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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에서 전쟁이 터졌다"
1980년 5월 18일 북한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남조선에서 계엄군과 학생 시위대가 충돌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일본 조총련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를 확보한 중앙 TV가 매일 그 테이프를 방영한 것이다. (....) 또 복면을 쓴 시민군이 탈취한 계엄군의 지프를 타고 시가지를 달려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노동신문』은 해설을 통해 학생시위가 광주사태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공수부대가 계엄군으로 출동, 엄청난 사태로 확대됐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공수부대 투입을 지시한 사람이 전두환이라고 보도했다.  내가 전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노동신문』은 전두환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238쪽)

  남조선에 파견된 간첩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김중린(金仲麟)은 3호청사의 전부서에 전화를 걸었다. 김중린은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대남비서였다. 김중린은 남조선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총가동해 사태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문제는 김중린이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직후 정책 초점을 사태파악 및 분석으로 잡았다. 황금같은 초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후 5~6일 지난 다음에야 김일성·김정일에게 최종정세 판단 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는 "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 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간의 충돌"이라고 정의하고, 따라서 양자간의 갈등 관계를 증폭시킬 경우 이는 공화국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그는 "폭동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문제"라며, "만일 우리가 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김중린은 비교적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김중린의 실책은 광주민주화운동 응용·활용보다 사태 파악과 분석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것은 5월 18일이다. 그 후 사태는 22일에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일 뒤인 27일 계엄군의 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종식됐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단 9일간 진행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김중린이 정세판단서를 김일성에게 올려 수표(재가)를 받았을 때쯤에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은 진압국면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당시 얘기를 당대외연락부 6과 지도원이었던 임만복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사태가 터지자 김중린은 모든 대남 공작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그러나 정작 3호청사 직속 청진 전투연락사무소(일명 121호 연락소)가 상부로부터 대남 침투 명령을 받은 것은 26일이었다.>> (238~240쪽)
 






<<3호청사가 광주민주화운동을 놓고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 일도 안 한 것은 아니다. 당시 나는 3호청사의 움직임을 내 친구 이화섭으로부터 자세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화섭은 당시 통전부 제1부장이었던 이동호의 아들이다. 그는 나와 학교 동기동창으로 그 이전에는 매일 만나다시피하는 사이였는데,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는 좀처럼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치 않게 이화섭을 만났다. "뭐 하느라고 그렇게 바쁘냐?"고 묻자, 얼굴이 핼쓱해진 이화섭은 "말도 마라. 오줌 누고 뭐 볼 시간도 없다."고 하소연 하는 것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자 그는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던 것이다. >> (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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