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연구사료 광주사태 33주년 기념 신간 5.18 연구도서 "역사로서의 5.18"
역사로서의 5.18 제1권: 광주사태의 발단과 유언비어 역사로서의 5.18 제2권: 5.18 무장봉기 주동자들의 실체 
역사로서의 5.18 제3권: 광주청문회에서 드러난 5.18 역사로서의 5.18 제4권: 5.18재판 법리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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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호 당시 전남대학생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3시 반경 도청광장의 시민들이 "이렇게 있어 가지고 다 죽는다"라고 말하며 무기를 탈취하러 떠났던 것으로 무기 탈취 경위를 설명하는 나레이션이 나온다. 그러나, 이 말은 사건의 전개순서를 뒤바꾸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 영상물은 5월 21일 오전에 이미 목포 별동대가 전라도에 산재해 있는 여러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광주로 수송해 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위 동영상 47초와 50초 사이에서 엠16 유탄발사기 M203 가 눈에 띈다. 저 육중한 엠16 유탄발사기 M203 을 들고 있는 시민군의 손에서는 북한군 특수부대원 손에서나 볼 수 있을 정권 단련의 흔적이 역력하다. 손이 저만큼 크고 굵고 단단해지려면 족히 10년은 단련해야 한다.

   동영상 22초부터 28초 사이에서 무장폭도들이 한결같이 삼색무늬 수건으로 복면을 하거나 머리 혹은 목에 두른 것이 관찰된다. 이 삼색무늬 수건은 1980년 5월 21일 오전 10시부터 무기 탈취에 동원된 폭도들에게 단체 지급된 것이었다.

   동영상 9초에서 13초 사이에서 창문이 모두 깨진 시민군 버스가 보인다. 모든 시민군 버스의 공통적인 특징은 시위대가 깨진 유리창 바깥으로 막대기와 쇠 파이프를 내밀고 차체를 두들기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광주시민들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목포 별동대가 정해 놓은 방법이었다.

   광주사태 당시 전남대 국문과 4학년생으로 재학하면서 황석영의 극단 광대 단원이었던 김태종은 시민군 홍보반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5월 27일자의 그의 유언비어 성명서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함"에서 이런 연설적인 문구로 전남대 총장 할복자결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가슴 아픈 사실은 전남대학 회장이 너무나 참혹하게 계엄군에 의해 살해되는 모습을 보고 전남대 총장이 할복자결을 한 것은 미친개처럼 날뛰는 계엄군들이 시민•학생들을 살해하는 장면이 얼마나 참혹했으면 자결을 하였겠는가?"

"언제? 어디서? 누가?" 등의 기본적인 육하원칙 구성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5.18 유언비어들과 달리 탈북자들의 증언은 구체적이고 명확하며 사실과 부합한다. 광주사태 북한개입설을 놓고 5.18단체들과 탈북군인들 사이에 갑론을박의 1라운드가 있던 2007년 초에 한국논단 2007년 3월호에서 자유북한 군인연합의 임천용 대표는 5.18단체들에 이렇게 도전한다:

"㉣ 1980년 5 18당시 북한군 특수부대들이 전투준비 동원령을 받고 각 부대의 임무사항에 따라 실전을 위한 대기상태에 임했던 사실에 대해서 아니라고 반박하라.
㉤ 5 18이후 각 군단, 사 여단 정치부 및 참모부에 발송된 광주사건과 관련된 조선인민군 총 정치국, 총 참모부 기밀문건은 출처가 없는 것이라고 해명하라." (한국논단 2007년 3월호 기사 "광주대학살의 주범은 전두환 아닌 김정일이다" )

광주사태 북한개입 사실에 대한 탈북군인들의 첫 공개 증언은 지금부터 꼭 7년 전이었던 2006년 11월에 있었다. 위 동영상에서 보는 대로 그때 자유북한군인연합 임천용 대표는 이런 사실들을 밝혔다:

우리는 광주사건에서 많이 얻었지만 놓쳤고 놓쳤지만 내일을 위해서 남겼다. 후속 작전을 위한 성과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2.2월경, 김선일(김정일의 사촌동생)에게 내부적으로 내려온 인민군총정치국 발 “광주작전 평록”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일부이다.
(1981.6월 하기훈련 직전 평남덕천 교도지도국(한국에서 명명하는 특수8군단) 본부에서 열린 지도국산하 여단장 정치위원 및 대대장, 대대정치지도원을 위한 군사정치일군상학에서 김일성이 발언한 요지일부. 이 내용은 교도지도국 산하 여단, 대대참모부에 군관용기밀문서로 하달 되였으며 일반군단 및 사, 여단에는 배포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음)
(....)
광주봉기에 북한군 570산하 여단들에서 선정된 인원들이 투입됐다는 것은 북한쪽에서 떠도는 출처미상의 유언비어가 아니라 김일성이 직접 발언한 내용이다. 1981.6월, 지도국사령부에서 열린 특전여단 군사정치일군 상학에서 김일성은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 너무 쉽게 생각했어. 광주가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놓쳤어,,,’(1981.6월 발 참모부기밀문서 요지)라고 직접 발언했다. 김정일 역시 1982년 1월~3월까지 북한군특전여단(16저격여단. 17여단. 53여단. 43여단. 818여단. 19여단. 59여단.)들이 북부지구에서 벌린 사상최대의 게릴라전 쌍방훈련장소를 극비방문한 자리에서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남조선으로)당장 나갈 수 있게 만단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군관, 사관용 정치상학요강) 와 같이 광주봉기에 북한군이 개입했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김정일은 1981.6.21일 강원도 고성군 온정 리(1군단지구)를 시찰하는 과정에서도 군인들이 옷 단추를 풀어놓고 무질서하게 다니는 현상을 엄하게 비판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시기에도 조국을 위해 적들 속에 들어가서(광주봉기를 뜻함) 피를 흘리고 싸우는데 후방에 있는 군인들이 이렇게 해이되면 되겠느냐. 인민군대가 너무 만성적으로 해이되고 있다. 사상투쟁을 진행해서 강한 규율을 세워라’고 발언하는 과정에서도 광주에 북한군특전사요원들이 개입됐음을 분명히 했다. 6.21김정일 발언을 계기로 당시 북한군 전반 부대들에서 몇 개월간 사상투쟁의 돌풍이 일어났고 열물까지 토해내는 ‘장관’이 연출되기도 했다.
북한군 특전사 요원들이 광주봉기에 투입됐던 자료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김선일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북한군특전사를 대표하는 교도지도국과 일반군단 소속 저격, 경보병 여단에서 복무한 사관급 이상 경력자들은 1980년5월, 산하 부대들에서 특출 된 인원들이 광주봉기에 실제로 참가한 사실과 당시 현장에서 중무기를 비롯한 각종 윤전기재(탱크 등)를 다루며 항쟁을 유도한 사람들이 남쪽의 일반 민간인들이 아니라 대부분 북쪽의 군인들이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1982년부터 특전사 내에서 광주봉기 현장에서 있었던 접전 과정에서의 중요한 프로그램들을 대상별로 분리해서 상영하면서 적군전술상학에 도입하였고 시가전시 제기될 수 있는 상황에 자의적인 판단으로 대처할 수 있는 특전방법들을 교육하였다. 그만큼 이일은 북한군 특전부대 내에서 극비에 해당되는 일도 아니다.
광주봉기가 한창이던 1980년 5월, 북한텔레비전은 다른 프로그램을 죽이고 실시간으로 광주상황을 방송했다. 광주봉기 과정을 보면서 북쪽에서 놀란 것은 시위자들이 현장에 투입됐던 군인들의 탱크와 전차를 탈취해서 진압군한테 반격을 가하는 장면이다. (한국논단 2006년 12월호 "북한 特戰部隊 출신자의 생생한 증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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