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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폭동 진압책임자는 호남 군인 정웅이었다



광주사태의 객관적 사실은 희생자 대부분이 시민군 총기 사고와 시민군 차량사고에 의해 다치거나 사망하였다는 사실이다. 집단발포란 없었으며, 만약 있었다면 그것은 시민군에 의한 집단발포였다. 총기사고는 실탄 30만발을 보유하고 하루 만발씩 아무데나 쏘아대었던 시민군이 낼 수 있었던 것이지, 5월 21일 낮 12시 경에야 한동석 중위로부터 200발을 건네받은 7공수여단 병력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5월 20일 밤에 폭도들이 MBC방송국에 방화하였을 때 타죽을뻔 한 1개 소대를 구출한 31사단(광주향토사단) 한동석 중위가 21일 도청광장에 갇혀 사지에 몰린 7공수를 뒤에 두고 헬기로 탈출하는 것이 미안하여 실탄 두 상자를 넘겨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요, 진실임에도 2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광주사태 유언비어가 많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광주사태 유언비어는 맨처음 김대중의 최측근 윤상원에 의해 유포되기 시작하였고, 광주사태 초기에 서울에 올라와 유언비어 삐라를 뿌린 조선대 운동권에 의해 증폭되었다. 1980년 5월 김일성의 목표도 남한에서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으며, 김대중의 목표도 서울과 광주를 거점으로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광주의 조선대 운동권이 광주사태 초기에 상경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던 이유도 그들의 목적이 광주사태를 전국적 민중봉기로 확산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선대 운동권이 서울에 뿌렸던 유언비어 삐라(위에서 첫번째 사진) 문구들은 전두환이 "부마사태 때에는 전라도 군인들을 진주시켰고, 금번 광주살육작전에는 경상도 출신의 군인들을 투입시켜"라고 주장한다. 서울대 운동권이 그 주장을 그대로 믿어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제작하여 전국에 유포하였었기에 오늘날까지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광주사태를 인식하여 왔다. 그러나, 5.18사기꾼들의 그런 허황된 주장이 객관적인 사실이었는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부마사태 진압에 관여한 적이 있는가?



위 사진에서 우리는 5.18무장단체의 군용트럭 앞에 "전두환 찢어 죽여라"는 현수막이 붙어있음을 본다. 광주시민군에게 전두환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전두환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전두환을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고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던 광주시민에게 그 당시 전두환은 어떤 존재였을까? 광주시민군 대다수는 전두환이 광주시청 직원이려니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그들의 정보의 한계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살벌한 구호가 등장하였을까? 그 배후가 김대중 세력이었든 북한이었든 폭동 주동자들의 의도는 폭동선동용으로 전두환이란 이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윗 사진에서 우리는 "전두환 대갈통 세멘트 바닥에 깔아버리자"는 구호를 본다. 그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어디에서 전두환 대갈통 세멘트 바닥에 깔아버리자는 것이었을까? 조선대 운동권이 전한 유언비어에 속아넘어간 서울대 운동권은 전두환이 공수부대 대장이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작년에 제작된 영화 화려한 휴가도 시청자들에게 그런 인식을 갖게 한다. 1980년 5월 서울의 운동권조차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이라는 사실조차 모른채 공수부대 대장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전두환을 광주 시청 직원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대다수의 시민군에게 "전두환 대갈통 세멘트 바닥에 깔아버리자"는 세무소와 전남도청 등 관공서를 공격하자는 의미로 인식되었겠지만, 전두환은 공수부대 대장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주동자들에게 그 구호는 무엇을 의미하였을까? 특전사 사령부를 공격하여 "전두환 대갈통 세멘트 바닥에 깔아버리자"는 의미였을까?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두환 대갈통 세멘트 바닥에 깔아버리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위 구호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그렇게 잔인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 살벌하고 섬뜻한 구호는 어딘가 북한 냄새가 나는 표현이다. 그러면 북한 사람들은 광주사태(북한용어로 광주인민봉기)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탈북자들은 이구 동성으로 ""전두환 찢어 죽여라, 광주인민들이 드디어 광주도청을 장악했다, 임산부의 배를 갈랐다, 총검으로 두 형제를 찔러 즉사했다" 등의 뉴스를 생중계로 보며 들었다고 증언한다. 광주사태 당시 시민군 중 다수가 이북뉴스를 듣고 있었기에 탈북자들의 그런 증언은 사실이다. 그리고, 북한주민들은 북한의 개입으로 광주인민봉기가 일어났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영화평론가 이명자는 "1980년과 1929년의 '광주'"에서 북한영화 "광주는 부른다"는 광주사태를 감안하여 제작된 영화임을 밝힌다 (이명자 2008, 150). 이 영화는 1929년 광주보고 학생들의 실제 역사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무력 투쟁론'을 끼어넣은 픽션소설로 스토리를 진행시킨다. 즉, 등장인물의 복장만 1929년의 복장이고, 실제 이야기는 북한이 바라고 계획했던 대로의 광주사태 모티브로 진행된다. 이 영화는 1929년을 그리는 영화라기보다 북한 사가의 관점에서 1980년 광주의 분위기를 그려내는 영화이다. 이명자가 밝히듯이  "광주는 부른다"는 청중에게 5.18에 대한 북한의 사관을 주입시킬 목적으로 제작된 북한 정권의 프로파겐다 영화이다 (이명자 2008, 150-151). 이 영화는 납북된 신상옥 감독이 북한에서 제작한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제작자는 김정일이 바라는 프로파간다의 목적을 위해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적 사실로 스토리를 진행시켜야 했다. 신상옥 감독이 이 영화를 제작하였을 때 가장 김정일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 영화 상영을 바로 코 앞에 두고 결사적인 북한 탈출을 하였다.

북한이 북한의 5.18 사관을 각종 출판물과 미디어로 프로파간다하고 있을 때 이 영화가 제작되었다. 김일성이 1989년 황석영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임을 위한 교향시"를 제작하게 하기 바로 3년 전에 "광주는 부른다"가 제작되었으며, 두 영화는 비슷한 스토리로 진행된다. 황석영의 북한판 5.18 영화에 "광주는 부른다"에서 따온 모티브가 있다. 북한군이 광주에서 시민군 복장으로 있었을 때 그들이 시민군이었는가? 옷만 다를 뿐 북한군의 본질은 그대로 있었다. 어떤 이는 광주에 북한군 군복 입은 사람을 못 보았으므로 간첩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북한군 군복 입은 간첩이 있는가? 간첩은 스님 복장, 시민군 복장, 대학생 복장, 심지어 경찰 복장을 입고 있었다. 영화 "광주는 부른다"도 복장만 1929년의 복장일 뿐 그 내용을 북한이 선전하는 5.18 이념이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1929년 복장을 입었으므로 5.18 테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우기는 사람은 전혀 위장전술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다. 그때는 아직 북한 정부 입장에서 북한이 광주사태에 개입해 있었다는 것을 공적으로 노출할 때가 아니었다. 영화 "광주는 부른다"와 더불어 북한주민들은 서서히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을 입소문으로 말할 수 있었고, 1991년 상영된 영화 "임을 위한 교향시"와 더불어 이제 더 이상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은 북한 주민들에게 숨겨진 비밀이 아니었다. 그때는 대남선전 전략을 위해서라도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 사실은 꽁꽁 숨겨야 하는 비밀이었다. 그래서 위장전술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광주사태 때 전라국을 만들고 전라국이 독립하기 위해 국군과 투쟁하라고 선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선동을 누가 하였는가? 전두환이 경상도 군인들을 보내며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유언비어도 전라국을 만들라는 선동을 위해 필요하였다. 그 악성 유언비어는 광주시민 단독 작품이 아니라, 배후에 남파간첩 조직이 있었다. "전라국"을 만들라는 말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문자적으로는 전라도를 대한민국에서 분리하여 독립시키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북한의 적국이 아니라, 북한에 고분고분한 친북 정권을 수립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었다.

저 포스터를 다시 보라! 왜 영화 제목이 빨간 글씨로 "광주는 부른다"인가? 빨간 글씨는 공산주의 혁명을 상징한다. 이 영화는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프로파간다 영화이다. 광주가 1920년대의 사람들을 부른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화 상영 당시의 북한 인민군을 환영한다는 의미이다. 이 영화가 5.18 테마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우기는 이들은 아직도 프로파간다 영화는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고 여기는 것인가? 이 영화 제작을 지시한 김정일은 한번도 광주학생운동 발생일을 북한의 국가기념일로서 기념하지 않았다. 김정일이 만든 국가기념일은 5월 18일이다. 5.18이 있었기에 광주 사건은 북한 프로파간다 매체의 중요한 테마이다. 

실제 프로파간다 내용이 "광주는 부른다"이므로 영화 제목도 "광주학생운동"이 아니다. 광주가 누구를 부르는가? 영화 포스터에서 광주는 북한 인민군을 부른다. 북한 청년들이 인민군에 입대하여 광주로 가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는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전술을 하자고 교육시키는 영화이며, 그런 프로파간다를 위한 교육 영화는 결코 광주학생운동을 그린 영화일 수 없다. 이 영화는 5.18 테마를 부각시키기 위해 실제 역사를 왜곡한다. 그만큼 이 영화는 광주사태와 관련이 있다.

광주가 적화(赤化)를 상징하는 빨간 글씨로 씌어졌을 때 그 광주는 어떤 광주인가?  포스터의 인물은 학도이다. 따라서 이 포스터는 광주학도를 부른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광주학도가 이 포스터를 볼 때는 빨간 광주가 광주학도를 부른다는 의미가 된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이 영화와 더불어 북한에 등장한 프로파간다 노래 "광주학도야 별 보러 가자"가 그 의미를 밝혀준다. 아래 동영상 3:15에서 한 탈북여성이 이 노래를 직접 부르면서 "광주학도야 별 보러 가자"라는 가사의 의미를 설명한다. 별은 김일성, 김정일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노래를 듣는 청중은 이 노래가사가 북한판 5.18 테마를 넌지시 담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 노래에 5.18이란 단어가 안 들어가 있으니 광주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는가? 아니다. 이 노래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북한의 사관을 서사적으로 혹은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제주 4.3 사건을 제주 해녀라고, 5.18 옹호 운동권을 광주학도라고 부른다. 여기서 말하는 광주학도는 전혀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광주학도가 아니다. 좁은 의미에서 5.18 시민군 넓은 의미에서 5.18 옹호 운동권이 광주학도이다. 영화 "광주는 부른다"가 상영되던 1980년대 중반부터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장군을 보러 가자는 뜻으로 북한에서 애청되던 이 대남선전용 노래에서 광주학도는 1929년의 광주학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남한 운동권을 지칭한다. 이 노래가, 이 영화가 5.18 테마와 관련이 없는가? 북한이 광주사태에 개입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표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노래와 이 영화가 5.18 테마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직설적인 표현은 없되, 정치적인 프로파간다 감추어져 있다. 이렇듯, 영화 "광주는 부른다"는 5.18이란 단어를 쓰지 않은 5.18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본 북한 청중은 1929년의 광주와 1980년의 광주를 혼동하게 되며, 북한의 사관으로 광주를 인식하게 된다.

 영화 "광주는 부른다"에서 주인공인 광주고보 학생 세일은 '무력투쟁론'에 확신을 가진다. 바로 이것이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확신이었다. 남한에서의 사회 민주주의(즉, 북한식 인민민주주의)의 실현은 오로지 무력투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무력투쟁이 서울로 화산될 때 남침하려는 것이 광주사태 당시 북한의 전략이었으며, 그런 시각에서 1980년 5월의 광주의 분위기를 해석하게 하며, 광주에서 무력투쟁이 전개될 때가 광주가 북한군을 부르는 때라는 것이 이 영화가 청중에게 던지는 메시지이며, 위 영화 포스터에 함축되어 있는 테마이다.   




북한의 광주사태 개입의 흔적 중의 하나가 위의 사진에서 보는 대로 북한의 거대건설장비 휘호가 "5.18청년호"라는 사실이다. 아직도 소를 이용하여 운송하는 북한에서는 이런 건설·운송장비는 북한에서 몇 안되는 장비일 것이다. 그런데, "5.18청년호"라는 명칭이 이 초거대 장비에 붙은 이유는 남한의 민주화를 김일성이 학수고대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는 것이 김일성의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5.18청년이란 어느 나라 청년을 말하는가? 만약 북한 청년을 의미한다면 위의 포스터에서 "광주는 부른다"의 대상은 북한 청년을 포함한 북한세력이었다.

그러면 왜 포스터에서 "광주는 부른다" 구호의 색깔이 붉은 색인가? 그 함축적 의미는 광주인민봉기가 적화통일의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다. 이 포스터는 무엇을 커뮤니케이션하는가? 광주 학생 운동권이 북한을 부르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도록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 상징적 모델은 누구였을까? 두말할 나위 없이 이른바 친북세력, 좌익, 혹은 연방제 적화통일론자들이었다. 당시 북한 아나운서들의 멘트는 미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광주인민봉기가 일어났다는 것이었으며, 지금도 북한에서는 그런 반미사관이 주입되고 있다.



윗 동영상은 1989년 1월 16일자의 광주청문회 동영상이다. 사실 서울대 운동권 중 전두환이란 인물은 조금이라도 아는 이가 있었다면 조선대 운동권이 전한 유언비어에 그토록 쉽게 속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명을 쓴 전두환 장군과 실제 진압책임자 정웅 소장은 아주 대조적인 인물이다. 첫째로, 전두환 장군의 리더십의 특징은 항상 솔선수범이었다. 그는 사단장 시절 군인의 의무를 입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훈련 때마다 장군이 항상 사병들 선봉에 서서 달렸다. 그는 전우애를 입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낙오한 사병들의 군장을 모두 자신이 짊어지고 선봉에서 달리심으로 본을 보여주셨다.

둘째로, 전두환 장군은 책임감이 아주 강해 상관과 동료와 부하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 쓰시는 어른이셨다. 그의 어록을 보라. 늘 타인의 죄과를 자신이 포괄적으로 뒤집어쓰고 대신 죄과를 치루셨다. 그만큼 그의 책임감은 범인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하였다. 이것이 그가 결코 변명하지 않는 이유이다. 김대중 인맥의 정웅 소장은 모든 면이 정반대였다. 그는 5.18사기꾼들의 주장하는 것처럼 신군부이거나 하나회 소속이 아니었다. 중학교 졸업후 오늘날의 방위병이었던 보충역이었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소위계급장을 단지 이십 여년 만에 투 스타까지 진급한 그는 신군부도 하나회 소속도 아닌 김대중 진영의 인물이었다.

 사관학교를 다닌 적이 없기 때문이었는지, 성품 탓인지 모르겠으나 정웅의 지휘는 현장에 가보지 않는 지휘였다. 조선대 사기꾼들이 전두환 장군이 광주 살육작전을 지휘하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을 때 우리는 전두환 장군이 그때 광주에 있었는지를 묻는다. 전두환 장군은 뒤에서나 멀리서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만약 전두환 장군이 살육작전 명렁을 내렸다면 그것은 전두환 장군이 현장에서 지휘하며 선봉에서 살육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두환 장군이 그때 광주에 있었는가? 극과 극의 대조적인 인물 정웅 소장은 명령을 내려놓고 한번도 현장에 가보지 않는 인물이었다.

 순천 출신으로 광주시민이었던 정웅 소장이 광주폭동 진압을 지휘하게 된 계기는 이러하다. 1980년 5월 18일 오후 3시경 산수동 농장다리인근에서 경찰 45명이 옷을 벗긴 채로 인질로 억류되어 있었는데, 이때 난동자들의 손에 식칼과 각목 등이 들려있었다. 지난 7월 광우사태 때 우리는 전경이 동년배의 폭도들에게 납치되어 제복이 벗긴 후 수치심에 얼굴 붉히는 모습을 보았다. 1980넌 광주기동경찰의 연령대는 사십대와 오십대였는데 이분들을 납치한 난동자들의 연령대는 고교생이거나 이십대 초반이었다. 아들뻘되는 이들에게 납치당한 기동경찰의 수치심이 어떠하였겠는가. 아직 시위진압 전담 의경이 없었던
시대에 광주경찰서는 광주향토사단(31사단)에 순경 구조 요청을 하였으며, 그 요청을 받은 정웅 사단장은 7공수 33대대와 35대대에 폭동 진압 명령을 내렸다. 오후 4시 40분에 그의 명령을 받은 2개 대대는 『시민 여러분 집에 돌아가십시오』라는 방송을 한뒤 1분도 안돼 진압봉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영향 때문에 7공수가 서울에서 투입된 병력인 줄로 잚못아는 국민이 많다. 그러나, 7공수여단은 전북 금마에 위치한 부대였다. 그리고, 조선대 사기꾼들이 퍼뜨린 유언비어처럼 전두환이 경상도 출신의 공수부대를 투입시켰던 것이 아니라, 김대중 인맥의 호남 장성 정웅 소장이 전북 금마의 7공수 2개 대대를 동원하였던 것이며, 7공수의 절반이 전라도 병력이었다. 8도의 사나이들이 모인 부대에서 전라도 병력이 절반이었다는 것은 경상도 출신은 극소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5.18사기꾼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방식을 발견한다. 그들은 미확인 사실을 사실인 것처럼 큰 목소리로 유포한다.

정웅이 지휘한 폭동진압작전의 문제는 누가 시위진압 대상이었느냐 하는 문제였다. 31사로 사람들을 연행해 오라는 그의 명령을 받은 공수부대 편에서도 누구를 연행해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광주시민 편에서도 애매하게 연행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분명 그날의 시위진압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정웅 소장은 하나회 소속도 아니요, 이른바 신군부도 아니었다. 그는 김대중과 각별한 사이의 인물이었다. 1980년대에 평민당 국회의원 수가 얼마되지 않던 때에, 더구나 광주 국회의원이 누구이냐가 김대중에게 몹시 중요한 때에 광주 국회의원이 되도록 김대중이 밀어주었다. 의원 출마 공천을 받으려 해도 김대중에게 수억원 공천헌금을 내야 했던 때에 정웅에게는 그런 프리미엄을 줄만큼 둘은 각별한 사이였다.

정웅의 폭동진압작전의 가장 큰 문제는 명령을 내린 후 현장에 가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주 심각한 상황이었으며, 인접 거리였는데도 정웅은 현장에 가보지 않았으니 이처럼 그는 책임감이 결여된 인물이었다. 정웅의 또 하나의 문제는 인격적 문제, 즉 책임전가의 문제였다. 상관과 동료와 부하들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포괄적으로 뒤집어쓰시는 전두환 어른의 고매한 인격과 달리 정웅은 책임 전가를 하는 인물이었다.

자, 그러면 여기서 광주청문회의 주요 이슈를 살펴보자. 1980년 광주사태 당시에는 5.18사기꾼들이 전두환이 공수부대 대장이었다고 사기쳤다. 그러나, 1988년 광주청문회 즈음해서 드러난 사실은 전두환 장군은 그 당시 공수부대 대장이 아니었으며, 당시 광주향토사단 사단장 정웅 소장이 폭동진압 결정을 하고 7공수를 동원하였으며, 더욱이 정웅은 하나회 소속도 신군부도 아니라 김대중 진영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5.18사기꾼들은 큰 숙제를 안게 되었다. 그래서 전에는 전두환 공수부대 대장이 공수부대를 동원했다고 사기쳤던 이들이 이번에는 지휘계통에 2원화가 있었다는 억지를 부렸던 것이다.

그러나, 광주경찰서의 요청으로, 그리고 당시 광주계엄관으로서 정웅 광주향토사단장이 자신의 직권으로 결정하였던 7공수 2개 대대를 동원한 것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어떤 관계가 있었는가? 5.18사기군들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살인미라고 부를 만한 근거가 털끝만치라도 있는가? 흥미로운 것은 5.18측에서 든든한 우군으로 여기며 시민군 증인으로 삼았던 김영택 기자 역시 이 질문을 던졌다. 5.18측 주장이 성립되려면 진압책임자가 김대중 진영의 정웅 소장이 아니었다는 근거를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김영택 기자는 그런 엉터리 억지는 5.18측 논리가 넘을 수 없는 산임을 그의 저서 "실록5.18 광주민중항쟁"에서 이렇게 시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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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출신 인사들의 건의

이날 오후 8시 40분 전남 출신인 박경원(朴璟遠), 고재필(高在珌), 전부일(全富一) 등 장성 출신으로 박정희 정권에서 장관 등의 고관현직을 역임한 사람들이 도착했다. 이들은 시내 유지들로부터 그 동안의 상황을 청취한 다음 강경진압을 완화시켜 주도록 계엄당국에 요청해달라는 건의를 받고 이날 밤 전남북 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중장을 만나 이 같은 뜻을 전달했다.

이들의 건의는 그 다음날 받아들여져 강경진압이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다. 이에 대해 정웅 31사단장은 자신이 지휘권을 행사한 공수부대에 대해 무혈진압을 명령했기 때문이라고 주장, 자신의 공로로 내세웠었다.

그러나 나는 예비역 장성들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진압방법이 완화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웅 사단장은 18일 오후 2시 25분 제7여단소속 제33대대와 제35대대장에게 시내출동을 명령했었다. 이에 따라 이들은 시내에 투입돼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고 살상행위에 가까운 ‘과잉진압작전’을 벌임으로써 광주민중항쟁은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광주 비극’의 시작을 명령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가 살상행위와 같은 진압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내면적인 다른 명령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한 행동을 벌여 ‘광주 비극’을 일으키게 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이들을 지휘한 정웅 사단장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없지 않다.


정웅 31사단장의 책임

특히 그는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을 안 것은 다음날 오후라고 국회 청문회에서 증언했었다.

<<19일 15시로 기억되는데 광주의 모든 기관장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관장들이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이놈의 군대가 어느 나라 군대냐, 왜 국민을 상대로 과격하게 진압을 하느냐…….>>

정웅 사단장은 이날 밤 11시 33, 35대대장과 11공수여단장, 경찰국장, 자신의 휘하에 있는 연대장, 대대장 그리고 일반 및 특별참모를 불러 무혈진압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광주시내에서 발생하고 있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강경진압으로부터 무혈진압으로 전환하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다.

정사단장은 이 같은 무혈진압명령이 제대로 이행되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20일 오후 두 대대장을 불렀으나 이들이 전교사사령관실에 윤흥정 전교사사령관 및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에게 배속된 33, 35대대에 대한 지휘권이 사실상 박탈당한 것으로 간주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의 지휘권이 실질적으로 해제된 것은 21일 오후 4시다. 그 이후에는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이자 전남북 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중장에게 지휘권이 넘어갔다.

어떤 형태였든 간에 5월 18일부터 21일 오후 4시까지의 공수부대 제7여단, 33, 35대대에 대한 지휘권은 제31사단장에게 있었다. 그는 제7여단뿐 아니라 19일 새벽에 도착한 제11여단에 대해서도 지휘권을 행사, 금남로에서 제7여단 병력과 교체하도록 잔전명령을 내렸었다. 다시 말하자면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은 18, 19일 벌어진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틀 동안 시위진압을 위해 투입돼 살상행위에 가까운 과잉진압작전을 편 33,35대대의 대대장에게 출동을 명령한 사람은 바로 정사단장이다.

33, 35대대장들이 31사단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사전에 어떤 내밀한 교육이나 명령을 받고 정사단장의 의중과는 전혀 다르게 과잉진압을 전개함으로써 광주민중항쟁을 유발시켰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부대를 직접 지휘한 정사단장은 광주민중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과잉진압’에 대한 지휘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특히 과잉진압 사실을 알게 된 그가 무혈진압명령을 내렸다면, 명령을 받은 지휘관들의 보고 이전에 현장에 나가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그는 확인과정을 외면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헬기를 타고 돌아보니 ‘평온했었다’고까지 말했다.

그가 ‘평온했다’고 증언한 20일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항의하는 시위와 농성을 계속하고 있던 날이었다. 시민과 공부수대간의 밀고 밀리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내는 폭풍전야와 같았었다. 여기에 ‘평온하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

‘헬리콥터에서 보니 평온한 상황이 유지되고 있었고 33, 35대대로부터의 보고도 평온하게 진압해 정상적……’이었다고 증언했었다. 특히 정웅의 증언은 커다란 모순을 지니고 있다. 그는 청문회에서 ‘충정작전 자체가 과잉진압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그의 명령을 받고 18일 출동한 33, 35대대 병력이 시위진압을 어떻게 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19일 오후에야 과잉진압 사실을 알았닥 증언했고, 또 무혈진압 명령을 내린 후 헬기를 타고 확인해보니 평온했다거나, 평온하게 진압했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여기에서 정사단장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에 대해 시민들로부터 어떤 제보나 항의를 받았는지, 또 어떻게 해서 19일 오후 기관장회의에 가서야 과잉진압을 알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윤흥정 계엄분소장은 19일 이미 시민들로부터 숱한 제보와 항의를 받고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정웅은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때부터 광주항쟁 당시 시민을 위해 커다란 역할 한 것처럼 소문나 있었다. 이 때문에 11대 선거 당시 영웅처럼 떠받들어졌었고 13대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국회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그는 ‘광주’에 대해 책임만 있을 뿐 그 엄청난 피해와 고난을 겪은 시민들을 위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음이 국회 청문회에서 정웅 자신의 증언으로 드러났다.


(출처 : 실록5.18 광주민중항쟁 / 김영택 / 창작시대사 / 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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