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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5.18재판 법리의 모순  
전두환 광주학살은 김대중의 자작극이다


   시민군 대장 박남선의 증언에 따르면 광주의 무장시민군이 광주시민들을 끓어앉히고 총구를 겨누는 위 동영상의 장면은 1980년 5월 22일부터 25일 사이에 종종 목격되던 장면이었다.  박남선 당시 시민군 대장은 그의 상황일지로부터 그 한 장면을 이렇게 증언한다:

<<상황실에서 업무를 보고받고 있는데 윤상원이 뛰어들어와『2층 부지사실에서 시민ㆍ수습위원들이 무조건 무기반환을 결의한 뒤 시내 일원에서 무기회수에 들어갔다』면서 막아야 한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장병력 20여명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가 2층 복도와 부지사실 문앞에 M16으로 무장한 병력을 배치시키고 내 지시가 있으면 무조건 전부 사살해버리라고 명령한 뒤 부지사실 문을 군화발로 차고 들어갔다.>>

시민군 대장 박남선의 증언 캡쳐

(이 캡쳐 출처:  전남대학교 5.18 연구소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06.html

  즉, 시민군 대장 박남선의 증언에 따르면 무기 반환 거부의 주체는 윤상원이었다.  윤상원이 누구였던가?  바로 Y.H. 사건 배후 선동인물로서, Y.H. 사건이 부마사태를 촉발하여 10.26 사태로 이어졌었다.  광주사태 당시 전민노련의 중앙위원 겸 광주 지역 노동운동 총지휘자였던 윤상원은 김대중 조직 핵심인물이기도 했다.  아직 정당등록을 하지 않고 정치활동을 하던 김대중의 조직(일명 재야세력)을 국민연합이라 불렀는데, 그는 바로 이 단체의 사무국장이었다.  따라서, 무기를 반환하려 하던 시민들(당시 온건파라 불렀음)에게 총살형 위협을 가하였던 무장폭도들(당시 강경파라 불렀음)의 주체는 바로 김대중 세력이었던 것이다.

아래의 대한뉴스 제 1284호는 1980년 5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순방길에 오르시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평화로운 출국 장면과 달리 많은 일이 이 날을 전후하여 있었다.  김대중이 최규하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는 과격시위를 선동하고 있었으며, 고건 정무수석은 비행기에 오르시는 최규하 대통령 손에 편지를 쥐어준다. 최규하 대통령이 비행기에서 펴본 고건의 편지에는 "각하, 지금의 난국을 수습하려면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최규하 대통령 순방 비행기가 이륙할 때 북한의 남침 정보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다시 일본에서 한국으로 날라오고 있었다.  김일성은 남침하기 위해 먼저 군사동맹국 중국의 동의를 받아야 했는데, 5월 20~22일경 김재규 부하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면서 남침할 것이라는 작전을 중국에 보고하였다.  당시 핑퐁 외교로 30년만에 모처럼 찾아온 미국과의 수교 기회를 놓치기 싫어했던 중국은 제2의 한국전쟁을 막아야 할 상황이었으며, 그래서 김일성이 알려준 남침 계획을 일본 정부에 알려주었고, 일본과 미국은 다시 그 남침 정보를 한국 정부에 제공하고, 미국은 두 대의 항공모함을 급파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길에 오르시던 바로 그 날 서울대 학생회 임원들에게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괴전화가 걸려왔으며, 심재철과 유시민이 그 괴전화를 받았을 때 한홍구도 운동권 사무실에서 동석하고 있었다.  그 군부 쿠데타 유언비어는 순식간에 서울의 각대학교와 전남대학교로 퍼져나갔는데, 당시 서울대 교수들조차 그 유언비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심재철과 유시민의 시위 선동을 지원해 주었다.

   바로 이 유언비어에서 한홍구의 "전두환 광주학살" 픽션소설이 유래하였기에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5월 10일 당시 군부 쿠데타 유언비어는 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괴전화 내용이 전혀 허황되지만은 않았던 것은 중국이 일본에 김재규 부하들이 김재규 사형집행을 즈음하여 쿠데타 일으킬 것이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가 사회안정을 비밀로 하였던 그 기밀(김재규 군부 쿠데타설)을 당시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이종찬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5월 중순부터 광주의 윤상원이 전두환 쿠데타 유언비어설을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5월 19일 각 대학교에 붙은 대자보에서 처음으로 전두환이란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그 내용은 전두환 소장은 정치적 야망이 있으므로 물러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쿠데타가 이미 일어났다면 대자보에서 "정치적 야망이 있는 인물"이라고 표현하였을리 만무하다.  이미 최규하 대통령이 곧 하야를 단안할 것이 언론에 보도되었던 당시 김대중이 서울과 광주의 운동권에 준 새 시위구호는 "신현확과 전두환 물러가라"였다.  

   그러면 5월 22일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 하야시키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 했던 김대중이 학생시위로 보안사령관을 바꾸어치기 하려 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 한 단서를 아래의 캡쳐에서 발견한다.

김대중 내란 수사관이었던 김대중 가문 가신 이기동씨 증언 캡쳐

(캡쳐 출처: 신동아 1999년 7월호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

   여기서 김대중 내란 증거물 중 하나가 ‘예비내각’ 명단이다.  2월에 김영삼씨 신민당에 입당한다고 하다가, 대통령 후보 경선 문제를 가지고 김영삼 지지자들과 동교동이 각목 들고 싸우더니 4월에 입당 취소를 발표하였다.  민주주의는 정당 정치인데, 당 소속도 없고 아직 정당 등록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한 나라의 내각을 임명한다는 말인가?  정당이 없어 대통령 후보조차 될 수 없었던 김대중은 쿠데타를 일으켜(즉, 反민주화운동으로)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하였던 것이다.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 내란 준비를 하던 서울 운동권 학생들 중 몇명이 김대중 내란 음모 주동자 명단을 치안본부에 전달하자 중정 총무부장 이종찬이 치안본부보다 빠르게 김대중의 신병을 확보하였으며, 김대중 가문 가신 이기동씨에게 김대중 내란 수사를 맡겼다.  치안본부에 앞서 김대중을 체포해 준 바로 그 공로로 1997년 김대중은 3,4,5공 인사 이종찬을 인수위원장에 임명하고 이어 김대중 정부 초대 국정원장에 임명하였다.  3공 군부 출신으로 5공 정치경력까지 있었던 이종찬을 그토록 우대하면서. 1980년 5월 당시 아직 전혀 정치에 입문하지 않았던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직에서마저 쫓아내려 하였을까?

   1988년 광주청문회 때 김대중은 그 단서를 제공하였다.  1980년 2월 김대중이 장성들을 찾아다니며 자기와 거래하자고 제의하였으며, 4월에 군부는 김영삼 편이 아니라 자기 편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런데, 전두환 장군은 자기와 거래하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2월에 이학봉 중령을 찾아갔더니 "군인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며,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거래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전두환 장군의 정중한 거절을 전해 주더라고 한다.  따라서, 5월 22일의 내란 거사를 앞두고 김대중에게 유일한 장매물은 전두환 장군이었으며, 결코 만만챦은 장매물이었다.

   분명히 최규하 대통령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쿠테타는 김대중이 일으키려 하였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광주의 윤상원이 "전두환 쿠데타"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그 이후 어이없게도 그 왜곡된 시각에서 역사를 짜맞추는 과오가 되풀이되어 오고 있다.  대부분의 국민이 그러하였듯이 5월 중순 당시까지는 광주시민들도 전두환이란 이름을 전혀 들은 적이 없었으며, 윤상원도 김대중으로부터 "전두환 물러가라" 시위 구호로 시위 분위기를 띄우라는 지시를 받은 것 외에는 전혀 전두환이란 인물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다.

   후한 조건을 약속하던 김대중에게 전두환은 정치에 개입할 뜻이 없음을 이학봉 중령을 통해 분명히 밝히고 면담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5월 19일 전국 대학교에 붙이기로 예정되어 있던 대자보에는 "전두환에게 정치된 야망이 있다"라는 표현이 삽입되어 있었다.  어찌된 일이었는가?  그것은 정보를 독접하고자 하는 김대중의 야망을 암시한다.  자신의 심복이었던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이종찬은 정보의 1인자를 자처하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라이벌로 의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보의 우위를 두고 중정과 보안사과 긴장관계에 있었던 시대에 김대중은 보안사령관을 거세하여 정보를 독점하려 했었던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서 김대중 세력의 유일한 거점은 김상윤이 운영하던 녹두서점, 조총련에서 북한사상서적을 밀수하여 전국 운동권에 보급하던 서점이었다.  본래 김대중의 고향이 목포였기에 광주사람들은 전혀 김대중을 자기네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었다.  녹두서점을 거점으로 좌익활동을 하던 김상윤과 윤상원이 박관현을 의식화시키고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도록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 윤상원에게 서울 운동권 정보를 얻는 두가지 채널이 있었다.

   심재철, 유시민, 한홍구 등은 윤상원과의 직접적인 의사소통 채널이 없었다.  국민연합 사무총장 윤상원은 김대중의 지시를 직접받았다.  그런데, 윤상원 최측근이었던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을 통해 서울 학생운동권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분명히, 서울대 운동권이 괴전화를 받고 전남대에 전달한 유언비어는 "군부 쿠데타"였다.  윤상원은 김대중으로부터 "전두환에게 정치적 야심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라는 지시를 받았다.  여기서 윤상원은 "전두환 쿠데타" 유언비어를 짜집기하게 된다.  

   여기서 수수께끼는 김대중의 내란 거사 예정일과 남한에서 김재규 부하들이 군부 쿠데라를 일으킴과 동시에 김일성이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면서 남침한다는 중국 정보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군부는 자기편이라고 말하던 김대중이 운동권에 전두환 거세 선동을 하기 시작하던 바로 그 시기에 윤상원이 무장 유혈폭동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윤상원의 동지이자 노동시인이었던 박노해(윤상원 평저 저자)의 증언 캡쳐

(캡쳐 출처: http://www.leejeonghwan.com/cgi-bin/read.cgi?board=reading&y_number=228 )

   김대중의 비등록 정당이었던 국민연합 사무총장으로서 윤상원의 임무는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김대중의 내란 준비였다.  그런데, 이미 광주사태가 시작되기 열흘 전에 윤상원이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확보하고 TNT를 제작할 준비까지 치밀히 준비하였다는 사실은 88~89광주청문회를 일거에 뒤집는다.  당시, 5.18측은 선진압-후무장론을 주장했었다.  즉, 군이 과잉진압을 하니깐 시민군이 무장했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김대중 조직이 광주사태 열흘 전에 이미 TNT 폭탄까지 제작하고 있었다.  사제 폭탄 하나로 얼마나 많은 인명이 죽을 수 있는가?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 조직이 전남도청 지하실에 설치한 8톤의 TNT 폭탄은 만약 계엄군의 목숨을 건 도움이 아니었다면 광주시 전체를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만한 소형 핵폭탄급이었다.  도대체 민주화운동에 TNT 폭탄이 왜 필요하였는지 김대중은 설명해야 한다.

   5.18측에서 답변을 주어야 할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전남도청 점거의 목적이다.  중무장한 무장폭도들이 도청을 공격하니깐 광주경찰은 광주향토사단에 도청이 기밀문서를 안전한 곳에 옮길 때까지만이라도 도청을 사수해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장폭도들이 도청을 점거할 때 끝까지 남아있었던 이들은 대부분 윤상원이 평소 의식화시켰던 들블야학 청소년들이었는데, 심지어 청소년들조차 도대체 언제까지 도청을 점거하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때 윤상원은 하루이틀만 더 버티면 자기네 세상이 된다고 말했으며, 김일성은 광주시민군이 하루이틀만 더 버텨 주었더라면 남침할 수 있었을 것임을 한탄하였다.

    윤상원은 하루이틀만 더 버티면 자기네 세상이 된다고 말했을 때 무슨 뜻이었는가?  김대중은 이 말에 감추어진 비밀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가?  

    1980년 5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길에 오르시던 날 저녁 몇 통의 괴전화가 심재철, 유시민 등 당시 서울대 3학년 운동권에 걸려와 "군부 쿠데타"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서울대 유언비어 확성기들을 통해 전남대에 그 유언비어가 전해지고,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을 통해 그 유언비어가 윤상원에게 전해진 후 윤상원은 "전두환 쿠테타" 유언비어를 제조하였다.  그리고 당시 김대중 조직의 광주거점이었던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의 동생은 윤상원이 제조한 유언비어를 5월 18일부터 다시 역으로 서울 운동권으로 전화로 올렸다.

   윤상원은 서울에서의 폭동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공수부대 학살, 살인마 전두환 등의 표현을 썼다.  자기네가 광주로 보낸 유언비어가 이렇게 확대되어 오자 한홍구 등 서울대 유언비어 확성기들은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를 제조하였다.  서울대 유언비어 확성기들이 제조한 유언비어들이 광주사태 이후 다시 광주로 갔다.  정직한 광주시민은 광주시장과 전남치안본부가 광주향토사단에 폭동진압을 요청한 주체였음을, 그리고 광주향토사 위수지역 치안유지에 협조하기 위해 광주향토사 2개 공수대대를 동원하기로 결정한 주체는 광주사람 정웅소장이었음을 기억한다.  그럼에도 한홍구 등 유언비어 확성기들이 제조한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를 신화화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윤상원으로 하여금 그런 허무맹랑한 유언비어들을 제조하게 하였으며, 무엇이 한홍구를 그런 유언비어 확성기 노릇하게 만들었는가?  그 모든 것이 1980년 5월 10일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길에 오르시던 날 심재철과 유시민 등 서울대 3학년 운동권에 걸려온 괴전화의 수수께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과 김용순 대남선전부장 겸 정무차관이 북한군 광주 투입 및 유혈 폭동 선동 배후였으며, 당시 차수석 당서기인 김정일이 총책임자였었기에 분명히 간첩이 건 전화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내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김대중측이 꾸민 자작극이었을 가능성도 생갹해 볼 수 있지 아니한가.  

   과연 괴전화는 누가 걸었는가?  이것은 당시 유언비어 확성기들이 지금이라도 정직하게 물어야 할 문제이다.  간첩이었는가?  아니면 김대중 조직이었는가?  지금이라도 그 괴전화의 출처를 얼아낼 단서들은 없는가?  그 괴전화를 받았던 당사자들은 목소리나 억양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만약, 그 괴전화가 김대중의 자작극이었다면, 그 괴전화에서 전두환 광주학살 유언비어가 비롯되었기에 전두환 광주학살은 김대중의 자작극이다.

 

   


시민군 실탄 환수 특별법을 제정하자!


무장반란을 일으킨 5.18폭도들의 지프차 환수 특별법을 제정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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