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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의 가족사에 얽힌 김대중 그룹의 정체성



지리산 빨치산이었던 문근영 외조부를 통일운동가로 미화한 몇몇 언론들의 방송과 보도로 불거진 여우 문근영 양의 가족사에 대한 관심사 우리로 근 이십 년 전의 10.26사태를 다시금 회고케 한다. 만약 문근영의 외조부 빨치산이 단지 지리산 빨치산이었다면 그를 통일운동가로 미화하는 보도에 대한 국민의 정서도 훨씬 완화되었을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세대는 1950년대의 지리산 빨치산의 만행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어언 30년이 되어가는 1979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간첩 사건은 우리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시대의 사건이요, 또한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사관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어린 문근영이 연예인이 되는 조건은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이었다. 그리고, 국민의 정부라는 간판을 달고 출범한 국민의 정부 시절 문근영은 국민의 여동생으로 뜨더니 청소년기를 갓 넘기자말자 국민배우가 되었다. 왜 이 사실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을까? 김대중은 자기기 민주화운동한다고 자화자찬해왔는데, 어째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지 않고 비호해 주며 옹호해 주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아마도 그 큰 이유일 것이다. 문근영이 아니더라도 연예인의 꿈을 꾸는 소녀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출연하자마자 국민여동생으로 뜨는 행운은 대다수의 소녀들에게 행운의 별따기이다.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류낙진 외손녀의 연예계 등장은 보장된 길이었다는 말인가?

김대중은 광주의 동지들이라는 표현을 간혹 쓴바 있으며, 그 동지들에게 감사 표시를 하거나 그들 편에 서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였었다. 즉, 광주에 김대중이 동지들이라 부르는 그룹이 있었다.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은 김대중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위 동영상 뉴스는 10.26사태가 일어나기 꼭 한 주 전에 보도된 뉴스였던바,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간첩 관련자 검거뉴스를 보도한다. 29년전 사건을 회고케 하는 이 뉴스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남민전이 "불순세력을 교합해서 지하조직 완성, 도시게릴라 방법으로 사회혼란 조성"하려 했다는 보도이다. 김일성과 김대중에게 부마사태와 10.26대통령 시해사건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도시게릴라 방법"이란 베트콩식 빨치산 전법을 말하며, 김대중이 1976년에 이미 채택했던 방법이며, 광주사태의 밑그림이었다.

1970년대 주요 사건 중에 1973년 한민통 두목이었던 김대중이 단원 문세광을 사주하여 1974년 광복절에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사건이 있었다. 문세광은 배후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입을 다물었지만 김대중이 곧잘 쓰는 "실세 논리"를 역적용하면 1973년 여름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목표를 세울 당시 한민통 실세였던 김대중이 바로 그 배후였다. 범행 당시 문세광도 문근영처럼 문씨였으며, 문근영처럼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고 죽는 길을 선택하였다. 이처럼 이념은 무서운 것이다. 만약 1970년대의 조국 근대화와 경제 건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인 자화상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김대중이 문세광을 데리고 다니면서 어떤 이념을 주입시켰길래 그는 그토록 끔찍한 범죄를 위해 자기 인생을 걸었던 것일까?

류낙진과 김대중의 공통분모는 반국가단체 우두머리 경력이다. 김대중을 그 괴수로 하였던 반국가단체 한민통의 이념이 어찌나 지독하였는지 1974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에 이어 6년 후 광주사태 때도 그 배후 세력이었다. 요정 마담과 정사를 가지면서 딸을 숨겨두는 것 외에는 직업이 없었던 김대중이 초호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김일성은 여전히 한민통을 통해 김대중에게 막대한 공작자금을 보냈으며, 광주사태 이전에 이미 한민통이 침투하여 서울과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흔히, 김대중을 정치 9단이라고 하는데, 왜 정치9단이라고 하는지 그 시대 사건들을 잠시 살펴보자. 광주사태 직전의 시위구호는 "최규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직선제) 개헌 반대" "계엄령 해제"였는데, "계엄령 해제" 구호는 김대중이 김영상을 이용하는 수법이었다.



지난 28년 동안 5.18사기꾼들이 어찌나 사기쳐 왔던지 당시 비상계엄령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18일 선포한 것으로 크게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비상계엄령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 선포되었다. 그때는 김일성이 자기 생전에 적화통일을 꼭 이루려던 시기였다. 1975년 4월 30일 월맹보다 20배나 경제력이 강하였고, 10배나 군사력이 강했던 월남이 월맹의 도시 게릴라 전법 앞에서 어이없게 무너져 내려 항복하였을 때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한 두가지 시각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우리의 시각은 우리나라는 그런 불행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김일성과 김대중은 베트콩식 도시 게릴라 전법을 쓰면 연방제 통일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탈북군인들은 29년의 남민전 사건에, 베트콩식 도시 게릴라 방법으로 북한 세력과 반국가단체가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었다는 사실에 대해 까맣게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도시 게릴라 작전의 임무를 띄고 광주에 침투했었다고 증언한다. 위 동영상에서 우리는 실제로 무장공비들이 곳곳에서 침투하고 있었음을 본다. 바다는 넓고 해안선은 길게 뻗어있으니, 국국의 눈에 띄는 간첩은 백에 하나였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무장간첩들이 침투하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지금 전방 내무반에서 수류탄 한 개만 터져도 국민이 놀라고 있는데, 1980년 봄 무장간첩들이 침투하고 있었던 준전시 상태에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자신의 임기를 일년 가량으로 정하고, 신속히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고 하야하려 했던 최규하 대통령은 자신의 과도기 정부를 안보에 취약한 정부로 보았다. 김일성은 여러차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며, 1979년 10월에 남민전이 선동한 사태가 부분적으로 성공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남침 절호의 기회로 삼고 있었으므로, 준전시상태였다. 그래서 5공화국 대통령이 선출되기 전에는 계엄이 유지되어야 했으나, 김대중은 전국적 민중봉기 최적화 환경을 노리고 계엄령 해제 요구 시위를 선동하였으며, 김영삼을 이용해 국회가 불법으로 계엄령 해제를 가결하게 하려 하였다.

5.18사기꾼들이 제작한 영상물에서는 김대중이 당시 대선 후보였다는 멘트가 있다. 그러나, 김대중은 당시 정상적인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정당도 소속 정당도 없었다. 단지 김영삼씨의 신민당에 입당하겠다 말겠다 하는 식의 말 바꾸기 잔치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양김씨 후보 단일화 문제에 대해 신민당은 김대중의 가입 조건을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그는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켜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스스로 집권하려 하였던 것이며, 그 걸림돌인 계엄령을 해제시키기 위해 김영삼씨를 이용하는 정치9단이었다. 김영삼씨는 후보 단일화에 김대중이 승복하는 대신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를 가결해 달라는 거래에 속아넘어갔다.

이미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김일성이 남한에서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면서 남침할 것이라는 첩보를 전해받은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그런 요구에 응할 수 없었으며, 그래서 비상계엄 유지의 의사표시로서 제주도를 계엄지구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여당도 국회의원도 없었으므로 신민당 총재 김영삼씨 마음대로 가결시킬 수 있었으나, 그것은 김영삼씨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었으며, 안보에 무책임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비상계엄은 무장간첩 등 북한군이 계속 침투하고 있었던 때에 군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계엄이었지, 국민의 생활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김영삼씨를 이용해 국회가 계엄령 해제를 가결케 하면서 그의 지지세력 기반인 좌익과 운동권을 동원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했으며,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하루 앞서 계엄령 전국확대를 선포하였다.

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했던 날자와 김일성이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했던 날자가 정확하게 일치하기에 아래의 두 동영상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남한에서는 광주사태가 심각해진 후에야 보도되기 시작했으며, 영상물 볼 기회가 극소소에 제한되어 있어서 대다수의 국민은 시민군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던데 비해 북한주민들은 그 발단 과정부터 북한에서 라디오와 TV로 생중계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남한에서 일어난 사건임에도 그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쪽은 북한 주민들이다. 아래의 5월 28일자 대한뉴스에서 북한 영상물이 짤막하게 소개되었다.



남한에서 얼굴이 잘 알려진 탈북자 중에 정수반이 있다. 지난 2000년 북한을 탈출하여 동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 정수반씨는 2005년 북한음식점 "달가람" 개업하였고, 2006년 북한 요리연구소 설립하였으며, 현재 통일문예인협회 회장이자 해님발명회사 대표요 북한 요리연구소 소장이다. 정씨는 광주사태 당시의 그의 경험담을 이렇게 표현한다:

<<5.18 영상물 보던 북한주민 "와, 우리 아들 나왔다"

1980년은 남북한에 격변이 많은해였다.
광주에서는 유명한 5.18이 터졌고 평양에서는 10월에 김정일이 공식데뷔하였다.
많은 북한주민들이 저녁마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새로운 소식을 접하느라고 난리였다.
그런데 5.18 관련 영상물을 시청하던 한 여인이 무릎을 탁 치며 환호하는 것이었다.
"와,우리 아들이다....우리 경철이가 장한 일을 하고 있네."
함께 TV를 보던 마을 사람들도 놀랐다.
"맞네..배나무집 경철이가 맞네."
광주 5.18 관련 영상물에서 차량에 탄 청년이 소총을 난사하면서
한 쪽 발로 자동차 핸들을 조종하는 장면이 비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이 동네에서 자란 경철이와 생긴게 똑같았다. >>

이처럼 북한 주민은 광주 5.18 관련 영상물들을 선명한 화질로 볼 수 있었던 데 비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영상물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한 쪽 발로 자동차 핸들을 조종하는 솜씨는 광주사태 발생 사흘 전인 5월 15일 오후 한시 반에 남대문 앞에서 유시민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순경들을 학살하던 사건을 연상시킨다.  만약 김대중의 "실세 논리"를 그대로 역적용한다면 그것은 유시민이 시킨 범죄요, 따라서 유시민을 청문회로 불러내야 한다.  그러나, 버스틀 탈취당한 운전사의 증언을 참고하면 시위대 청년들에게 탈취당한 버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뒤에서부터 순경들을 받아 깔아죽인 다음 급커브하여 달아났는데, 일반 운전 기사들은 흉내낼 수 없는 운전이었다고 한다.  (이 증언은 도시 게릴라 방법을 위해 특수훈련을 받은 자들이 유시민 시위대 안에 침투해 있었을 개연성을 시사하는바 위의 5월 28일자 대한뉴스에서는 그 참혹한 장면을 앞 부분만 살짝 보여주고 그 다음 장면은 보여주지 않았으나,   http://study21.org/518/video/515.htm 에서 그들이 어떻게 버스로 순경들을 깔아 죽였는지 자세히 보실 수 있다. )





한정된 5.18 관련 영상물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정수반이 증언하는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 모른다. 그러나 달리는 차 위에서 한 손으로 총을 든 시민군 사진은 종종 눈에 띈다. 우리는 3년간의 군복무 후에도 실탄이 장진된 총을 한 손으로 들지 않는다. 안전장치와 안전점검을 철저히 해도 총기가 노출된 곳에서 사고가 터진다. 위의 동영상에서 보듯 공수부대원들은 총을 거꾸로 메고 흘러내리지 않게 묶었다. 우리는 3년간의 군복무 후에도 여전히 우리는 총기를 취급할 때 긴장한다. 그렇다면 달리는 차 위에서 한 손으로 총을 쳐들고 있는 폭도들의 정체는 누구인가? 그리고 바로 위 칼러 사진에서 우리는 시민군 M-16 총기로도 무장하고 있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발견한다.



여기 바로 위에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동영상이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광주사태 당시 북한에서 방영되었던 영상물과 근본적으로 똑같은 영상물인 것으로 관찰된다. 어떻게 북한이 광주사태 장면을 TV로 방송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북한에서 방영된 영상물과 KBS가 호들갑스럽게 선전하는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영상물이 일치하는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는 힌츠페터에게 유언비어 전하며 충동질하려 광주로 데리고 온 세력의 정체성에 대한 한 단서이기도 하다.

"푸른 눈의 목격자" 영상물에서는 시민군이 5월 21일 아침 도청으로 향하기 전에 실탄 장진을 하는 장면을 잠깐 보여주나, 아래 동영상에서 좀 더 자세히 그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난동자들이 붉은 글씨로 크게 "시체 수백"이라고 쓴 대형 현수막을 트럭에 걸고 달리는 장면이 동영상 시작 후 20초부터 10초간 보인다. 만약 5월 19~20일 사이에 시체가 있었다면 난동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순경들과 군인들 시체뿐이었으며, 아직 시민군 편에서는 시체가 없었던 때였음에도 저런 거짓 정보를 흘리며 광주 전 지역을 누볐던 이유는 아마도 유혈 폭동을 선동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1979년 10월의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간첩 사건과 광주사태를 연결시키는 키워드는 해방구이다. 남민전이란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을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광주사태(북한 용어로 광주인민봉기)에 대한 북한의 초지일관된 사관이다.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5월 22일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하였다. 바로 그 5월 22일이 김대중 세력이 민중봉기로 전국 도청을 장악한 후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김대중 내각을 임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날이었다. 주동자들은 5월 21일까지 도청을 점거하려는 목표를 강하게 밀어부쳤으며, 도청을 점거하자마자 해방구를 설치하였다.

그 무엇이 5월 21일 이십 만이 넘는 광주시민을 도청으로 집결하게 하였는가? 광주사태 발생 이전에 이미 전국적 민중봉기 계획이 치밀하게 세워져 있었으며, 5월 21일까지 도청을 점거하는 목적 달성을 위해 수없이 많은 유언비어들을 살포하였던 것이다. 아래 사진은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한 후 주동자들이 광주 전지역에 벽보로 붙였던 투사회보이다. 도시 게릴라 전투의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기에 투사회보였으며, 주동자들은 그런 방법으로 이긴다고 장담하며 투쟁을 부추기며, 그들의 목적은 전국으로 무장봉기를 확산시키는 것임을 밝힌다.



1976년 3월 1일 김대중은 "월남처럼 민중봉기가 일어나야 민주화가 된다고 " 주장하였는데, 월남처럼 민중봉기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은 베트콩식 빨치산이 도시 게릴라전 펼쳐야 공산화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1945년 4월 30일 시민군으로 위장한 게릴라들이 사이공 대통령궁을 점령한 직후 자유 월남은 지도상에서 영구히 사라졌음.) 남민전은 김대중이 그 발언을 한 바로 그 무렵 만들어진 단체로 남한 정부를 전복한 뒤 북한에 동조하는 인민정부를 세울 목표를 가지고 활동하다가 3년 반만인 1979년 10월 중순에 그 실체가 드러났다. 그러나, 이미 부마사태가 터졌고 10.26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셨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였을 때 대다수의 국민의 바램은 대한민국은 공산화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월남처럼 민중봉기가 일어나야 한다는 김대중의 주장에 동조하는 운동권이 있었으며, 남민전의 정체가 막 드러나기 시작했던 1979년 10월 좌익 운동권은 이미 도처에 탄탄한 지하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조직이 1980년 봄의 학생 선거에 개입하였다. 1980년 봄에 학생회장으로 당선된 이들은 순수하였으나 광주 운동권의 영향 하에 있었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도 고려대 학생회장 신계륜도 광주 고등학교 출신들로 광주 운동권의 말에 따라 움직였으며, 좌익 조직이 개입하여 세운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과 아주 절친한 관계였다.

그러면, 김대중의 전국연합이란 조직 사무국장으로서 학생회장 선거에 조직을 동원하여 개입하여 박관현을 총학생회장으로 당선시켰던 윤상원은 도대체 어떤 인물이었던가? 지금은 북한 공산주의 경제를 선호할 이들이 적겠지만 아직 남북한 국력차가 크지 않았던 그때만 해도 이념뿐만 아니라 경제 모델까지도 북한 체제를 선호하는 좌익 운동권 수가 많았던 때였다. 그런 좌익의 영향을 받은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도 훗날 2억원의 보상금을 받은 직후 월북하였던 것이다. 윤상원의 머릿 속은 공산주의 이론으로 꽉 차 있었는데, 그는 그 이론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으며,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으로서의 그가 운동권 리더들에게 탐독케 한 책이 바로 체 게바라의 『도시 게릴라』였다. (쿠바가 1959년 시민군을 동원한 도시 게릴라 전으로 공산화 혁명에 성공한 국가였으므로 제3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이 그 모델을 연구하는 것이 유행이던 때가 바로 그 시기였다.)

이렇듯, 공산주의 이론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1980년의 공산주의 혁명 방법으로서 레닌의 모델과 체 게바라의 『도시 게릴라』모델에 대한 이론 무장까지 한 윤상원은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의 자격으로 그해 1980년 5월 9일 소집한 운동권 리더들에게 "쇠파이프, 각목, 화염병 등을 준비하고 만일의 경우에는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확보하고 TNT를 제작해서 자체 무장을 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즉, 광주사태 때 시민군이 등장한 것은 폭동 진압에 대항하기 위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5월 19일 시민군이 무장하기 열흘 전인 5월 9일에 그 밑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윤상원이 본딴 체 게바라의 『도시 게릴라』모델은 남민전의 베트남식 『도시 게릴라』모델과 그 맥을 같이한다.

김영삼씨의 독선적인 주장도 국민이 좌익과 민주투사를 혼동하게 하는데 한 몫을 하였다. 한민통이라는 간첩단 두목 출신 김대중도 양김씨 회동 쇼를 부리는 것만으로도 간첩단 두목 이미지를 없애고 김영삼씨와 같은 민주 투사 레벨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남민전같은 간첩단도 유신정권과 싸우는 민주투사들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1994년 자신의 대통령 재임 기간 때는 김영삼 대통령도 남민전 잔당들을 체포하여야 했다. 남민전 사건으로 복역하다 풀려난 안재구(당시 61.경희대 강사)씨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조선노동당 남조선 지하당 `구국전위'를 결성하였기 때문이었다. 안재구는 "조국 남반부에서 주체혁명 위업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일심일체로 뭉친 김일성.김정일주의 정수분자들이며, 우리혁명을 승리의 종착점으로 이끌어갈 지휘핵심들이며 전위부대"라는 요지의 창립선언문을 작성해 북에 보고하였다.

안재구는 자신을 `구국전위'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하고, 미전향 장기수 출신 류낙진(당시 66세)씨를 광주.전남지역책으로 하는 조직을 구성하였던바, 이들은 주요 공장과 노동현장, 청년단체와 빈민지역 등에 고정간첩망을 구성하고 하부조직망을 확대하려 하였다. 김영삼 정부의 안기부는 `구국전위' 창립선언문, 강령 등과 북한이 보낸 조직결성 축하격려문, 대북보고문, 난수해독용 사전 등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는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을 감옥에 보냈던 것이며, 5년후 1999년 김대중 정부는 류낙진을 8.15특사로 감형, 석방했던 것이다.

1997년 15대 대선 당시 문근영 양이 연예인이 되고 싶어하였을 때 그 부모는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 허락해 주겠다고 했다 한다. 즉,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면 문근영 양은 연예인이 될 수 없었다는 뜻이요, 그 가족은 김대중 그룹과 연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실로, 역대 대통령 중에 간첩 등 적화통일세력에 최고의 혜택을 준 정부가 김대중 정부였다. 국군포로는 남한으로 귀향할 수 없고, 간첩들만 귀향할 수 있다는 것이 김정일과 김대중의 논리였다. 류낙진은 단지 1950년대의 빨치산이 아니었다. 그는 1960년대에는 김일성이 김대중을 정계에 진출시킬 목적으로 남한에 조직케 한 통혁당 간첩이었으며, 그 잔존세력이 1970년대 베트콩식 도시 게릴라를 모방한 남민전이었으며, 그 잔존세력이었던 1990년대 구국전위 간첩단의 간첩이었다.

1979년 11월 13일자 경찰발표에 따르면 남민전은 북괴및 재일조총련의 지령을 받는 혁명조직으로 국가변란을 획책했다. 이들은 이른바 통일전선방식으로 현정권을 혼란에 빠뜨린후 북괴가 요구하는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할 음모를 꾸몄으며 혁명이 성공하면 중앙청에 게양할 대형 전선기까지 만들어 놓았다. 광주사태뿐만 아니라, 부마사태 때에도 그 배후에 북한 세력이, 적화통일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김일성과 그의 지령을 받고 침투한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 문근영 양에게는 김대중이 한없이 고마운 존재이리라. 그러나, 만약 북한과 적화통일세력의 음모를 막지 못해 자유 월남처럼 우리나라도 패망하였다면 오늘의 문근영이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아무리 뛰어난 연예인이라 하더라도 누가 김정일 통치 하에서 연예인 노릇을 하고 싶어하겠는가?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이 통일운동가라고 보도한 언론인들에게 묻는다. 류낙진을 보면 한국 좌익 운동권의 역사가 한 눈에 보인다. 그는 반세기 동안 김일성, 김정일 왕조에 충성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국가를 전복시킬 뻔했던 굵직굵직한 간첩단 사건 중심에 류낙진이 있었다. 도대체 그 사건들 중 무엇이 통일운동이었다는 말인가? 양민을 불안에 떨게 하였던 지리산 공비들이 통일 운동가들이었던가? 지하공산당이 통일운동 단체였던가? 도대체 자유 월남의 패망을 통일로 보는 사관은 누구의 사관인가? 문근영 양의 선행을 기리는 것은 좋다. 그러나, 문양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빨치산과 간첩이 통일운동가라고 미화하여야만 한다는 논리는 도대체 누구의 논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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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빨치산에 대한 광주시민의 사관인가?

문근영의 작은 외조부는 1980년판 빨치산 총탄에

김대중과 김일성의 거래관계에 대한 증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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