대로 복종하던 자들이 전남대 핵심 운동권을 키웠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긴 세월이 아니던가?  그런데, 남민전 전사들이 1970년대 후반에 전남대 핵심 운동권을 세포교육으로 키운 영향이 얼마나 크고 깊었던지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였을 때 전남대 학생회관에  김일성 분향소가 설치되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찬양하는 유인물 4종이 발견되었다 (조선일보 1994년 7월 16일자). 이렇듯 1970년대 후반에 남민전 전사들이 세포교육으로 전남대에 핵심 운동권을 양성하였을 때 그 학습 내용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김일성 숭배 사상 및 종북반미이념이었다. 사실이 이러한데 어떻게 그들이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1980년 5월 18일 오후 1시경부터 화염병과 돌로 파출서를 파괴하는 등 갑자기 폭동이 일어난 이유에 대하여 5.18 진영이 흔히 하는 거짓말이 공수부대가 진압하였기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수부대 광주시내 투입은 오후 5시 이후의 일이요, 1980년 들어 아직 단 한번도 시위진압이 없었던 5월 18일 오후 1시경에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 발생 후 두 시간이 지난 오후 3시경에도 여전히 공수부대는 광주시내에 투입되지 않은 상태였음을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 김영택은 이렇게 확인한다:  “그러나 18일 오후 3시에는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 투입되지 않은 시간이다. 다만 정웅 31사단장이 시내 출동명령을 내려놓고 있어 출동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영택 1996, 48). 그 이전까지는 광주에서는 시위진압을 한 예가 없으며, 1980년 새해가 밝아온 이후 대한민국 그 어느 곳에서도 시위진압을 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는데, 어떻게 시위진압이 폭동 발생의 원인이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가?  그 누구도, 심지어 19일부터 무장봉기를 일으키려 하였던 주동자들조차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폭동이 그 날  18일 점심 시간 무렵에 갑자기 일어난 이유는 유언비어, 즉 이른바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 때문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박관현이 전남대 학생회장이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밝히지 못하고 진우라는 고등학생으로 등장시킨다. 그러면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은 누구였는가?

  1980년 3월 전남대 바깥에 있던 광주운동권이 학생회장 선거에 개입하였던바, 정용화는 “윤한봉의 밀항을 돕다”라는 제목의 그의 증언록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당시는 밖에 있는 우리들과 전남대 학생권과의 연계가 긴밀하여 총학생회장 후보도 우리들이 물색하였는데 한봉이 형이 법대 행정학과 3학년인 박관현을 추천하였다. 이에 전남대는 박관현을 총학생회장으로 추대하기 위한 선거작업이 한창이더니 4월 2일 박관현을 중심으로 전남대 총학생회가 구성되었다” (정용화 1989). 윤한봉은 그때 학생이 아니었기에 박관현에 대하여 잘 몰랐다. 복학생회 회장 정동년이 추천하고 윤한봉이 동의하여 결정된 것이었다. 조선일보 조광현 기자는 그의 기고문 “국회 광주특위 증인-정동년은 누구인가.”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보도한다: “들불야학의 경험담을 교내에서 강연하는 박관현을 본 정씨는 박씨와 금방 뜻을 함께했고 복학생회가 주동이 돼 박씨를 총학생회장에 추대, 80년의 운명을 함께한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9:491).

  정동년이  박관현에게 대준 선거운동자금에 대해서는 정동년이 말을 번복하였다. 처음에는 김대중이 대준 거라고 하였다가 나중에 복학생들이 돈을 모아주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나 운동권 학생들의 일거일동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당시 전남대 직원 서명원은 복학생들의 모금 활동은 모르는 일이라고 증언하였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4:615). 게다가 만 37세의 나이에 복학하여 고학하여야 했다던 정동년이 단 하루 만에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천만 원에 달하는 거액을 마련하여 희사할 만한 재력가였을까?

  자신이 박관현을 총학생회장에 추대하였다는 정동년의 주장과 달리 박노해는 윤상원과 김상윤이 박관현을 총학생회장에 추대하였다고 기록한다:

상원과 김상윤은 이미 「학원 자율화 추진 위원회」가 주최한 공청회에서 괄목할 만한 지도성을 발휘했던 관현을 주시했다. 상원이 관현 에게 현 정세의 성격과 총학생회가 수행할 임무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총 학생회장으로 출마할 것을 제시했으나 관현은 한사코 거절했다. 그 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였던 들불을 떠나기 싫었던 것이다. 상원은 계속 관현을 설득했다. 상원은 이 일이 결코 노동자의 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학생운동을 혁명적으로 강화시켜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견고하게 지켜 나감으로써 더 큰 모습으로 노동자에게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원의 끈질길 설득에 마침내 관현은 출마를 결정했다 (박노해 1989, 89-90).  


2. 김대중 돈으로 도피한 박관현 

  김대중 진영 운동권이 운동권 자금과 운동권 조직을 동원하여 당선시킨 박관현은 광주일고 동문들로 구성된 민청학련 출신 광주운동권과 복학생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5월 14일 오후 3시경 전남도청 앞 분수대 위에서 제2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으며, 16일 횃불행진과 5.16 화형식 등의 가두시위를 선봉에서 지휘하였다. 고정희에 따르면, 16일 밤 10시에 박관현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에 앞서 월요일인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일 것이라고 광고하였다 (고정희 1988, 405). 그리고 그것은 가톨릭농민회가 ‘전남 농민대회’라는 행사 명칭 하에19일에 주동하기로 한 무장봉기에 전남대 학생들을 동원시켜 주기로 한 약속 이행을 위해서였다.

   광주사태가 일어나기도 전에 이미 무장봉기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단체들 중에는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도 있었던바, 광주매일『正史5・18』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이미 무안 벌교 등에 농정조사차 내려갔던 학생들과 교감이 있던 가농과 기농회원들은 19일 광주시 북동성당에서 가톨릭농민회 전국농민대회를 개최키로 하고 전남대 총학생회등에 학생동원을 요청한다. 이때 논의된 내용은 전남대총학생 기획실의 비밀문건인 [자유]에 다음과 같이 놀랄만한 내용으로 기록돼 있다: “농촌파급효과를 위해 공용터미널 바로 앞인 북동성당으로 장소를 정하고 죽창과 밧데리를 준비하며 방송국.공공건물 예비군무기고 접수를 고려한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124-125).

광주매일『正史5・18』은 과격시위대와 시민군 중 상당수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 운동권이었음을 이렇게 밝힌다: “농민운동세력도 가톨릭농민회와 기독교농민회가 민주농정실현과 농민생존권보장을 요구하며 다각적인 투쟁을 모색해나간다. 5월 19일 광주시 북동천주교회에서 전남대 학생회와 연대해 대규모 [전남농민대회]를 갖기로 했으나 5.18로 무산되고 대회준비자들은 5월 투쟁에 합류한다” (광주매일 『正史5・18』1995, 115). 이 책은 광주사태 기간 중 과격시위대와 시민군 상당수는 해남 운동권이었음을 또 이렇게 밝힌다: “당시 해남의 농민운동인사들은 광주 북동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농민대회에 참가했기에 해남시위에는 가담하지 못하고 읍내 JC회원들의 주도로 자체시위가 시작된다” (광주매일 『正史5・18』1995, 385).

윤한봉은 그의 자서전 "운동화와 똥가방" 57쪽에서 광주운동권이 5월 17일 밤에도 19일로 예정된 광주에서의 대규모 농민시위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음을 이렇게 서술한다: "5월 17일 밤에 나와 정용화는 19일에 계획된 광주에서의 대규모 농민시위 준비차 광주에 올라온 '카톨릭농민회' 간부 최성호 씨 등과 함께 문병란 선생님 댁으로 잠자러 갔다." 그런데, 최성호는 광주사태 주동자 중 한 명이며, 그간 5.18 단체 간부직을 역임해 왔던 자이다. 그래서 5.18측에서도 광주사태 주동세력 중에 카톨릭농민회와 그 간부 최성호를 포함시킨다.

당시 현대문화연구소 소장 정용화도 그의 증언록 "윤한봉의 밀항을 돕다"에서 "5월 19일은 북동성당에서 70년대 말 종교적 보호막을 입고 급격히 성장한 가톨릭농민회가 주최하는 행사가 있을 예정이었다. 가톨릭농민회가 그 준비를 전남대 총학생회에 의뢰했는데 전청협도 전남대 총학생회와 17일 오후 7, 8시경까지 그 행사를 준비하였다. 한봉이 형은 그때도 국민연합 결성관계로 일을 해오고 있었다"라고 증언한다. 여기서 전청협이란 정동년,  윤한봉, 김상윤, 윤강옥, 정상용 등으로 구성된 광주운동권의 공식명 ‘전남민주청년회’의 약칭이다.

그리고 여기에 당국이 용인해 줄 수 있는 불법 가두시위의 한계가 있었다.  16일 시위가 마지막 시위일 거라더니, 안병하 전남도경국장에게 “이번만 허락해 주면 평화스럽게 횃불시위를 끝내고, 더 이상 시위를 하지 않겠다”더니, 그날로 그 약속을 깨고, 다음 주부터는 훨씬 더 큰 규모의 가두시위를 하려 하였으며 더구나 이제는 당국의 허락 따위는 전혀 받으려 하지 않고 가두시위를 결정하고 광고하였다.  이것도 17일 저녁 비상국무회의 소집과 계엄령 전국확대가 불가피했으며, 18일 0시를 기해 수사당국이 주동자 예비검속 혹은 연행을 시작하게 된 주요 이유 중 하나였다.

5월 17일 오전 박관현은 양강섭과 더불어MBC방송국에서 기자회견을 하였으므로 그 날 일약 유명 인물로 떠올랐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그가 죽었다는 유언비어가 떠돌면서 민심을 자극해 폭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폭동선동 방법이 필요하였던 광주운동권에 이 해괴한 뜬소문은 아주 유용한 호재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진우의 실존인물이 박관현인데, 영화에서처럼 고교생이었던 것이 아니라, 전남대 학생회장이었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민우—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 장본인 박형선의 여동생과 영혼 결혼식을 올린 윤상원—가 진우의 친형이었던 것이 아니라, 방을 같이 쓰고 있었다. 영화 주인공 이름을 들어 쉽게 이야기하면, 민우가 진우 사망설 유언비어를 이용하여 폭동을 선동하였던 것이다.

사실 윤상원은 박관현이 18일 여수로 간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여기서 17일MBC방송국에서 기자회견 이후의 박관현의 행방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기자회견 후 광주운동권이 상대 뒤에서 박관현과 양강섭을 위해 막걸리 파티를 베풀어 주고, 민중봉기(김대중 내란음모) 주동자들에게 활동자금 명목 하사금3백만 원을 주었다. 그 액수는 오늘 날의 화폐가치로 수천 만원에 해당되므로 당시 학생에게는 거액 현찰이었다. 양강섭은 박관현과 자기가 그런 자금을 전달받은 막걸리 술자리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한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같이 고생했던 활동가들이 상대 뒤에서 막걸리를 마신다고 하여 관현이와 함께 가서 그동안 고생했다고 하면서 막걸리를 한 사발씩 마시고 왔다. 그런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용봉축제 준비금 명목으로 3백만 원을 탔다. 몇몇 주요 인물들에게 상황이 어떻게 될 줄 몰라 도바리(형사들을 피해 다니는 것) 자금으로 조금씩 갖고 있게 했다 (양강섭 1989).

임낙평은 실제로 그 날 그 시각에 그런 술자리가 있었으며, 그런 막걸리 술판에 자신도 있었음을 이렇게 기록한다:

17일 저녁 7시 구YWCA에서 박현채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YWCA 소강당 1층과 2층을 꽉 메우며 박선생의 경제 전망을 듣고 있었다. 물론 나도 노준현 선배와 함께 강연회에 참석했다. 이날 강연회에는 그동안 잘 알고 지내던 학생운동권 친구들이 다수 참석했고 또한 재야인사들도 참석하고 있었다. 강연회가 끝나고 주최 측과 재야인사 그리고 운동권 학생들이 구전남매일 앞 한식집에서 저녁을 함께 했다. 김태종, 김원[윤]기, 황일봉, 나 그리고 갓 제대한 김상집, 휴가 온 박석면 등이 자리했고 문병란, 장두석 등 재야인사들이 참여했다. 소주를 곁들인 저녁을 마치고 젊은 층만의 2차가 있었다 (임낙평 1988).

문석환은 그 날 오후 상대 뒤에서 운동권이 회동한 그 술자리에는 자신도 함께 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7일 오후 상대 뒤 반룡슈퍼에서 박관현, 김영휴, 양강섭 등과 함께 18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야기했다. 우리는 간단히 막걸리 한잔씩을 하고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쉬기로 했다” (문석환 1989). 그 술자리에 자신도 있었음을 김윤기는 이렇게 증언한다: “5월 17일 저녁 함석헌씨가 와서 YWCA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강연이 끝나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 합석을 했다. 그날은 또한 박석면(박석무 선생님 동생)이 휴가를 나왔다. 그날 저녁 나, 석면, 태종, 선출이와 코가 삐뚤어지도록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박석무 선생님 댁으로 갔다” (김윤기 1989).

그렇다면 정동년이 김대중에게서 돈을 받아 전남대 운동권에 전달하였다는 1980년의 법정기록은 사실과 부합하며 진실에 매우 근접함이 명확하게 입증된다.  도대체 어떻게 5월 17일 전남대 운동권의 술판에서 오늘 날의 수천 만원에 해당하는 3백 만원이 솟아난다는 말인가?  대학생들이 술판을 벌이니 수천 만원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다거나 땅에서 솟아난 예가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런 일은 없었다. 그리고 도대체 어느 상부 기관에서 술자리를 통해 하부 기관에 그런 거금을 준다는 말인가?  학생 운동권이 술자리에서 그런 거금을 수수하는 것도 민주화운동인가?  아닐진대 우리는 그런 검은 돈의 출처를 물어야 한다.

정동년에 대한 공소사실 4항에서 박관현의 이름과 3백만 원의 돈이 이렇게 언급된다:   “동월 6. 10: 00경 위 전남대 학생회의실에서 위 박관현에게 위 3백만 원 중 2백 80만 원을 제공하면서 ‘김대중 선생이 학생투쟁을 위해 보내는 자금이니 보안을 유지하면서 잘 쓰도록 하라’고 하면서 위 ‘1’항과 같이 모의된 바를 전하여 주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7:471). 이 기록에서 당시 전남대 학생회 총무부장 양강섭이 증언하는3백만 원은 김대중에게서 온 돈이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확인된다.

17일은 박관현에게 인생 최고의 날로 시작했다. 고아인 그가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때가 지난 달이었는데, 벌써 방송국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명사로 떠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한식집에서 운동권 학생들을 위한 푸짐한 식사 대접도 받고 2차 막걸리 술판 때 (정동년이 김대중에게서 받아 광주의 운동권들에게 뿌린) 자금도 아주 두둑하게 받았다. 실로 그 날은 운동권에 발을 들여놓은 이래 신나게 대접받은 날이었다.  그래서 이런 들뜬 기분으로 김영휴, 차명석, 문옥희 등과 더불어 무등산장으로 가는 길에 청천벼락 같은 뉴스를 들었다. 쉬운 말로, 불과 몇 시간 만에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처럼 달라진 상황을 양강섭은 이렇게 서술한다: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관현이와 나, 김영휴, 차명석, 문옥희 등이 무등산장으로 가기로 했다. 밤 10시쯤, 라디오에서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기어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아니 솔직히 표현하면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 어떻게 된 것인지 확실하게 확인을 해보자는 생각에 산장에 올라가 방을 잡고 TV를 켰더니 확실한 내용이 화면에 나왔다. '일 났구나'하는 생각에 관현이와 영휴를 남겨두고 시내상황 점검을 위해 이곳저곳 연락을 해보고 11시 30분경 사전에 약속되었던 대지여관에 들어갔다.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아 김상집 선배한테서 빨리 피하라는 연락이 왔다 (양강섭 1989).

17일 밤에 박관현이 대지호텔에 투숙해 있었다는 사실은 정현애의 증언과 고현정의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위에서 김상집 선배란 당시 김대중 세력의 광주 아지트였던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의 동생을 가리킨다. 녹두서점의 사실상의 주인은 김상윤의 부인이었던 정현애였다.  그녀는 그 시간 박관현이 대지호텔로 이동해 있었음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고현정의 기록을 따른다면 박관현더러 은신하라고 전화를 건 이는 김상집의 형수 정현애였다:

그보다 앞서 밤 9시부터 이미 녹두서점에 이상한 전화가 쇄도하고 있었다. 그 전화 속에는 서울 대학생 회장단들이 전부 연행됐다는 전갈이 끼여 있었다. 사태를 알기 의해 여기저기 다이얼을 돌렸으나 연결이 안되었고……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정현애는 즉각 대지호텔에 이동해 있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인 박관현 등에게 장소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는 전화를 급하게 걸고 그로부터 20분쯤 뒤인 11시40분에 서점 셔터를 내리는데 누가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고현정 1988, 405-406).

19일로 예정되어 있던 무장봉기 거사 음모가 D-day 하루를 앞두고 큰 차질이 생긴 것을 가장 먼저 직감한 인물은 총진행을 맡고 있던 윤한봉이었다. 정용화는 윤한봉과 더불어 자신이 직접 겪었던 그 긴박한 세 시간을 이렇게 기록한다:

한봉이 형은 그때도 국민연합 결성관계로 일을 해오고 있었다. 나는 집에 있는 것보다 편리하여 한봉이 형과 동명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17일 오후 8시 30분경 밖에서 한봉이 형을 만났는데 술집으로 끌고 가더니 막걸리를 건네면서 저녁에 집에 들어가지 말자고 하였다. "이화여대에서 총학생회장단 회의가 있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사태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어떻게 알았는지 이렇게 말하는 형과 술을 마시다 11시쯤 평소 존경하고 따르던 문병란 선생님 댁으로 갔다. 형이 주위 사람들의 신변을 확인해 보라고 하여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해본 결과 상윤이 형은 잡혀갔고, 그외에도 대부분은 집에 있지 않았다. 걱정을 하며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TV를 보는데 긴급뉴스라며 '전국계엄 확대, 김대중 씨 연행' 등의 내용이 나왔다. 그 소식을 듣자 매우 놀랍고 당황되었다 (정용화 1989).

이때가 광주운동권처럼 전남대 운동권에게도 민중봉기 거사 음모를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피신할 것인가를 즉석에서 결정해야 하는 중대 선택의 기로였다. 학생회 간부는 아니었으되 박관현과 광주고등학교 동기동문 단짝 친구로서 그의 운동권 활동을 지원하였던   차명석씨는 그 긴박한 순간을 이렇게 증언한다:

5월 17일 저녁 박관현, 김영휴씨와 함께 무등산장 부근의 식당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서울 쪽으로 연락을 취해 전국에 계엄확대 조치 소식을 듣고 우리는 일단 피하기로 하고 식당의 자가용을 타고 산수동 오거리까지 왔다. 일단 총학생회에 알려야 된다는 생각에 박관현과 김영휴 씨에게는 상대 뒤에 후배 자취방에 은신하라고 하고 나는 곧장 총학생회실로 달려갔다.

밤 11시 40분경 총학생회실에 도착했다. 총학생회 부회장인 이승룡을 비롯한 예닐곱 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나는 계엄확대 소식을 알려주면서 빨리 피하라고 일렀다. 학생회관 창문을 통해 보니 전남대 정문 앞에는 이미 20여 대의 군용트럭이 라이트를 켠 채 있었다. 우리들은 그곳을 빠져나와 사범대 뒤의 담을 통해 상대 뒤의 후배 자취방으로 갔다 (차명석 1989).

그러나 그 시각 이후의 피신 선택은 박관현을 위시한 전남대 운동권에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었던 만큼 피신의 기회를 놓쳐서도 안되었다.  그러나 박관현에게는 공적 약속이 있었다. 19일 가톨릭농민회가 ‘전남농민대회’ 개최 명분 하에 주동하기로 한 봉기에 전남대 학생들을 동원시켜 주기로 한 약속이 있었으며, 하루 전인 16일 밤의 5.16 화형식 폐회 때 학생들의 집결 시간과 장소까지 이미 공적으로 광고한 바 있었다. 그런 그가 19일의 행사와 시위에 빠질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두 팽팽한 의견이 양 갈래로 갈라진 격론이 두 시간 동안 이어졌는데, 당시 총무부장 양강섭은 그 갈등을 “피튀기듯 갈등”이란 말로 표현한다:

시내상황은 시시각각으로 급변했다. 학생회 집행부였던 우리들은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피신 할 것인가로 2시간 가까이 토론을 벌였다. 어찌됐든 남아서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쪽과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일단 피했다가 훗날을 기약하자는 측이 서로 피 튀기듯 갈등을 겪다가 피해상황을 지켜보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양강섭 1989).

17일 밤 학생회 집행부의 피신 결정이 이토록 어려웠던 이유는 바로 이틀 전인 15일 최종확정되었던 내란음모 결정 사항 때문이었다. 15일 밤의 결의 내용을 양강섭은 이렇게 요약한다: “15일에도 전날과 똑같은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있었다. 그때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 접수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한상석, 송선태, 정동년, 김상윤 등이 모여 회의를 했다. 협조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고등학생들을 동원시키는 문제, 그리고 도시 침투에 대해서 논의했다. 끝으로는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양강섭 1989).

19일로 예정된 무장봉기 거사계획을 집행부는 13일부터 구체화시키고 있었으며, 15일 밤에 최종 결의되었다. 바로 이 음모가 당시 수사기관에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고 명명한 엄청난 음모 사건의 한 단면이었다. 이것이 내란음모였다는 명백한 증거는 광주사태가 시작되기 이전에 김대중이 이미 ‘예비내각명단’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야당 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씨에게 밀려 신민당 5공화국 대선 후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였던 김대중은 5월 20~22일로 예정된 전국적 민중봉기(혹은 총궐기대회)로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스스로 집권하려 하였으며, 이런 집권 전략을 ‘새도 캐비닛’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새도 캐비닛’ 음모를 수사당국에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고 불렀다. 당시 전남대 학생이었던 임낙평은 5월 중순의 전남대의 가두시위도 바로 이 ‘새도 캐비닛’(김대중내란음모)를 위한 것이었음을 1988년의 ‘경찰을 인질로 붙잡아’라는 제목의 그의 증언록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17일 오전, 대학의 캠퍼스는 연 3일 동안의 함성의 뒤끝이고 토요일이라 한산하기만 했다. 나는 오전에 복적생 문승훈 선배와 제1학생회관 옥상에 올라가 한참 동안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 토의했다. 문선배는 새도 캐비닛을 대안으로 제시하며 학생대중들의 민주화 열기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학생지도부의 연행으로 '박관현의 지도력'을 상실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확고한 결론을 얻을 수 없었고 다만 상호 연락체계를 확인하고 그런 상황이 오면 즉각 대처하기로 합의했다. 이미 지난 14일 가두투쟁 때부터 '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정문 앞에서 오전 10시에 집회를 하기로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도청 앞에서 12시에 집결한다'고 약속이 되어 있었다 (임낙평 1988).

광주사태 직전 김대중이 구성한 ‘새도 캐비닛’이 비근한 예가 2011년 6월 현재의 리비아 반군의 내각이다. 그리고 이것은 김대중의  ‘새도 캐비닛’이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반(反)민주화운동이었다는 사실이 비근한 예이기도 하다.  반군의 승리를 바라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어째서 반군 과도정부에 국가승인을 해주지 못하는가?  그것은 반군 정부 집권자가 선거로 당선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군이 민주세력이라는 것은 주관적 견해일 뿐, 반군 집권자가 선거로 당선되기 전까지는 결코 민주정부가 되지 못한다. 비록 나토의 지원을 받는 반군 정부가 무장봉기로 리비아 내전에서 승자가 된다고 하더라도 현 반군 집권세력이 선거의 절차를 생략하고 집권하고 있는 동안에는 민주정부의 요소를 갖추지 못한다. 어째서 김대중이 1980년 봄 일으키려던 민중봉기를 내란음모라고 불렀는가?  그것은 김대중이 선거의 절차를 생략하고 민중봉기로 스스로 집권자가 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분명 내란음모였으며, 민주의 원칙에 역행하는 음모였다.

여기서 5월 14일부터 이미 시작된 가두 시위 때 주동자들이 박관현이 연행될 가능성을 사전 점치게 된 배경을 설명하면 이렇다. 어느 나라에서나 계엄 하에서는 가두시위가 금지된다. 계엄이 선포된 바 없는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가두시위는 비록 그것이 비정치적 시위라 하더라도 ‘1인 시위’만 허용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전남대는 최규하 대통령 퇴진과 신현확 총리 내각 총사퇴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었다. 대통령과 내각이 동시에 없어지면 국가가 전복되기에 이것은 정치적 시위였다. 만약 김대중과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수천, 수만 명의 시위군중이 대통령과 장관들이 동시에 모두 퇴진하라고 요구하는 시위를 하면 당국은 이것을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진압하지 아니하겠는가?  2008년의 ‘광우의 난’(광우사태 혹은 광우반미시위) 때도 수천 혹은 수만 명의 시위대가  ‘이명박 물러가라’ 구호를 외쳤을 때 당국이 조용히 있었는가?    

리비아 동부의 반군이 민중봉기를 일으키며 리비아 국가원수더러 물러나라고 하였을 때 국가원수와 그의 정부와 그를 지지하는 국민은 어떻게 하여야 했는가?  반군의 요구대로 따르든가 무장봉기를 진압하든가 둘 중 하나의 선택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리비아 사태가 결코 광주사태와 닮은꼴일 수는 없겠으나, 1980년 5월 초에 최규하 대통령이 처해 있던 상황을 설명하는데 참고가 된다.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와 각 부처 장관들은 물러나든가 운동권이 주동하는 봉기를 진압하든가 둘 중 하나의 선택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불가능한 선택은 운동권이 주동하는 봉기에 굴복하여 물러나는 것이었다. 가두시위 구호가 ‘최규하 물러나라’라고 하여서 일국이 대통령과 내각이 동시에 퇴진하고, 김대중이 선거 절차 없이 스스로 집권하면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최규하 대통령에게 그것은 국가전복을 의미하였으므로 수용이 불가능하였다.

현 2011년 6월 현재 리비아에서는 반군도 나토도 리비아 국가원수 암살을 시도하고 있다. 이런 때 리비아에서 많은 이들이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리비아의 미래를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때 투자 등의 경제활동도 중지되므로 그 경제고도 피부로 느껴진다.  이처럼 우리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그 당시 한국사회에 준 충격에 비추어 1980년 5월 17일의 휴교령을 이해하여야 한다.  21세기 초엽인 오늘의 시점에도 만약 갑자기 대통령 유고 상황이 벌어지면 북한의 남침이 우려되며 계엄령이 선포될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최규하 권한대행이 계엄령을 선포하였는데, 그럼에도 오히려 반정부 시위가 기승을 부려 정국이 몹시 불안하였다. 안정을 바라는 국민의 따가운 눈총 때문에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지 못하였는데, 1980년 3월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영삼씨에게 밀린 4월 초 김대중이 남민전 잔당 및 민청학련 출신 등 과격운동권과 손잡고 전국 규모의 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지난 2008년의 ‘광우의 난’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두시위가 직접민주주의라며 반정부 시위 선동하기에 앞서 광우병 유언비어가 먼저 퍼졌다. 이처럼 1980년 봄에도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앞서 김대중 세력이 ‘이원집정부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즉, 최규하 대통령이 이원집정부제를 하려 한다는 유언비어였는데, 김대중이 앞장서서 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니 당시 학생들은 쉽게 현혹되며 반정부 시위 선동에 휩쓸렸다.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수많은 성명서들도 실은 있지도 않은  ‘이원집정부제’ 반대 성명이었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던가! 당시 대학가 성명서들은 학생들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외곽단체에서 작성하여 학생회 명의 도용하여 벽보에 붙였던 것들인데, 명의도용한 유언비어 유포는 허위사실 유포였지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명의도용한 허위사실 유포 문서들이 어째서 2011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기록에 등재되어야 하는 것인지 납득할 수 있는가?

  1980년 5월 13일 드디어 대규모 가두시위가 시작되었을 때 국민이 느낀 불안감은 2008년의 ‘광우의 난’ 때의 그것보다 한층 더 심한 것이었다. 1979년 10월 대한민국이 한창 건국기에 있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셨으므로 1980년 우리나라는 여전히 아직 약소국이었다. 경제약소국 상태에 있을 때는 사회혼란이 훨씬 더 큰 부담이 된다.  그런 예를 우리는 2011년의 이집트에서도 본다. 지난 2월 세계 언론이 이집트의 민주화를 대서특필하였으나, 불과 넉 달도 채 못되어 이집트의 경제위기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아직 한국의 경제 체질이 약했던 1980년 5월에도 국가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사회혼란은 큰 부담이었다. 그런 시대에 계엄 하에서는 가두시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법질서마저 무너졌다. 그리고 의무전경제도는 1987년에 비로서 정착되었으므로 1980년 5월 중순에는 내무부 산하 경찰병력으로 대규모 가두시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그런 사회혼란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가? 그래서 유일하게 남은 대안은 휴교령이었으므로 모두들 김동길 교수의 누나 김옥길 문교부장관을 바라보게 되었다. 김옥길 장관도 휴교령을 내릴 의사를 밝혔으므로 내란 주동세력 편에서는 이 문제에 몹시 예민하였다.  김장관이 언제 휴교령을 내릴 것인가?

5월 17일 자정의 휴교령이 있기까지의 이런 배경을 아는 독자들은 위의 임낙평의 증언 중 “학생지도부의 연행으로 '박관현의 지도력'을 상실한다면……이미 지난 14일 가두투쟁 때부터 '계엄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정문 앞에서 오전 10시에 집회를 하기로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도청 앞에서 12시에 집결한다'”가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라. 운동권은 자기네가 정부 당국자라도 가두시위 확산을 막으려면 휴교령을 내리고 박관현을 연행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에너지 위기로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 중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귀국하기 전에는 휴교령을 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운동권은 정세 파악을 하고 있었으며, 내란 음모 주동자들은 따라서 그때가 내란 거사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동순방 중이던 최규하 대통령이 돌연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하여 김옥길 장관의 휴교령 안을 재가해 줄 줄은, 즉 5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교령이 발동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17일 자정과 18일 아침 사이에 광주운동권과 전남대 운동권은 모두 얼떨떨한 상태에서 각각 선택의 기로에 직면하게 된다. 거사를 불과 하루 남겨두고 피신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미 거사 준비는 완료되었으니 그대로 밀고 나갈 것인가? 이 결정은 운동권 당사자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런데 전남대 학생 운동권은 이런 갈등 끝에 피신으로 가닥을 잡았으며, 피신 쪽으로 선택이 기울어진 이상 박관현 총학생회장을 피신시키는 것이 최우선순위의 과제가 되었다.

17일 저녁 박관현 일행과 더불어 식사와 술자리를 같이하고 그날 밤 광천동 윤상원 방에서 자다가 이튿날 18일 아침 그의 방에서 박관현을 만났기에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현장 증인인 임낙평은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윤상원이 알고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구전남매일 앞 막걸리집에서 밤 12시가 되도록 술을 마시다 노준현 형과 나는 어렵사리 택시를 타고 광천동에 사는 윤상원 선배 집으로 갔다. 우리는 선배와 함께 상황의 변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이며, 나의 주도에 의해 진행되던 전남대 내의 '노동문제학회'를 어떻게 활성화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상의하려고 했지만 우리가 술에 취한 상태였고 선배 박 효선이 찾아와 그냥 자버렸다. 얼핏 보니 윤상원 형은 이날 따라 차분하게 무엇인가를 마무리하고 있는 듯했다.

   5월 18일 윤상원 형의 호통 소리에 눈을 떴다. "야, 계엄령이 확대되고 휴교령이 내려 모두 연행되었다"라고 했다. 윤상원 형은 아침 방송을 통해서 계엄확대의 뉴스를 듣고 즉시 주변 공중전화를 통해 선후배, 재야인사들의 연행 소식을 들은 다음 우리를 깨운 것이었다. 박효선 형은 그가 기획하고 있던 '동리소극장'의 개관과 개관기념공연이 무산될 것이고, 그 동안의 연습이 헛수고라며 계엄당국의 조치에 분노하며 먼저 집을 나섰다. 윤상원 형은 비장한 표정을 짓고 과연 오늘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었다. 이미 형은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은 사실을 전화로 확인한 뒤였다 (임낙평 1988).

윤상원은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 방에서 자고 있던 후배들에게 “휴교령이 내려 모두 연행되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학생운동권 수뇌부 박관현과 양강섭도 연행되었다는 말로 들린다.  그때 박효선은 당시 광주운동권이던 황석영의 극단 광대 단원이었는데, 광주운동권을 위한 소극장 개관기념공연을 전남대 운동권과 더불어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박관현 연행은 개관기념공연 무산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아침식사도 하지 않고 급히 YWCA 연습장으로 달려 갔다.  그런데, 박관현은 아침식사 후에 윤상원 자취방을 찾아 왔으므로 박효선은 박관현이 연행되지 않은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임낙평은 그 이듬해 1989년의 그의 기고문 “윤상원 열사의 삶과 죽음”에서 아침식사 후 윤상원의 자취방에 박관현이 찾아온 사실을 증언한다. 이것을 1988년의 증언록과 연결해 읽으면 박효선은 “모두 연행되었다”는 윤상원의 호통에 깜짝 놀라 집을 나섰고, 박관현 일행은 아침식사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찾아왔다. 그 길로 박효선은 황석영의 극단 광대 연극연습장인 YWCA로 향했다 (전남사회문제연구소 1991, 215). 당시 광주운동권 문화패 「광대」 회장이었던 박효선은 헐레벌떡 연습장으로 달려오자마자 필시 단원들에게 박관현이 연행되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같은 시간에 남민전 전사 박석무의 동생 박석면과 가톨릭농민회에 가서 노금노씨와 몇 마디 이야기를 하고YWCA연습장으로 갔던 김윤기의 증언에 따르면 이윽고 밖에서 '와'하는 함성 소리와 함께 최루탄 터지는 소리가 들리자 광대는 공연 연습을 집어 치고 유언비어로 폭동을 선동하는 홍보에 발벗고 나섰다 (김윤기 1989).

이렇듯 박관현 사망설의 뿌리는 박관현 연행설이요, 어이없게도 박관현 연행설은 이처럼 박관현이 평소 기거하던 윤상원의 자취방에서 나왔다.  학생운동권 수뇌부 박관현과 양강섭도 연행되지 않았음에도 윤상원이 과장하여 “모두 연행되었다”고 말했고, 박효선은 당연히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연행되었다고 여겼다.  평소 박관현은 윤상원 자취방에서 잤다. 그러나 전날 밤 박관현이 무등산장과 대지호텔에서 투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박효선은 아침에 방에서 박관현이 안 보이는 이유가 연행되었기 때문이려니 여겼고, 광대 단원들도 박관현 방에서 달려온 박효선이 그렇게 말하니 사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관현은 연행되지 않았다. 박관현이 광주를 떠나기 전 윤상원과 주고 받은 마지막 대화를 임낙평은 이렇게 기록한다:

5월 18일 아침 라디오뉴스를 통해서 윤상원은 계엄 확대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즉시, 청년 운동가와 재야 인사 등에게 전화해 그들이 예비검속되거나 피신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아침을 먹고 난 후, 윤상원의 광천동 자취방에는 뜻밖에 계엄 수사 당국의 검거를 피한 전남대 총 학생회장 박관현과 일행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근처 빈 공터에서 그들은 잠시 동안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협의했다. 윤상원은 계엄 수사 당국의 최대의 표적인 박관현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 것, 학생 ·시민 대중이 거리로 나오면 지체없이 지도할 것 등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진행되는 사태의 추이를 주시 해 가며 서로 연락하기로 하고 해어졌다. 박관현이 가장 신뢰하는 선배 윤상원. 이날 두 사람의 만남은 최후의 만남이 되어 버렸다. 윤상원은 광주의 학생 ·시민들의 절대적 호응과 지지를 받는 박관현 등이 연행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그는 투쟁 지도부, 시민 홍보, 투쟁 방법론도 없이 싸움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태풍의 눈이 되어 있는 박관현의 은신처에 전화를 걸었다 (임냑평 1989, 97-98).

그러면 여기서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의 민우(윤상원)와 진우(박관현)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영화에서 민우(윤상원)와 진우(박관현)의 5월 18일은 소풍 다니고, 신애(전옥주)와 연애하며 희희낙락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가 아니다. 무엇이 역사인가?  1980년 5월 18일 아침은 ‘박관현 연행설’ 소동으로 시작되었다. 윤상원은 전남대생 중에서는 정동년이 연행되었다는 뜻으로 “모두 연행되었다”고 말했고, 박효선은 그 말을 “박관현이 연행되었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당시 김대중의 외곽단체였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시키는 대로 학생회가 운동권 정치도구로 전락케 하는 일을 해왔다. 급박한 상황에서의 피신조차도 먼저 윤상원의 허락을 받아야 했을 만큼 그는 김대중 세력에 종속되어 있었다.  박관현뿐만 아니라 다른 광주운동권이 모두 피신을 선택하였을 때 광주사태를 주동하기로 결정한 유일한 인물이 윤상원이었다. 그런데 윤상원이 광주사태 주동자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도 상부 지시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민우(윤상원) 직업이 운전수이지만, 실제 역사에는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이었으며, 김대중의 측근이 운영하던 운동권 아지트 녹두서점에 출근하고 있었다. 녹두서점 여주인 정현애는 윤상원이 1980년 봄에는 김대중의 외곽단체 파견근무 형식으로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윤상원씨는 80넌 3월부터 낮에는 서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들불야햑에서 일하면서 국민연합이라는 비상기구의 실무자로 파견되어 있었다” (정현애 1991, 186).  그리고 영화 ‘화려한 휴가’의 줄거리처럼 그의 18일 일과가 소풍가고 영화구경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라, 전남대 정문 앞에 가서 정문 경비병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과격시위를 선동하였는데, 이때가 오전 10시경이었다. 윤상원이 국민연합 지시로 받고 18일 아침부터  봉기 선동에 착수하였음을 정현애는 이렇게 증언한다: “윤상원씨는 5월 18일 아침에 18-19일쯤 서울의 국민연합이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할 수 있도록 할테니 광주에서 며칠만 버티라는 얘기를 남기고는 전대앞 시위에 가담하였다” (정현애 1991, 187).

내란 거사를 불과 하루 앞두고 당국의 주동자 예비검속이 시작되었을 때 박관현 등 대다수의 운동권들이 혼비백산하였던데 비해 윤상원의 결정은 단호하였다.  내란 음모 거사를 날짜만 하루 앞당겨 예정대로 밀어붙인다.  사실 윤상원이 이렇게 과감할 수 있었던 데는 그는 예비검속 대상이 아니었다는 유리한 여건도 작용하였다. 떠오르는 샛별 운동권 윤상원이야말로 공산주의 이념에 투철한 직업적 혁명가였으나 수사당국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연행 경력이 있는 민청학련 사건과 남민전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 대상이었으므로 연행 경력이 없는 윤상원에 대해서는 수사 당국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박관현이 주동한 대규모 불법 가두시위의  배후조종자는 윤상원이었다.  따라서, 실제 주동자는 윤상원이요, 박관현은 일거일동을 윤상원이 시키는 대로 했었을 뿐이나,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수사당국은 사회에 공개된 운동권 박관현만 주시하고 있었다.

박관현 및 전남대 학생회 임원들은 박관현이 지금 피신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조차 스스로 하지 못하고 윤상원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박관현과 양강섭과 차명석이 그 문제를 의논하러18일 아침 9시경 찾아왔을 때 윤상원은 “계엄 수사 당국의 최대의 표적인 박관현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말 것, 학생 ·시민 대중이 거리로 나오면 지체없이 지도할 것”을 지시하였다 (임낙평 1989, 97). 이것은 아주 어려운 요구였다. 폭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절대로 체포되지 말라, 그러나 폭동이 시작되면 선봉에 서서 지도하라. 그런데, 피신과 봉기 주동—어떻게 한 사람이 이 상반된 두 가지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박관현이 가두시위 주동자였다는 광주운동권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윤상원의 이런 지시의 또 한가지 어폐는 그러면 박관현 없이 어떻게 학생 ·시민 대중이 거리로 나오는 가두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박관현더러 잠시 은신해 있으라는 이 말은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을 대표하는 윤상원이 앞으로는 박관현을 통하지 않고 직접 전남대 학생들을 가두시위로 내몰겠다는 말이었다. 실로 그는 박관현이 은신의 길을 떠나기가 무섭게 전남대 정문 앞으로 달려가 정문에서 휴교령 안내를 하는 군인들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도록 학생들을 선동하였다. ‘박관현 연행설’과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퍼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3. 고의로 조장하여 유포한 학생 사망 유언비어

   그러면 도대체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는 누가 지어내 퍼뜨린 것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한가지 단서는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하기 3시간 앞서 ‘박관현 연행설’ 유언비어가 등장하였는 사실이다. 나의갑 기자는 그 유언비어 발생 초기에 그가 현장에서 들은 이 유언비어를 이런 기록으로 증언한다:

박관현 연행 설… 누가 퍼뜨린 것인가 5.18 첫날인 18일 오전 9시 20분께 전남대 정문 앞 거리. 학생들은 캠퍼스에 진주한 계엄군과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때 어떤 학생이 흥분한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전남대 근처에 사는데, 오늘 새벽 산책을 하다 박관현이가 연행되는 것을 봤어요. 검은 승용차에 실려 정문을 통해 후문 쪽으로 갔는데, xx사단[필자주, 광주향토사단] 연병장에 감금돼 있는 모양 이예요." "그래요? 총 학생회장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학생들은 모두 놀라고 있었다. '어떤 학생'의 이 목격담은 사실과 다르다. 연행된 것이 아니라 이리 저리 검거망을 피해 그날 저녁 여수 돌산 도에 도착,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풍문이 '어떤 학생'에 의해 발설되었을까. 이전 5.18을 '사전 음모 설' 쪽으로 몰고 가려는 시각에서 보면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학생들의 감정을 자극시키기 위해 '음모 집단'쪽이 만들어 내 퍼뜨린 고도의 전술 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취재에 임했을 때 그 '어떤 학생' 의 이름자를 물어 보지 않은 것이 지금도 후회스럽다. 그것은 '중대한 단서'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악몽의 10일'이 태풍으로 지나간 뒤 광주 사람들은 박관현의 행방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필시 죽었을 것이다.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했을 것이다.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등등 추측도 가지각색이었다. 그 중에서도 '일본 망명설'은 마치 사실인 것처럼 육하원칙을 갖추고 떠돌았다. 박관현은 5.18직후 돌산 섬을 떠나 대처인 서울로 갔다 (나의갑 1988, 105).

"나는 전남대 근처에 사는데, 오늘 새벽 산책을 하다 박관현이가 연행되는 것을 봤어요. 검은 승용차에 실려 정문을 통해 후문 쪽으로 갔는데, 광주향토사단 연병장에 감금돼 있는 모양 이예요" —이 말이 유언비어의 발단이었다.  

그런데, 이 말의 한가지 팩트는 박관현이 그 날 아침 승용차에 승차한 것은 사실이라는 것이다. 다만 박관현을 연행해가는 승용차가 아니라, 박관현 일행이 무등산장에서 박관현 집, 즉 윤상원의 자취방을 향해 가던 승용차였다. 따라서 박관현이 승용차를 타고 있는 것을 본 목격자의 말 중에서 “광주향토사단 연병장에 감금돼 있는 모양 이예요” 이 말은 무책임한 픽션이었다. 우리는 엄청난 폭동의 불씨가 이런 거짓말을 민주화운동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비지성적인 행동으로 보아야 하는가?

차명석은 그날 자기가 박관현을 승용차에 태워 멀리 여천으로 피신시킨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5월 18일, 예전부터 휴교령이 내리면 전남대 정문 앞으로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문 앞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위험을 느껴 일단 피신하기로 하고 다시 시내로 나왔다. 시내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자가용을 빌려 낚시꾼으로 가장하고 박관현과 김영휴를 데리고 운전사와 함께 광주를 빠져나갔다. 양강섭 씨는 앞으로의 추이를 더 살펴보기로 했다. 우리는 광주를 빠져 전남 여천군 돌산면 방죽포 소재 전남 임해연구소 앞에 있는 김철만 씨 집으로 피신했다. 이곳은 내가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곳이기도 하지만 사범대 교수인 정정희 씨의 도움을 받아 그곳을 피신했던 것이다 (차명석 1989).

이 증언대로라면 아침 일찍 윤상원을 만난 박관현 일행은 전남대 정문 앞에 왔다가 다시 광주 시내로 나온 후 곧장 광주를 빠져나갔다. 박관현을 먼저 피신시킨 후 자신은 광주에 남아 앞으로의 추이를 더 살펴보기로 했던 양강섭에게 18일은 견딜 수 없는 갈등의 하루였다.  그는 훗날 광주사태라 불리는 엄청난 사건의 회오리가 몰아치던 18일 그 날이 자기에게 어떤 하루였는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낮에 관현이가 먼저 빠져나가고 나는 남아서 상황을 지켜보다 결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일 견디기 힘든 건 헬리콥터 소리였다. 계속되는 헬리콥터 소리는 총소리와도 흡사했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처럼 들려 괴롭기 짝없었다. 애인 집에서 은신하였는데 그 부모님께서 시내상황을 계속 보고 오시면서 광주를 빠져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교수님이나 선배들도 피신할 것을 권했다. 상원이 형이 전화로 화염병 제조방법을 이야기하면서 신나에 모래를 섞으면 폭발성이 더 강하다고 전해 주었다. 전화를 받고 집에 있는데 전화가 도청되었다면 내 거처가 드러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다시 옮겨야겠다는 판단을 했다 (양강섭 1989).

양강섭은 1978년 3월부터 운동권 세포교육을 받았으되, 직업적 운동권이 될 생각은 없었다. 친구 박관현이 1980년 4월 학생회장이 당선되었으니 7월까지만 총무부장직을 맡아준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전남대 운동권은 광주운동권의 통솔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광주운동권 동지였다. 원래 그는 19일부터 박관현과 더불어 민중봉기 리더로 활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8일 박관현을 피신시키고 홀로 남은 그가 시위 리더로 활동할 것이었는가? 겁에 질린 그는 집에도 못 가고 애인   집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도 교수님과 선배들도 광주를 빠져나가라고, 얼른 피신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민우로 등장하는 윤상원 형으로부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윤상원의 목적은 학생혁명군을 조직해 무장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으며, 전남대 학생회 총무부장 양강섭에게 전화로 화염병 제조방법을 알려주면서 “신나에 모래를 섞으면 폭발성이 더 강하다”고 전해 주었다.

윤상원에게는 무장봉기로 국가를 전복시키고 임시혁명정부를 세울 결정적인 때가 왔으며, 이 때가 몇 년이란 시간을 들여 키운 양강섭을 써먹을 때였다. 그러나 자신을 이용해 전남대 학생회를 화염병 무기 제조에 이용하려는 윤상원의 지시에 그는 기겁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전화가 도청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었던 그는 거처를 다시 옮기기로 하였다.  바로 이것이 무장봉기의 방향이 크게 달라지는 순간이었다.

광주운동권의 본래 계획은 학생혁명군을 시민군 주력 부대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혁명군은 결코 조직되지 못했다.  시민군이 전남대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과대포장과 달리 전남대생 중에는 시민군이 없었다. 단 한 명 손남승이 있었지만 그는 도청에 25일 ‘학생시민투쟁위원회’라는 간판으로 구성된 임시혁명정부 상황실에 근무했을 뿐이므로 엄격한 의미의 무장시민군이 아니었다. 어째서 5.18진영의 야심작인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박관현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등장시키지 못하고, 그와 아무 관련이 없는 대동고 고딩으로 등장시켜야 했는가?  전남대생 중에는 시민군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민군은 노동자들과 고교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광주운동권이 양강섭을 무장봉기로 끌어들이는데 실패한 데는 차명석의 입장도 작용하였다.  차명석은 전남대 운동권의 둘도 없는 협조자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광주운동권이 오랜 세월 준비해 온 민중봉기의 때가 왔을 때 전남대 리더들을 먼 곳으로 빼돌리는 역할을 그가 하였다.  그는 박관현과 양강섭을 도왔으되 우정을 위해 도운 것이었지, 결코 운동권 이념을 위해서 도운 것이 아니었다. 그의 우정은 순수하고 진실했으며, 따라서 뭔가 심상찮은 사건의 회오리가 일고 있었을 때 그는 친구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는 곳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았다.  차명석은 그 다음날 19일에 양강섭도 여천으로 피신시켰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5월 19일 점점 사태가 악화되자 양강섭을 데리고 어제 그 자가용을 타고 광주를 빠져 여천으로 향했다. 통과하는 곳마다 검문소가 있었는데 우리는 경우신문 부사장으로 행세했기 때문에 쉽게 통과가 되었다. 우리는 여러 군데로 돌아서 갔기 때문에 5월 20일 새벽에야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때 관현이와 김영휴 씨가 광주를 가겠다며 나오고 있었다. 나는 광주의 상황이 굉장히 위험하니 안 된다고 말렸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말을 듣고 광주로 나오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내가 지금에 와서 관현의 억울한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가장 가슴 아픈 것이 이때의 일이다. 만약 그때 광주로 나오기만 했어도 관현이가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차명석 1989).

차명석이 양갑섭을 데리고 5월 20일 새벽 여천에 도착하니 박관현이 광주로 가겠다며 나오고 있었다. 이때 차명석이 5.18 사건의 큰 흐름을 또 한번 바꾼다. 박관현에게는 학생회장으로서의 책임뿐만 아니라 윤상원과의 관계가 있었다.  전혀 형제간이 아닌 윤상원과 박관현을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민우와 진우라는 형제로 등장시키는 이유가 있다면 이것이다. 박관현은 고아였다. 고아로서 광천동 아파트 방을 윤상원과 같이 쓰고 있었기에 윤상원은 그의 가족이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윤상원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여천의 편안한 피신처가 매 순간 가시방석이었다. 광주에 남아있겠다고 고집부렸던 양강섭이 갈등과 씨름한 후 여천으로 피신하러 온 그 순간, 먼저 피신해 있었던 박관현 역시 갈등과 씨름한 후 광주로 가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만약 이때 박관현이 광주로 돌아갔더라면 윤상원은 천만대군을 얻은 셈이었으며, 광주사태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차명석의 만류로 박관현은 광주로 나오는 것을 포기하였다.

차명석에게 이 우정은 차 한 대 손실의 대가를 치러야 했던 우정이었다. 윤상원이 제조한 화염병들은 파출서와 공공건물에 불지르는 데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방송국 차량 및 경상도 번호판을 단 차량들에 불을 지르는데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박관현과 양강섭을 피신시키고 광주로 돌아온 그 차가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시위대의 화공에 불탔다.  박관현 사망설을 들은 군중은 그 분노를 경상도 번호판을 단 차량 등 특정 차량들에 불지르는 것으로 표출하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박관현을 안전한 곳에 피신시킨 바로 그 승용차도 그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차명석이 20일 대인시장 입구 동문다리 부근에서 불시에 당한 사건을 이렇게 전한다:

나는 곧바로 광주로 올라왔다. 대인시장 입구 동문다리 부근에 왔을 때다. 계림파출소 쪽으로 군인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반대편에 시위대들이 있었다. 시내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감각이 없던 우리는 차 안에 있으면 별 이상이 없을 것 같아 그대로 있는데 군인들이 곤봉을 들고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 시위대 또한 힘차게 맞섰다. 우리는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차에서 뛰어내렸다. 곧바로 우리 차가 불이 붙었다. 안타깝게 바라보다 뒤돌아섰다 (차명석 1989).  

이 차는 김대중이 준 자금으로 박관현과 차명석이 빌린 차였다. 김대중이 운동권 학생들에게 봉기 선동 자금을 뿌린 것이, 그리고 전남대 운동권이 그 자금을 도피 자금으로 사용한 것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김대중 돈으로 박관현 일행이 빌린 그 차를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에 자극된 시위군중이 불태우는 것이 민주화운동인가? 만약 차명석 일행이 조금만 더 늦게 차에서 뛰어내렸어도 그 불에 차명석 등 박관현의 동지들의 생명이 위험할 뻔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바로 그 다음 날인 21일 여수 돌산에서 양강섭은 아주 황당한 전화를 받는다. 박관현이 바로 자기 옆에서 자기와 더불어 술 마시며 북한방송 듣고 있는데, 박관현이 광주에서 죽었다는 소문을 모교 교수가 전해준 것이다:

20일 돌산으로 가 관현이와 합류하였다. 돌산 방죽포 임해연구소 옆집에 방을 얻어 생활을 했다. 날이면 날마다 고통스러움과 죄책감에 들어가는 건 술밖에 없었다. 원래 관현이와 나는 술이라면 어디를 가도 빠지는 편이 아니었다. 하루는 매일 술을 마시고 죄의식에 빠지는 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라고 판단하고 하루에 소주댓병 이상은 마시지 않겠다고 합의했다. 분명히 광주는 난리가 났을텐데도 방송에서는 제대로 보도를 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건 북한방송밖에 없었다. 21일 우리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해 준 사대 정정의 교수한테 전화가 왔다. 관현이 가명이 관수였는데 교수는 관수가 죽었다는 소문이 광주에 파다한데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양강섭 1989).

그런데,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는 이미 19일에 광주시내에 쫙 퍼져 또 다른 유언비어들을 만들어내며  번져나갔음을 임낙평은 이렇게 증언한다: “시내는 '박관현 체포설'과 공수부대의 만행이 무수히 떠돌며 시민들을 자극하였다...살상에 대한 소문은 시민들을 더욱 분노케 했다. '경상도 공수부대의 살상', '박관현의 체포·죽음설' 등이었다” (임낙평 1988). 박관현은 여수 돌산에 있었으며, 19일에 시위하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박관현은 공수부대가 광주시내에 투입되기 훨씬 전에 여수로 떠났다. 그럼에도, 18일에는 광주경찰이 박관현을 죽였다며 파출서들을 화염병으로 파괴하더니, 그 유언비어가 19일에는 공수부대가 박관현을 죽였다는 유언비어로 바뀌었다. '경상도 공수부대의 살상'이라는 것은 없었다.  전북 금마의 7공수는 70% 이상이 전라도 출신 장병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박관현은 살아있었다. 박관현은 유언비어에서만 죽었다. 누가 박관현을 죽였는가? 그 유언비어를 꾸며낸 사람이 죽였다.

대중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에 현혹되고 선동되도록 방치한 광주운동권 중에는 박관현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은 박관현(영화  ‘화려한 휴가’의 진우)이 승복을 입은 중의 차림으로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등 또 다른 이상한 말들을 했으며, 그 말을 들은 이들은 곧이 들은 운동권 중에 박선정이 있었다. 그는 5월 17일 밤 11시 50분경 예비검속되어 19일 상무대 영창에서 동신고 5회 선배인 형무반장을 만나 "박관현 씨는 어떻게 됐소"라고 묻고 "어디로 도망갔다 그러더라"는 답변을 들었다. 이것이 가장 진실에 가까운 답변이었음에도 당시 그는 운동권이 퍼뜨리는 유언비어들만 맹신했던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5월 24일부터 시위하다 잡힌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엄청나게 맞아 다리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그들을 통해 밖의 상황을 대충 들을 수 있었다. 형무반장의 얘기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고 상황급변에서 오는 당혹감이 매우 컸다. 나는 박관현의 거처가 가장 궁금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위장을 하고 시위를 한다고 하고 또한 승복을 입은 중의 차림으로 시내를 돌아다닌다는 등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 나는 박관현 형이 죽지는 않았다는 데서 안도감이 들었다 (박선정 1989).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이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진우라는 이름의 대동고 고딩으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진우는 시위하다 공수부대 총에 맞아 죽는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본 관객들이 공수부대의 잔인함에 치를 떨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진우(박관현 혹은 관수)는 여수 돌산에 있었다. 그는 단지 영화에서만 죽었을 뿐이다.  누가 진우를 죽였는가?  영화제작자와 그 영화의 허위사실 유포를 즐기는 5.18진영이 죽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포스터는 민우, 즉 윤상원이 총상으로 죽은 진우, 즉 박관현의 시신을 어깨에 메고 있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 영화 배포사는이 포스터로 수많은 관객을 모아 무려 700 억원이 넘는 수익을 챙겼다.  이처럼 이 영화는 시체 장사로 크게 흥행에 성공한 케이스에 속한다.  누가 가해자였는가?  멀쩡히 살아있던 사람을 영화 속에서 죽인 자들이 가해자였다. 여기에 도덕적, 윤리적 문제가 있다. 비록 영화에서 이름을 바꾸어 등장시켰을지라도 이것은 5.18 사건의 한 주인공에게 너무도 잔인한 처사였다. 고아였던 박관현은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 때문에 몇 년간 광주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결국 병들어 시들었을 만큼 그것은 생사람 잡는 유언비어였다. 인구 80만 광주시에서 아무도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보려 하지 않고 그런 가혹한 유언비어를 맹신하였다는 것이 그리도 자랑스러운 일인가?

영화 ‘화려한 휴가’는 1980년 5월의 박관현 사망에 근거한 픽션이 아니라, 멀쩡히 살아있던 사람을 죽었다고 한  저 흉측하고도 반지성적인 유언비어에 근거한 픽션이다. 그리고 그런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이기에 우리는 그런 거짓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린 쪽에서 어언 30년이 지나도록 반성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영화 ‘화려한 휴가’의 그런 가증스러운 시체 장사에 오히려 찬사를 보냈을 때 여기에 도덕성의, 도덕적 불감증의 문제가 있다. 게다가 김영진 등 광주운동권은 영화 ‘화려한 휴가’ 흥행 성공의 기세를 몰아 5.18 유네스코 세계문화기록 유산 등재를 추진하였으니 실로 황당히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던가!

광주사태라는 엄청난 사건의 발단은 ‘박관현 연행설’이었다. 자, 박관현을 진우라는 이름의 고딩으로 등장시키는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자와 관객들에게는 진우의 실존인물 박관현이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다는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5월 18일 오전 9시 20분께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인 오십 여명의 학생들에게는 박관현 학생회장은 아주 중요한 존재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학생회장 없는 시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14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었던 시위도 박관현의 시국선언문 낭송으로 시작되었으며, 그의 폐회선언으로 끝을 맺었다. 그런데 18일 아침 전남대 정문 앞에 제일 먼저 와 있었어야 할 박관현은커녕 학생회 임원들조차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박관현이 학생들더러 모이라 해놓고 자기는 나타나지 않는 그런 무책임한 인물이었던가? 그것은 실로 그들에게는 몹시 중대하고도 예민한 문제였다. 그것은 어떤 설명이 필요한 문제였다.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자는 그 문제를 아주 쉽게 해결하였다. 그것은 엉터리 픽션 소설을 쓰는 것, 박관현(진우)을 고등학생으로 등장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주사태가 일어난 지 근 30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그런 엉터리 픽션으로 관객들을 속일 수 있었을지 몰라도, 박관현의 연설을 들은 지 이틀도 채 안되었으며, 휴교령 이후에도 시위를 계속할 것인지에 대하여 전남대 학생회장의 말을 들어보아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런 엉터리 픽션 소설이 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인이 빠진 잔칫집을, 주최측이 빠진 행사장을 생각할 수 있는가? 초대자가 빠진 초대 장소를 생각할 수 있는가? 5월 18일 오전 9시부터 10시 사이에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인 50 여명의 학생들은 박관현의 초대로 모인 것이었다. 만약 어떤 약속된 초대 장소에 초대자가 나타나지 않으며, 왜 나타나지 않는지에 대한 설명이 한 시간 이상 없으면 대부분의 피초청자들은 그냥 돌아가려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오전 9시 20분부터 10시까지의 상황이었다.

일단 학생들이 모두 귀가하면 다시 불러낼 방법이 없다. 그것은 그날 과격한 가두시위를 일으켜야만 하는 내란 주동자들 편에서는 몹시 초조한 상황이었다. 박관현 전남대 학생회 회장도 양강섭 학생회 총무도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아무런 설명이 없으면 시위 군중은 금방 각자 집으로 돌아갈 기세였다. 바로 그때 윤상원이 나타났으며, 바로 그때 ‘박관현 연행설’ 유언비어가 등장하였으며, 그 유언비어는 불과 두 시간 만에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되어 광주시내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 날 아주 그럴듯하게 들리는 그 유언비어는 쉽게 군중을 속일 수 있는 유언비어였으며, 다이너마이트 폭발물과도 같은 위력이 있는 유언비어였다. 아무도 사실 확인을 해 보려는 이 없이 군중은 이성을 잃고 그 길로 파출서로 몰려가 파출서를 파괴하고 경찰에 폭행을 가하였다. 

그러면 어째서 광주운동권은 김대중이 봉기 선동 자금으로 쓰라고 준 돈을 도피 자금 삼아 여수로 도피한 박관현은 광주에서 연행되거나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광주시민들에게 알리지 않았을까?  왜 그들은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광주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앞에서 인용하였듯이 18일 아침 박관현이 도피의 길을 떠날 무렵 윤상원은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으로부터 ”18-19일쯤 서울의 국민연합이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할 수 있도록 할테니 광주에서 며칠만 버티라”는 지시를 전화로 받았었다 (정현애 1991, 187). 광주에서 며칠만 버티면 어떻게 된다는 말이었는가? 서울역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전복되고 김대중이 집권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여기에는 내란이 성공하면 윤상원이 김대중 집권세력의 일등공신이 될 것이라는 여운이 있었다. 누가 이런 말을 윤상원에게 하였는가? 정현애는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는 필시 장기표였다.  김대중이 그의 외곽단체 국민연합이 내란 음모 체제에 돌입하였을 때 그 사무국장 자리를 광주운동권 중에서 물색하였는데, 그때 윤상원을 김대중에게 천거한 인물이 바로 장기표였다. 국민연합 실무자로서 윤상원에게 그런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총무국장 장기표였다.  신민당 경선에서 김영삼씨에게 밀려 5공화국 대선 후보가 될 수 없었던 김대중을 민중봉기로  집권시키자고 주장한 인물도 장기표였다. 김성환은 1980년 봄 장기표가 국민연합에서 사용했던 민중봉기 논리를 이렇게 기록한다:  “내가 볼 때는 한국사회의 변혁은 가두에서 결판난다고 봅니다. 민중이 봉기해서 직접 권력을 타도해야 합니다. 4・19와 같은 방식의 운동에 한국사회에 적합하다고 봅니다. 여러 논의를 접어두고 당장 가두봉기를 조직해야 합니다” (김성환 2001, 34-35).

이렇듯 국민연합이 처음에는18-19일쯤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해주겠다고 했으며, 이 약속에 대한 윤상원의 기대는 몹시 컸다. 그러나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적절히 이용해가며 윤상원이 18일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19일이 되었을 때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가?  실로 서울에서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고 쓴 대자보와 유인물과 그런 구호로 대규모 시위를 일으키려는 시도가 19일에 있었다. 그러나 그 작전은 적중하지 못했으며, 대규모 시위는커녕 전혀 가두시위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국민연합 사람이 이 날 직접 녹두서점으로 찾아와 그 다음날인 20일에는 전국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을 윤상원에게 심어 주었다. 녹두서점 정현애의 시동생 김상집은 19일 아침 국민연합 사람이 녹두서점으로 찾아와 윤상원을 만났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9일 아침 일찍 윤상원 형이 서점으로 찾아왔다. 형과 나는 서울에서 내려온 국민연합회 사람과 만났다. 국민연합의 사람은 5월 20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오전 10시를 기해 동시다발로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하였으니 힘껏 싸워 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상원 형은 들불야학 교장이면서 국민연합의 총무를 맡고 있었다. 상원 형과 나는 송곳과 드라이버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7:56).

   김상집은 이 국민연합 사람 이름을 밝히지 않으나 그는 필시 장기표였다. 김상집의 형 김상윤, 즉 녹두서점 주인의 친구로서 그와 더불어 윤상원을 김대중에게 천거한 인물이 장기표였다. 이렇듯 평소부터 녹두서점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국민연합 사람은 장기표였던 것이다.  서울에 대한 정보를 장기표에게 의지하여야 했던 윤상원은 그의 실체가 없는 주장과 빈 약속을 그대로 맹신하였던 듯하다.   그 날 5월 19일 국민연합 사람과의 회동 직후 윤상원은 두 개의 내란선동 유인물을 “호소문”과 “민주시민들이여”라는 제목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국민연합 명의가 아닌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하위조직 민주투쟁위원회 명의로 작성하였다.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 효과를 보았기 때문인지 여기서 그는 그 유언비어를 여러 사람 사망 유언비어로 증폭시킨다. 광주시민 민주투쟁회 명의의 “호소문”에 여러 학생 사망설 유언비어가 이렇게 등장힌다: “죄없는 학생들과 시민이 수없이 죽었으며 지금도 계속 연행당하고 있습니다.”  이어 나오는 문장 “지금 서울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애국시민의 궐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는 그가 그 국민연합 사람(장기표 총무국장)의 실체 없는 주장과 말뿐인 약속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이 유인물은  “5월 20일 정오부터 계속해서 광주 금남로로 총집결합시다”라는 선동으로 끝을 맺는데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2:22), 이것은5월 20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오전 10시를 기해 동시다발로 가두시위를 벌이기로 한 국민연합의 봉기 일정에 그대로 따른 것이다.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명의의 또 하나의 내란선동 유인물 “민주시민들이여”에는 여러 학생 사망 유언비어가 “최소 시민 3명, 학생 4명 이상 사망 확인”이란 문장으로 실려 있으며, 이어 “전국 일원의 유혈 폭동”이란 문구가 들어있다 (김영택 1996, 64). 이것은 윤상원이 장기표의 허풍을 과신하여 빚어진 유언비어였지만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정말로 전국에서 광주처럼 유혈폭동이 일어나고 있는 줄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이 서울에서 “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라는 구호로 가두시위를 선동하려고 헛발질을 하고 있던 이 날 광주운동권이 제작한 이 유인물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을 개 같은 최규하라고 부르며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박정희의 아들이라 부른다:  “저 개 같은 최규하, 신현확, 유신잔당 놈들과 유신독재자의 아들 전두환 놈은 최후의 발악을 시작하였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2:22). 이런 표현의 문장이 그리는 그림은 서울과 전국에서 일어난 유혈 폭동으로 정부가 전복되기 일보 직전에 최규하 대통령이 발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정보를 갖고 있던 광주운동권은 그들의 거짓 정보가 진실인 줄로 착각하고, 그 거짓 정보를 전 광주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대량의 유인물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민주시민들이여”이란 제목의 5월 19일자의 이 내란선동 유인물 역시 “(오늘부터 시내 각처에서 대규모 시위 전개, 내일 20일 오후 3시에 도청・시청 앞 집결)”이란 문장으로 끝맺는다 (김영택 1996, 64). 이렇듯 5월 19일의 윤상원의 모든 노력은 국민연합이 기획한 대로 20일 오후 3시에 도청과 시청 앞으로 시민들을 집결시키는데 있었다. 그리고, 이 목표에 따라 이후의 사태의 양상이 전개되었다. 

   이렇게 하여 광주운동권의 샛별 윤상원은 김대중의 외곽단체 국민연합 사무국장이 된 이래 가장 중대한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리고, 국가 전복을 노리는 내란 D-day가 20일로 분명하게 정해졌을진대 19일은 평소 그의 오른팔이었던 박관현이 학생 조직 동원을 위해 가장 필요할 때였다. 봉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잠시 피해 있다가 대중이 거리로 나와 봉기가 시작되면 대중을 이끌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박관현 대신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등장하여 폭동을 유발하였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윤상원은 거짓을 막기 위해 투쟁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거짓을 이용해 투쟁하였다.  그는 박관현이 죽은 것이 아니라, 여수 돌산에 있다는 진실을 은폐하였을 뿐만 아니라, 점점 부풀어지는 유언비어들을 폭동 선동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광주일고 동문 윤상원은 왜 그렇게 하였는가? 광주일고 동문들로 구성된 광주운동권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도록 의식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윤상원(민우)과 전옥주(신애)가 영혼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금번 부산저축은행 비리사건의 장본인인 박형선 여동생 박기순이 윤상원과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오늘날 운동권 노래의 상징처럼 되어 있는 ‘임을 향한 행진곡’도 그녀의 영혼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한 곡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그녀의 오빠가 서민의 고혈을 빠는 대형 금융 비리 사건을 저질렀는가?  윤상원처럼 그의 동지 박형선도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도록 의식화된 광주운동권이라는 사실이 그 이유를 말해 준다.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는 그 유언비어에 현혹되었던 광주시민들 편에서는 미확인 소문을 아무런 사실 확인 없이 맹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내란음모를 꾸미는 자들 편에서는 학생 사망 유언비어는 시민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작전이었다. 1980년의 법정기록, 즉 정동년 공소사실 9항에는5월 15일 전남대 총학생회장 회의실에서 김상윤, 한상석, 박용성, 양강섭 등이 참석하여 오후 9시경부터 진행된 기획위 모임에서 정동년이 발언한 어록이 실려있다: “학생시위를 과격화시켜 시민과 고교생까지 가담케 하면서 시위 도중 학생이 죽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야 하고 도청을 점거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면 현정부는 전복되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될 것이라고 발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7:473).

   이 어록대로라면 학생 사망 유언비어는 사전에 기획된 유언비어였다.  그런데, 광주운동권 김영진 등 5.18측이 금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한 문서들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정동년의 그 날의 행적과 어록이 있다. 오후 3시경 정동년이 전남도청 앞에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및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남조선 민족해방전선 하위단체) 명의로 5월8일 작성된「제1시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리고, 이 선언문 첫 단락의 “우리는 4월 혁명의 그 의로운 피가 헛되지 않도록 그 피의 노정을 계속 밟아 왔고”는 4.19 이후에 태어난 당시 대부분의 전남대 학생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그 피의 노정을 계속 밟아 왔고”는 6.3사건 관련자들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전남대와 조선대를 통틀어 정동년이 유일한 6.3사건 관련자였으므로 운동권 상부 조직에서 정동년을  「제1시국선언문」 낭독자로 배정하였던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시위였던 1964년의 6.3사건 자체는 유혈투쟁은 아니었음에도 “피의 노정”이란 표현을 쓴 것은 피라는 단어를 자주 반복함으로써 유혈투쟁을 선동하기 위함이었다. 광주사태라는 유혈폭동이 일어나기 사흘 전이었던 5월 15일에 정동년이 이미 유혈폭동을 선동하는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정동년이 낭독한 이 선언문 내용 중에서 “구조적 수탈의 배후에 숨어 있는 탐욕의 세력을 정확히 파헤치고 이들이 어떻게 외세 매판자본과 결탁, 반민족적 작태를 멈추지 않고 있는가를 직시하여”는 반국가단체 남민전의 상투적 선동 문구이다.  한국을 남조선이라 부르는 남민전은 한국을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로 규정하였기에 ‘외세 매판자본’ 등의 용어들을 썼던 것이다.

   금년(2011년) 5월 19일자 조선일보는 “'5·18 교육자료'에 등장한 마르크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였다. 이 기사는 경기도 2100여개 학교의 180만여명 학생을 교육 대상으로 하는 이 계기교육 자료에 마르크스 혁명론이 등장하며16쪽에서는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불평등이 어떤 식으로 식민지 해방운동을 불러일으키는지 수많은 사례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내용이 실렸음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정동년이 낭독한  「제1시국선언문」이 바로 그런 내용이었으므로 누가 '5·18 교육자료를 쓰더라도 5·18은 식민지 해방운동이었다고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5·18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이렇게 물어보자. 5·18 주동자들(남민전 세력)은 그들이 남조선이라 부르는 남한을 미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겠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정동년이 15일 낭독한 선언문 전문은 “그간 우리는 유신잔당이 우글거리는 현 과도정부에 의한 개헌망상을 규탄해 왔고, 계엄령의 즉각 철폐를 촉구했으며, 생산일선의 노동자・농민의 피의 절규들까지 뭉개지 말도록 강력히 요구해 왔다.”는 문장으로 끝난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명의의 이 선언문을 학생회 임원이 아닌 정동년이 낭독했다는 것은 좀 이상스런 일이 아닌가? 당연히 총학생회장에게 낭독할 자격이 있는 선언문을 회장은커녕 임원도 아닌 정동년이 낭독한 것은 그가 김대중이 일임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정동년이 김대중 돈으로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회 간부들에게 자금 지원을 해 준 것은 사실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그리고 그 날 밤 9시에 집행부에서 김대중 내란음모를 위한 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이 모임에도 학생회 임원이 아닌 정동년이 참석하였다. 그는 옵서버로 참석하였던 것이 아니라, 유일한 4.19세대로서 제2의 4.19를 일으키기 위한 노하우를 코치하였다. 앞서 인용하였듯이 정동년 공소사실 9항은 이 날 밤의 그의 발언을 이렇게 기록한다: “학생시위를 과격화시켜 시민과 고교생까지 가담케 하면서 시위 도중 학생이 죽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야 하고 도청을 점거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면 현정부는 전복되고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수립……”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7:473).

   『正史5・18』은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 총무로서 정동년과 더불어 그 모임에 참석하였던 양강섭의 증언을 인용하여 정동년이 그 모임에 참석한 것도 그 모임에서 가두시위를 유혈폭동 혹은 무장봉기로 격상시키기 위한 논의가 있었던 것도 사실임을 이렇게 밝힌다: "15일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접수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됐다. 한상석, 송선태, 정동년, 김상윤 등이 모여 회의를 했다. 협조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고교생을 동원하는 문제, 그리고 도시 침투에 대해서 논의했다.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됐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126-127).

   공소사실 9항은 정동년은 시민들의 협조를 얻기 위한 노하우로서 “시위 도중 학생이 죽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인데, 양강섭은 실제로 도청접수 문제가 거론되었고, 협조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런데 광주일고와 민청학련 출신으로 구성된 광주운동권이 그 날 저녁 전남 민청협 회식 때 결의한 도청 접수 계획을 집행부의 재학생 임원들에게 전한 이는 정동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모임에서 정동년이 유일한 전남 민청협 회원이었으므로 이것은 명백하다. 그때 거론되고 결의된 내용을 기획부장 송선태가 그대로 일명 "자유노트"라 불리는 비밀문건에 기록하였다 (윤한봉 1996, 55-56, 65-66). 이렇게 공소사실 9항에 기록된 사항들이 모두 사실임이  확인되므로 “시위 도중 학생이 죽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야” 한다고 발언한 이 역시 정동년이었음이 확인된다.

   이렇듯 박관현 사망설은 사실에 근거하거나 사실 확인 후에 퍼진 소문이 아니라, 내란을 일으키려는 편의 필요에 의해 조장된 유언비어였다. 왜 멀쩡하게 살아있어 여수 돌산에서 생활하고 있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영화 ‘화려한 휴가’ 제작자는 고딩 진우로 등장시켜  죽이는가? 그 큰 이유 중 하나가 그런 엉터리 픽션으로 관객의 감정을 자극해야 흥행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는 군중의 감성을 자극해  유혈폭동을 일으키려던 자들에 의해 무성하게 퍼졌다. 그리고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는 불과 사흘 만에 오천 명 사망 유언비어로 부풀어져 보다 큰 규모의 유혈 무장폭동을 선동하는데 악용되었다.  

   박관현 전남대 학생회장 사망 유언비어는 며칠 후에는 전남대 총장 할복자살 유언비어로 뻥튀기기 되었다.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함’이란 제목 하의 광주시민 일동 명의의 이 유인물은 5월 18일 전남대 교정에서 전남대 학생회장이 살해되는 장면을 보고 전남대 총장이 할복자살을 하였다고 진술한다: “가슴 아픈 사실은 전남대학 회장이 너무나 참혹하게 계엄군에 의해 살해되는 모습을 보고 전남대 총장이 할복자결을 한 것은 미친개처럼 날뛰는 계엄군들이 시민•학생들을 살해하는 장면이 얼마나 참혹했으면 자결을 하였겠는가?”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2:104)     

   어이없게도 이 유언비어 유인물은 당시 전남대 국문과 4학년생으로서 황석영의 극단 단원이었던 김태종이 작성하였다. 당시 유언비어 홍보를 하고 있던 김태종은 광주 YWCA엠네스티 사무실에서 26일 이 유인물을 제작하였는데, 27일 새벽 광주사태가 끝나자 전용호에게 전달하였으며, 전용호는 서울로 도주하여 서울대 문화패와 함께 복사본을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한겨레 2005년 5월 16일자). 이렇게 하여 전남대 학생회장 사망설 유언비어와 전남대 총장 할복자살 유언비어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유언비어 유인물의 후속 유인물, 즉 “8백만 서울 시민에게 고함”이란 제목 하에 재경 전남도민 일동 명의의 유언비어 유인물에는 전두환이  ”26일 자정을 기하여 광주시 폭격작전을 감행하려” 하였다는 새로운 유언비어가 추가되어 있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2:105).    

   전남대 상급학년 학생이 전혀 아무런 사실 확인도 해보지 않고 전남대 학생회장 사망설 유언비어와 전남대 총장 할복자살 유언비어를 문서화하여 전국에 퍼뜨렸다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 아닌가? 그리고 이런 어처구니 없는 사건은 광주사태 당시 그 얼마나 악성 유언비어가 광주를 지배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릇 양식있는 이라면 응당 부끄러워해야 할 이런 악성 유언비어 문건에  뭐 그리 대댠한 것이 있다고 광주운동권 김영진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다는 말인가!


글 작성일: 2011년 7월 4일/ 수정 7월 22일


리비아 사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 꾸몄던 광주일고 동문의 금융 비리

북한이 주도한 5.18 광주사태 사료 전시관

리비아 사태
 


광주사태의 진실탐구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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