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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사태에 대한 오해와 오보
12.12에 대한 양김씨 입장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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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사태에 대하여 거짓말한 정승화와 양김씨


        
   쉴새없이 나불거리는 노무현의 입과 달리 최규하 대통령의 입은 문자 그대로 자물통이었다.  그리고, 최규하 대통령이 끝까지 침묵하심으로 던진 메시지는 12.12사태는 엄정중립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12.12사태는 결코 흑백논리로 재단하여 어느 한편이 절대적으로 옳고 어느 한편이 무조건 나쁘다고 주장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당신의 입으로는 당대의 인물들을 평가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셨다.

   12.12사태 역시 518픽션소설가들에 의해 아주 잘못 알려져온 사건들 중 하나이다.  518픽션소설가들이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서 흔히 제시하는 주장이 5.18은 12.12사태에 항거한 사건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들의 두가지 무식을 드러낸다.  첫째, 12.12사태라는 표현은 본래 김재규 부하들이 불법으로 군대를 동원한 사태를 지칭하기 위해 씌어진 표현이었다.  둘째, 대다수의 국민은 1987년 11월 이전에는 12.12사태라는 말조차 들어보지 못했었다.  

   아래 동영상에서 우리는 전두환 대통령 임기 말기였던 1987년 11월에 들어서야 국민이 비로서 12.12사태에 대하여 듣기 시작함을 본다.  1979년 10.26사태 이후 별들의 싸움이 한차례 있었다는 이야기를 간혹 들었을 뿐 12.12사태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보도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국민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이 김재규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 누가 체포하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도 한번도 그 사실을 자랑한 적도 없었고, 언론이 하이라이트하여 보도한 적도 없었다.  
  


   386에게 정승화 다음의 계엄사령관이 누구였느냐고 물어보면 분명 열에 아홉은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에 군사반란이란 것이 있었다면, 그리고 지금의 광우사태보다도 훨씬 더 폭력적이었던 광주사태를 일으킬 만큼 큰 이슈거리였다면 어째서 정승화 계엄사령관 후임의 이름을 몰랐겠는가.  지금의 광우병 이슈와 달리 그 당시에는 12.12사태는 전혀 이슈거리가 아니었으며, 1980년 8월의 전두환 장군 퇴임식에서 딱 한번 그 용어가 사용되었을 뿐 그 이전까지는 누구도 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518픽션소설가들이 12.12사태에 항거하여 광주사태가 일어났다고 주장할 때 정승화씨와 김대중 세력은 한편이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정반대이다.  1979년 11월 누가 '김대중은 전향하지 않은 공산당'이라며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하게 막았었는가?  바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이었다.  이듬해 2월 하순 누가 김대중이 사면복권되도록 도와주어 다시 정치활동을 하는 길을 열어주었는가?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다.

  손충무씨는 그의 저서 <김대중 X-파일> 151-155쪽에서 정승화 장군이 김대중의 대선 출마를 금지시켜야 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나는(정승화) 김대중에 대해 이전부터 약간의 의혹을 갖고 있었다. 그가 국민 앞에 내세우는 이상은 그럴 듯했지만 실제로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은 문제가 많았다.

즉 단순한 느낌인지 모르지만 정권획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일본에서 죄익단체들의 후원을 받아 선동적인 정치행위를 하였다는 말도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가 8.15 해방 직후 공산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한 바도 있었다.

하루는 중앙정보부장 서리 이희성 중장이 정보부에서 조사 작성한 김대중의 신상기록철을 읽어보라며 갖다 주었다. 김대중에 대해 궁금하던 것이 많던 참이었다. 그것을 두세 번 읽어보면서 김대중은 과히 신뢰가 가지 않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6.25 전에 좌익활동을 하다가 자수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다. 6.25때는 예비검속되어 총살대상으로 분류되었으나 실무자의 착오로 총살을 면했다. 그 후 북괴군이 그의 고향인 목포를 점령하자 활약하다가 6.25전에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은 사람들의 고발로 내무서에 구금되었으나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는 바람에 자유의 몸이 된 경력이 있었다.

그는 부산으로 옮겨가 사업을 했지만 실패, 다시 1954년경 강원도 인제로 갔다. 인제는 당시 행정력이 가장 취약한 최일선 수복지구였다. 그는 그곳에서 그 특유의 조직과 선전술을 이용하여 1961년에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었으나 5.16으로 의원선서를 못했다.

내가 특히 놀란 것은 1960년대에는 불순인물과 은밀히 만난 사실이 있었다는 것 등에 관한 기록이었다. 이런한 기록을 보건대 북쪽의 공산집단과 대결하고 있는 우리의 형편에서는 그를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추대한다는 것은 문제 발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나는 또 일본의 반한파 사회주의자 정객인 우스노미야 도쿠마가 1972년도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삼하고 그 회담 기록을 일보에서 출판한 것을 읽어본 일이 있었다 (정승화 씨의 이 부분은 잘못된 것이다.우스노미야 도쿠마 의원과 김일성이 만나 김대중 구출문제를 논의한 것은 1974년이다. [손충무] 필자 주).

그 책에는 김일성이 우스노미야 도쿠마에게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된다면 남북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트일 수 있을 것이라며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단선될 수 있도록 적극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 대목도 있었다.

나는 김대중 씨를 놓고 여러 각도로 분석하여 나름대로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얻게 되었다. 김대중 씨는 과거 젊은 시절이었을 때라 하더라도 공산주의와 관계를 맺은 일이 있다. 그리고 현재도 내가 보기에는 언행 등 가가 취하는 수단과 방법 등에서 과히 신뢰가 가지 않는 인물이다. 그의 정치이니으로서의 성장과정 등을 미루어볼 때 석연치 못한 점이 있다. 따라서 북쪽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으로 보아 국군을 지휘하는 위치를 차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동족 상잔의 6.25를 겪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부역했다든지 가족이 남북으로 갈라지는 등의 비극에 대해서까지 연좌제를 적용하여 국민으로서 생활하는데 제약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적을 앞에 두고 직접 적과 대결하는 지휘관이나 국군을 통솔하는 국가의 원수는 용공의 혐의가 있는 사람만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산주의와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우리 처지에서 공산주의와 한때나남 관계를 맺고 있었던 사람을, 그것도 그 성장과정과 배경이 석연치 못한 부분이 있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것은 도저히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국방장관을 비롯하여 군수뇌들에게 이와같은 나의 의견을 얘기하였더니 모두가 나의 의견에 공감하고 찬동하였다. 김대중 씨에 대한 나의 생각을 국민들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서 국민 모두가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현 상황에서 당연한 나의 의무라 생각하게 됐다.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그 같은 나의 생각을 말했더니 노 장관은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현직 군인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시기를 보아 국방장관이지만 민간인인 자기가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을 성 싶다고 말했다.

나도 그 의견이 나쁘지는 않았다. 특히 '정치적 중립'이라는 문제는 군의 정치적 중립을 주장하는 나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문제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군복을 입은 내가 국군 통수권자의 사상에 흠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 민간인 장관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국민들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결과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간접적인 방법과 경로를 통해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게엄사령부에 협조를 아끼지 않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불안을 느끼고 있던' 언론계 대표들을 만나 계엄사령관으로서 계엄의 기본방침을 알리고 언론계의 협조에 감사도 표할 겸 이 사실을 알리기로 작정했다.

나는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과 일부 참모들과 상의했다. 계엄사 보도처장으로있는 육군 정훈감, 박찬식 장군이 중앙일간지 및 통신사 사장들과 편집국장, 국방부 출입기자들을 각각 식사에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하였다. 그래서 사장, 편집국장, 출입기자, 외신기자 이렇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초대하기로 하였다.

(1979년)11월 26일 우선 신문, 통신, 방송사 사장들과 발행인들을 오찬에 초대하였다.

....중략......

나의 얘기가 끝나자 참석자 중 누군가가 "대통령에 입후보할 가능성이 있는 정치인 중 구체적으로누가 용공의 과거가 있는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나는 "김대중 씨가 과거 공산주의자였고 그 후에도 전향한 뚜렷한 증거가 없다. 국회의원으로 활동했고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하여 많은 표를 얻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정치활동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만다"고 대답했다. >>


   위에서 두번째 동영상에서 본다면 정승화씨와 김영삼씨는 서로 인정하는 동지처럼 보인다.  1979년 11월26일,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은 언론사 사장단과 편집국장들을 초청하여 무어라 말했던가?   "김대중은 사상적으로 불투명한 사람이다. 김영삼은 무능하다. 김종필은 부패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면 군은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막을 것이다."  무능한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면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막겠다던 정승화씨가 불과 8년만에 김영삼 후보 지지선언을 하며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정승화씨 말이 180도 다르게 왔다갔다할 때 그 중 한쪽 말은 거짓말이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소위 "3김 비토론"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었다.  꼭 9일 전이었던 11월17일 김재규는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김대중은 사상에 하자가 있고, 김영삼은 무능하고, 이철승은 사꾸라라는 말을 했었다.  결국 정승화는 김재규가 법정에서 한 말을 열흘 만에 그대로 이어받아 확대 방송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아는 장교들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의도를 수상하게 여겨 12.12사태의 한 도화선이 되었다.  정승화 부하로서 김재규 부하였던 장군들이 군대를 동원했을 때 영관급 장교들이 따르려 하지 않았다.

   최규하 대통령은 왜 침묵하였을까?  아마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권한을 헌법적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518픽션소설가들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군정을 원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계엄정국에서는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이 계엄사령관에 있다고 여기고 행동하였다.  문제는 초등학교 학력을 가진 그에게 경제정책 통솔력이 있었느냐였다.  그는 학자풍 인룸이며, 그의 시대에는 초등학교 졸업자이면 고학력이었다.  그러나, 만약 계엄정국에서의 실제적 국가지도자 행세를 하는 것에 대한 군 내부의 우려가 12.12사태의 한 불씨였다.  그리고, 12.12사태가 있었기에 통치권이 계엄사령관에게서 최규하 대통령에게로 넘어왔다.

   무엇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우국충정이었던가.  헌법대로라면 계엄정국에서의 비상대권이 계엄사령관에게 있고, 군부가 입법과 사법과 행정을 관할하는 것이 옳지만 그러면 나라살림이 제대로 안된다는 모순점이 지적한 이가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 후임이 바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었다는 사실을 국민 대다수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가 12.12사태 이후 국정운영의 중심이 계엄사령관에게서 대통령에게로 옮겨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승화 계엄사령관에게도 공은 있다.  518픽션소설가들의 주장과 달리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3김씨를 10대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게 한데 대해 장교들이 항의하는 정서가 있었다.  장세동 대령을 비롯한 당시의 영관급 장교들은 바로 그 점을 우려하였다.  518픽션소설가들의 주장처럼 하나회의 결속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3김씨의 대선 출마를 금지시키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독재적 군정을 우려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10.26사태 직후의 과도기에 최규하 권한대행만 1979년 12월 대선 후보가 될 수 있도록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못박아 결정한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으므로 정승화씨의 공과에 대하여 함부로 판단하기도 어렵다.  최규하 전 대통령의 침묵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12.12사태 배경을 노빠들은 노무현을 대입해서 생갹해 보면 된다.  만약 김재규가 노무현을 시해하였는데, 시해 현장에 있던 참모총장이 총성을 듣고도 대통령을 구하러 가기는커녕 시해범을 비호하였으며,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숨겼으며, 대통령 시해범 체포를 방해하였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상관한 대한 예우로서 그냥 넘어갔는데, 대통령 시해사건 후 계엄사령관이 된 참모총장이 그 권한을 이용하여 시해범을 사면복권시키려 하고 있었다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겠는가.  



    12.12사태와 관련하여 김영삼씨의 행동에도 모순점들이 있다.  1980년 봄의 김영삼씨의 정서도 광주사태의 화근과 무관하지 않았다.  김영삼씨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결정으로 단독출마하여 당선된 최규하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예우하지 않고 사사건건 반대했었다.  그런데, 김영삼씨는 무능하다며 출마금지시켰던 그 장본인과 8년만에 손잡고 민주당에 입당시킨지 2년만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창당하여 노태우가 물려받은 민정당과 합당하였다.  만약 참으로 12.12는 군사쿠데타였다고 여겼다면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민정당과 합당하였으며, 만약 1990년 2월 9일의 자민당 출범선언이 진심이었다면 어떻게 바로 위 동영상 표지에서처럼 노태우에게 미소로 아부하던 얼굴이 5년만에 변해 위헌까지 해가면서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며 감옥에 보낼 수 있다는 말인가.


☞  제5공화국의 미국식 간선제 선거가 체육관 선거였느냐고?  

☞  5공화국 정권 창출의 정당성과 전두환 대통령의 정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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