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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군과 시민군 중 누가 먼저 쏘았는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5월 21일 정오에 도청광장과 금남로 일대를 메운 시위군중이 애국가를 부르자 공수부대가 조준사격으로 군중을 향해 발포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러한 픽션은 이제 5.18측 작가들의 픽션이 그 도를 지나쳐 사악해졌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이것은 너무도 국군의 명예를 훼손하는 장면이기에 많은 관객들이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21일 오후 3시까지 도청을 함락시킨다는 목표를 가지고 도청을 공격하던 시민군이 그 날 애국가를 부른 적이 있는가?  없다. 

집단 발포란 사격 명령이 내려졌을 때 가능한 것이고, 사격 명령이란 사병들에게 실탄이 지급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21일 정오 무렵 도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에는실탄이 없었는데, 사병들에게 실탄을 지급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 군 자위권 발동 이전에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었다는 사실은 시위 현장에서 계엄군의 총기들을 탈취하였던 시위대의 증언으로 명확하게 입증된다. 현장 목격자였던 시민군 최영철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금남로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수차례 반복하다 시민들이 밀고 올라가 가톨릭센터를 점령했다. 유리창을 다 깨고 올라가 무전기와 총을 한 정 뺏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실탄은 없었던 것 같다” (최영철 1988).

그때 무기를 탈취한 과격시위대 중에 김영남도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계엄군으로부터 탈취한 총기에는 실탄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가톨릭센터 앞의 대열에서 우-하는 함성이 들렸다. 뒤돌아보니 시민들이 가톨릭센터 안으로 도망치는 공수부대원들을 잡으려고 따라 들어가고 있었다. 나도 재빨리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겁이 난 공수부대원들은 옥상까지 도망쳤다. 시민, 학생들과 함께 나도 그들을 따라 옥상까지 갔다. 공수부대원 3, 4명이 옥상에 있었다. 우리 시위대들은 공수부대 한 명에게 몇 사람씩 달려 들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M16을 빼앗았다. 옥상 위의 다른 사람들은 총을 빼앗았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총을 한 자루 집어든 나는 계단을 통해 재빠리 건물 밑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총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서 총기를 분해했다. 내 옆에서도 다른 시민 한 명이 총기를 분해하고 있었다. 총기를 자세히 살펴보니 총알도 없고 별 효용이 없을 것 같아 옆에 있던 학생차림의 청년에게 총을 건네주었다 (김영남 1989).

시민군 김준봉도 시민군 장갑차가 구용상 시장이 서있는 임시 단상을 향해 서서히 돌진하기 직전의 시점에도 공수부대 워들 총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30분쯤 지나고 나자 중령이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대표자가 나오시오. 협상을 합시다." 실지 시위대는 비조직적이었으므로 대표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서너 명의 시민들이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당신들에게는 감정이 없소. 길을 비켜주시오." "군인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삽니다. 당신들의 요구대로 길을 터주고 싶지만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명령에 따라 행동하겠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오." 그들은 M16을 차고 있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실탄이 장전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시위대들이 화염병과 돌멩이를 던지면서 소리를 질렀다.
   "와아……." 탱크가 서서히 움직였다. 최루탄이 난사되었다.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김준봉 1989).

광주시민으로서 전경이었던 전경들이 겪은 21일 아침은 어떠하였는지 박시훈이 증언한다:

   새벽이 되었지만 시위대는 끝내 흩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부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새벽 4시까지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며 시위대와 공방전을 벌였다.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고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새벽 4시가 되자 시민들은 귀가하기 시작했고, 도로를 메웠던 많은 사람들은 흩어져 보이지 않았다.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잠을 잘 수 있게 되고, 5시경 뿌옇게 날이 밝았다. 날이 새어 눈을 떠보니 노동청 앞에는 시민들이 악몽같은 얼굴을 하고 벌써부터 모여들고 있었다. 어떤 시민은 돌을 몇 개 던지기도 하고 이상한 짐승 쳐다보듯 충혈된 눈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곤 했다. 그런 와중에도 우리는 조금이라도 더 자두자는 생각으로 꼼짝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어느새 시민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어 우리들에게 돌을 던져댔다. 그때야 모두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박시훈 1989).

그날 오전 11시까지는 시위대 대표 전옥주와 정시채 부지사 사이에 협상이 있었음을 박시훈 전경은 이렇게 증언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칼, 곡괭이, 낫 등을 든 시위대가 위력시위를 벌이며 우리들 앞에 다가왔고, 10시가 되어갈 무렵에는 군용트럭 등을 타고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차량을 탄 시위대는 각목으로 차체를 두들기며 도청 가까이 다가왔다가 다시 물러가는 등 전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18일 당당하게 나타나 자랑스러운 듯 진압을 해대던 공수부대도 시민들의 힘에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는데 시민들이 어느새 공수부대의 트럭이나 철모를 소지하고 다니는 것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정시채 부지사가 나와 여자 한 명과 협상을 한다고 했다. 협상과정에서 11시까지는 시민들과 공수부대간에 소강상태가 지속되었고, 경찰들과는 장난도 하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우리 경찰만 믿고 귀가하십시오."
"너희들이 진정한 광주 시민이라면 경찰복을 벗어던지고 방망이를 공수부대에게 겨누어라."
시위대와 경찰들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대며 다소 완화된 표정으로 대화를 했다. 그러나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다시 쌍방은 대치상태가 되었다. 우리는 협상내용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박시훈 1989).

5・18측의 허위주장으로 와전된 21일 총격전의 진술은 시민군 선제발포였다. 시민군과 계엄군과 기자 등 총격전 현장에 있었던 모든 이들은 한결같이 이것은 시민군이 선제발포하고, 선제공격하여 발생한 총격전이었다고 증언한다.  도청광장에서 총격전이 시작되기 시민군 점령 지역 지원동쪽에서 먼저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선제 발포한 시민군은 그날 오전 화순에서 무기를 탈취해 온 시민군이었다.

집이 조선대 뒷산 중턱에 있던 한일남은 점심식사를 마치자마자 시내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나 볼 생각으로 깃대봉으로 올라갔다. 깃대봉 중턱에 불광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거기서 그는 화순 무기고를 털어가지고 온다면서 산수오거리 가는 길을 묻는 무장괴한 두 명을 만났다:

산 중턱에 불광사라는 절이 있었다.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자기 부인이 열렬한 불교신자이고 또한 초파일이 되어 당분간 절로 피신왔다고 했다. 자기들 말고도 여러 사람이 피신왔다 고 했다. 한 시쯤이나 지났을까? 그 즈음에 젊은 청년 2명이 카빈총을 들고 지원동 쪽 산에서 올라왔다. 그들은 화순 무기고를 털어가지고 온다면서 산수오거리를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는지 물었다. 청년들이 내려가고 약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지원동 쪽에서 총성이 울렸다. 거기를 시발로 해서 도청 앞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꼭 전쟁을 방불케 했으므로 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제각기 집으로 흩어졌다. 그날 저녁 밥을 먹는데 어찌나 떨리던지..... (한일남 1989).

김영택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는 1988년 광주청문회 때 시민군 총성이 먼저 울렸다고 증언하였는데, 이렇듯 한일남의 증언도 그 사실을 확증하여 준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장면과 같은 집단 발포는 없었으나, 12시 58분에 먼저 시민군 진영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자 1분간 공포탄을 발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무엇이 공포탄으로 사용된 그 실탄의 출처였는가? 그 실탄의 출처는 31사단(일명 광주향토사단) 96연대 1개 소대를 인솔하던 한동석 중위 일행이MBC방송국 경계근무를 위해 소지하고 있던 실탄이었다. 물론, 그 실탄은 인마살상용 실탄이 아니라 경계용 실탄이었다.

5월 20일 저녁 9시경의 MBC방송국 방화사건은 공교롭게도 한동석 중위 소대가 불타는MBC방송국에서 비상탈출하여 도청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음날 낮 12시경 헬기로 31사 병력, 즉 그의 소대만 철수할 때 그의 소대가 소지하고 있던 실탄을 7공수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광주 MBC방송국 앞에서 수만 명의 성난 시위대가 "방송국 안에 군인이 있다!" "계엄군 죽여라!"라는 함성을 질러 나갈 수도 없고 건물 내부로 번져 올라 오는 화염과 연기 때문에 안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은 사면초가의 상황이요, 죽음이 눈앞에 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이끈 일개 분대는 일층과 이층 사이를 막으면서 방송국 직원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용산참사에 견주어 그 상황을 생각해 보라. 만약 한동석 중위 일행이 끝까지 경계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면 그날 수많은 MBC 직원들이 불타는 건물로부터 대피할 기회를 놓쳤을지 모른다. 그리고 화마가 부하들을 삼키기 전 황급히 방송국 높은 담을 넘어 구사 일생으로 비상 탈출을 하였을 때 구조해 주려 하기는커녕 "계엄군 죽여라"를 외치는 시위대를 피해 무등산으로 갔다가 다시 도청으로 가 밤을 새고, 21일 오후 1시경 31사 헬기로 탈출하기 직전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에 미안함을 느끼며 자신의 탄통을 전달해 주었던 것이다.

그 탄통은 봉인된 탄통이었다.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의 한동석 중위 소대가MBC방송국 경계 근무에 배치된 날자는 5월 14일이었으며, 불타는 방송국으로부터 비상탈출하기까지 한 주간 그는 그 탄통을 보유하고 있었다. 상부로부터 실탄 분배 지시도 사격 명령도 없었으며, 그 실탄은 여전히 봉인된 탄통 속에 있었음을 한중위는 이렇게 증언한다:

군인이 실탄을 사용할 수 있는 요건에는 평소에는 사격 훈련목적으로 사용하는 교탄(교육용 실탄)을 사용할 때에도 사격통제관의 통제에 따라서 사용을 할 수 있읍니다. 경계용 실탄 역시 봉인된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가 엄중한 통제권자의 통제에 따라서 사용하게 되어 있읍니다. 사격명령을 내리기 전에는 반드시 '실탄 분배 지시'가 이루어 진 후에야 발포가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저희 부대도 MBC방송국에 출동할 때에, 비록 경계용 실탄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실탄 분배 지시'도 '사격 명령'도 상부로부터 지시를 받지 못했읍니다. MBC방송국에서 탈출할 때에도 그렇게 위급한 상황이였지만 어쩔 수 없이 명령을 받지 못했기에 소대장의 '단독판단'으로 저와 병사들의 생명을 위해 '도피 및 탈출'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비록 정식 철수 명령은 받지 않았지만 추후에 곰곰히 생각해 보면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자위합니다. (지금도 나의 휘하에 있었던 병사들은 정상적인 철수 명령을 받고 철수 한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상부로부터 '자위권 발동 명령'을 받은 것은 5월 21일 오후 늦게 담양부대에 복귀해서 지시를 받은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특별한 지시가 없는 한 장교라도 실탄을 개인적으로 보유할 수가 없었읍니다. (경계용 실탄도 20발 들이 탄창에 15발씩 장전하여 청테이프로 봉인한 후에 다시 탄창을 탄통에 넣고 봉인을 하고 있었읍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한동석 2007.07.21 22:22)

광주청문회 때 가장 중요한 이슈는 발포 명령자가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광주사태 유언비어를 맹신하는 쪽에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공수부대에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입증하여야 했다. 당시 유언비어를 퍼뜨리던 사람들은 전두환을 공수부대 대장으로 잘못 알고 있었기에 이것은 처음부터 입증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운동권 출신 의원들에게는 이것이 그들의 정치 생명이 걸려있는 싸움이었다. 그들은 먼저 5월 21일 발포명령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여야 했고, 그러려면 먼저 그날 실탄 분배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여야 했다.  그래서 1988~89년의 광주청문회 때 이것이 가장 뜨거운 이슈였다.

광주사태 이후 광주운동권으로 등장한 김영진은 광주청문회에서 모든 것이 밝혀졌다며 5・18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5・18 진영의5・18 연구가들조차도 도대체 무엇이 밝혀졌다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正史5・18』이 실탄 분배 증거라며 내놓는 아래의 청문회 기록은 사실 초라하기까지 하다:  
 
• 장석화 의원=(안부웅 증인에게) 『월간조선』 88년 7월호 조갑제 기자의 2백2페이지에 있는 내용에 보면 오후 2시께(실제 발포시간과의 차이는 착오에 의한것이다. 편집자)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조선대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이것을 수령했었다. 이렇게 기록돼 있는데 증인은 왜 사실과 달리 얘기 합니까.
• 안부웅 증인=그 내용이 달리 나왔는데. 31사단 경계병력이 가지고 있던 실탄을 얻은 것입니다.
• 이인제 의원=여기(인터뷰기사) 보면 11여단은 여단에서 실탄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렸을 때 11공수의 실탄이 헬기로 실려가지고 와서 예하 장교 하사관들에게 분배된 것입니다. 그것은 증인이 부정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조갑제 기자와 대대장(안증인)이 시인해 주고 있으니까. 이것을 보면 판단이 그래요.
• 이해찬 의원=실탄인수인계에 관해서 좀더 확실히 할 기회가 없었습니까.
• 임정복 증인=그때 당시의 지휘관이었던 31사단 96연대 1대대장 이용덕 중령하고 96연대 작전장교를 했던 홍 대위를 만나서 확인하니까 철수 할 때 실탄 2박스(1천6백 발)를 어느 소속 공수부대인지는 몰라도 인계해주고 철수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광주매일 『正史5・18』 1995, 322-323).

위의 광주청문회 기록에서 보듯 통일민주당과 평민당 의원들이 실탄 분배 증거물이라고 내놓는 것이 고작 『월간조선』 1988년 7월호에 실린 조갑제 기자의 기고문이었다.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라는 제목의 이 기고문 202쪽에서 조갑제 기자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당시 11여단의 한 대대장은 『우리 대대는 실탄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대장이 갖고 다니는 경계용 실탄조차 조선대학에 두고 나왔었다.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조갑제 1988:202).[1] 여기에 누가 어디서 누구한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다는 것인지의 문제에 대한 혼동의 소지는 있다.  즉, 이 문장은 실탄의 출처가 어디이며, 누가 실탄 전달자이며, 누구에게 실탄이 전달되었다는 것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독자들에게 말해 주지 않는다.

광주청문회 때 안부웅 증인을 심문하던 의원들은 안부웅 증인이 바로 조갑제 기자가 그 해 월간조선 7월호 기사를 위해 인터뷰한 그 대대장이라는 사실조차 모른 채 억지 심문을 하였다.  장석화 의원은 문제의 이 문장을 말을 약간 바꾸어 “오후 2시께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조선대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는 말로 표현하며 안 증인을 심문하였다 (광주매일 『正史5・18』 1995, 322-323). 그 이래로5・18측은 조선대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31사단 헬기가 가져왔다고 전제하고 실탄의 출처를 밝히며 설명하려 했다. 이렇듯 광주청문회 논리, 5・18 재판 논리는 처음부터 잘못된 전제, 거짓 전제 하에 출발하였다.

5・18측이 이런 거짓 전제를 선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광주사태 당시 31사단 사단장이 광주청문회 당시 김대중의 오른팔이었던, 즉 광주 국회의원이었던 정웅이었다. 문제의 조갑제 기자의 글을 장석화 의원처럼 31사단 헬기가 실탄을 싣고 왔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김대중 정당 소속 광주 국회의원 정웅이 바로 공수부대의 실탄 출처가 된다. 그러면 이것은5・18측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 명제의 귀결은 김대중 세력이 광주사태의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5・18측은 조갑제 기자의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원문에 없는 말 (조선대에 보관하고 있던)을 슬쩍 끼어넣는다.

그러나,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조선대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는 명제는 하나의 픽션 소설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엄연한 거짓 전제이다.  그리고 이런 거짓 전제 하에서는 실탄 출처가 영영 밝혀지지 않는다. 우선 31사단 헬기가 조선대로 갔었다는 사실 입증부터 불가능하다. 한 대의 헬기가 31사단 1개 소대 병력을 철수시킬 시간적 여유는 많지 않았다.  더구나 여러 차례 먼저 공수부대 및 시민군 응급환자들부터 수송하여야 했다.  그 헬기를 조선대로 보낸 명령자를 찾아내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다.  31사단 헬기가 조선대로 간 적도 없고, 가서 11공수 대대장의 경계용 실탄을 가져오라고 명령을 내린 사람도 없는데 그 명령자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한가?  그러기에 5・18측이 이런 거짓 전제 하에서 출발하는 한  5・18은 영구적으로 미결 과제로 남을 것이다.

거짓 전제 하에서 출발한 자들은 아직껏 발포 명령자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한탄을 되풀이한다. 거짓 전제 하에서 출발하는 하는 자들의 행동의 귀결이 무엇인가? 노무현의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에 명패 던지기이며, 영화 “화려한 휴가”같은 허구 만들기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5・18측이 거짓말에 거짓말을 덧붙인다 하더라도5・18은 영영 미결 과제로 남을 것이다. 이것이 거짓말의 한계이다. 그리고, 그 한계는 김영진이  5・18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였다고 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1사단, 즉 광주향토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올 리도 없고, 갖고 오지도 않았다. 단지 그 부대 소속 한동석 중위가 인솔하는 소대 철수를 도우려 왔던 것이며, 한 중위는 자기가 소지하고 있던 실탄 2박스를 7공수 군수장교에게 주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그 실탄 수는 광주매일 기자들이 침소붕대하여 오보한 1천6백 발이 아니라, 2백 발이었다.

5・18측 허위사실 유포의 결정체로서의 영화 ‘화려한 휴가’가2007년 상영되기 시작하였을 때 그 실제 사건의 회오리 한 가운데 있었던 장본인, 즉 공수부대에 전달된 실탄의 주인공이었던 한동석 중위는 27년간의 오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저는 그 당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의 한동석 중위입니다. 80년 5월 20일 밤 9시 30분경에 시위대의 방화로 불타오르고 있는 MBC방송국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당시 향토사단 군인 소대장입니다" MBC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비상 탈출하여, 밤 11시경부터 다음 날인 5월 21일 '도청 발포사건' 직후까지 (불행 중 다행으로 도청광장에 공수부대와 같이 포위 되어 있었던) 도청광장에 있다가 오후 1시 반경에, UH-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으로 철수했던 장본인입니다. 헬기로 철수작전하기 전에, 5월 20일 밤까지 MBC방송국과 기독교방송국, 전일방송국(?)에 배치되어 있었던 3곳의 경계용실탄 3탄통(한 탄통 안에는 M-16소총 20발 짜리 탄창에 15발씩 장전되어 있었음)을 제7공수 *** 대위님께 전달하고 철수했던 바, 도청 광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27년 전에 발생한 그 상황의 진위를 가리는데 한 가닥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752484 댓글 한동석2007.07.31 10:45).

한동석 중위가 인솔하는 소대에 경계용실탄 3탄통이 있었던 이유는 그의 소대가 3개조로 나뉘어 MBC방송국과 기독교방송국 등 3개 방송국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엄군 죽여라”를 외치는 군중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군인들에게 5월 20일 밤부터 광주는 이미 전쟁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의 소대가 도청을 그 날 밤의 도피처로 삼게 되었는가? 한 중위가 그 우여곡절을 회상한다:

어떻게 글로 설명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전쟁터라고 생각하시는 게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50월 20일 밤 상황은 시민들한테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챙피스러운 이야기지만, 무기로 시민들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무작정 돌과 화염병을 맞을 수도 없고, 외부에서 지원병력이 시내로 들어올 수도 없이 고립이 된 상황인데, '귀가'라니요! '야영' 잠을 잘 수가 있나요?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는 데... 오죽하면 저가 단독으로 MBC방송국에서'탈출을 결심'하고 무전기까지 끄고 병력을 인솔하는데 방향만 무등산 쪽으로 향했겠습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광주 경찰서(?) 까지 1차 탈출에 성공하여 잠시 쉬고 있는데, 뒤를 돌아 보니 MBC 방송국 건물과 옆의 병원 옥상까지 불길이 완전히 쌓였던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전병이 실수로 무전기를 개방하여 교신하는 과정에서 2소대(분대병력)와 3소대(분대병력) 가 안전한(공수부대가 집결되어있었음) 도청광장으로 먼저 대피를 하게 되었고, 저희 병력은 경찰서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무기와 실탄만 챙겨서 무등산 방향으로 2차 탈출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2,3소대 병력을 만나게 되어서 선임 소대장인 저가 96연대 1대대 소속 3개팀(선임소대장 저를 포함하여 두 명의 소대장'중위 & 소위')을 재편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자정 무렵(5월 21일 0시) 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영화에도 나오는 젊은 여성의 선무방송은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 입니다.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의 엠프 방송) 장교인 저도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어서 40여명의 병사들은 도청 별관 복도에 가면(쪼그려 앉아서 잠시 눈을 붙이는 정도의 수면 상태) 하도록 지시하고 장교 두명과 함께 교대로 도청 광장을 살피면서 밤을 새우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인데. '귀가' '침구' '야영' 그것은 사치스런운 이야기지요 (http://blog.daum.net/sionvoice/10752484 댓글 한동석 2007.08.08 20:09).

난동자들이 각 방송국 건물에 방화한 사실을 감추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21일의 총격전으로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한 바로 그 다음날 시민군 인봉이 TV에 계란을 던진다. 이 영화에서 방송국 방화라는 엄청난 사건을TV에 계란을 던지는 것으로 축소시킨다. 이렇게 사건 전개 순서를 바꿀 때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난동자들이 방송국 방송 장비와 건물을 불태웠을 때 방송이 중단되어 광주시민들이 더 이상TV 시청을 할 수 없게 된 것이 실제 역사였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22일 시민군이 도청에서TV 시청을 할 때 이것은 영화 제작자와 배우 모두 역사 치매증에 걸렸음을 반증한다. 어떤 사건이 먼저 발생하였는가? 20일 방송국 방화 사건이 먼저 있었다. 그때 비상탈출한 한동석 중위가 그날 밤 도청 안으로 피해있다가 그 다음날인 21일 오후 1시경 31사 헬기로 탈출하면서 7공수 군수장교에게 전해준 것이 도청 앞 공수부대 실탄의 출처였다. 그리고 그 세 통의 실탄은 그의 소대가 MBC 와 KBS와 기독방송 등 세 방송국 경계근무를 위해 14일부터 소지하고 있었던 실탄이었던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 관객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스토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5・18측이 숨기고 감추는 사건들이 있기 때문이다. 5・18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5・18측이 은폐하는5・18 사건들이 있다. 이렇듯 5・18 사건이 한편으로 자국민을 상대로 할 때는 그 치부를 은폐하기에 급급한 사건이었을진대, 다른 한편으로 그 치부를 가짜로 포장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행위는 실로 자기 모순이 아니겠는가. 영화 ‘화려한 휴가’는 어떻게 하여 21일 정오 무렵에 공수부대가 도청 앞에 있게 되었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이 21일 하늘에서 뚝 떨어졌는가? 아니면 땅에서 솟아났는가? 그 날 그들은 어디서 왔는가?  그 날 그들이 도청 앞으로 출동하였는가? 아니다.  전날부터 식사도 전혀 못하고 잠도 전혀 자지 못한 그들은 “계엄군 죽여라”를 외치는 폭력시위대에 포위되어 있었다. 왜 그들이 폭력시위대였는가?  공수부대원과 전경들을 차량 공격으로 깔아 죽인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차량 공격으로 깔아 죽이는 시위를 그 누가 평화시위라고 부르는가?  세무서와 방송국 등에 불을 지른 수만 명의 시위대에 겹겹이 포위된 군인들에게 임시 숙소인 막사로 갈 퇴로가 없었다.

그 방은 고요한 밤이 아니었다. 실탄을 7공수에 인수인계해 주고 31사 헬기로 철수하기 전 한동석 중위의 소대는 도청 별관 건물 내부에 있었다. 그 이유는 전옥주의 선무 방송이 병사들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편이 벌벌 떨며 잔뜩 겁을 먹고 있었는가?  군인들이었다. 한 중위는 자기 소대를 도청 별관 건물 내부로 이동시키게 된 경위를 이렇게 증언한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은 엠프 선무 방송은 시위대의 함성(수만 명)과 함께 울려서 뚜렷하게 서술은 할 수가 없지만 투항하라는 식은 분명했습니다. 그 당시 계엄군이 포위 되었다(퇴로가 차단 된 상태를 의미함)는 사실은 그 현장(도청 중심 1-2 Km 반경) 주변에 있던 시민들은 모두 알고 있는 상태지요.  그렇게 밤새도록(새벽 3시 이후- 6시까지 잠시 소강상태)집요하게 밀어붙였던 군중들이었으니깐요. 극소수의 사람들은 어떻게 5월 27일 새벽 도청 재 탈환시에 계엄군이 '투항'을 권유해도 끝까지 저항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계신 분도 있지만, 저는 그날 밤 그 상황을 몸소 격은 당사자로서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선무 방송 내용을 정확히 기억을 해 두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아무튼, 너무나 충격적이었던 건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병사들이 동요할 까 걱정이 되어서 잘 들리지 않는 곳(도청 별관 건물 내부)으로 병력 이동을 지시 했습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752484 댓글 한동석 2007.08.09 09:32).

한동석 중위는 헬기로 철수하는 순간 왜 자기 소대가 보유하고 있던 실탄을 7공수 병참장교에게 건네주었는가? 그것은 무방비 상태로 사지에 남아있는 공수부대원들에게 자기방어 수단이 필요할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이 한 공수부대원에게 가슴 큰 아가씨를 소개해줄까 하며 농담 거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 농담에 시위군중과 공수부대 양편이 박장대소한다. 그것이 실화인가? 아니다. 실제 사건 분위기는 몹시 살벌하였다. 또 한 명의 공수부대원이 시민군 장갑차에 깔려 죽기 직전 한 공수부대원이 시민군 화염병에 맞아 온 몸이 화염에 쌓인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을 한 중위가 이렇게 증언한다:  

그 직전 까지는 맨몸으로 인간 바리케이트를 치고 (대형을 갖추고 버팀) 밀집된 대형의 앞이 보이지 않는 관계 (키가 큰 장병이 앞에 선두에 서고 키가 작은 장병은 후미에 섰기 때문에) 후미에 서 있던 공수부대 장병들은 날아오는 화염병을 볼 수 없기에 피하지 못하고 철모에 화염병이 맞아서 순식간에 머리부분부터 몸 전체로 화염에 쌓이는 처참한 광경도 목격하면서 분개했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밀집대형을 유지를 하지 않고 방어를 했더라면 하는 (전술상) 어처구니 없는 생각까지 해보기도 했답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752484 댓글 한동석 2007.08.03 10:47).

박시훈 전경도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12시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서술한다:

12시가 되면서 양측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시위대는 주로 차량을 타고 왔다갔다하면서 돌을 던지고 화염병도 간혹 던지는 상황이었다. 공수대원과 경찰병력은 도청 분수대 일부분만을 겨우 지키고 있었고 시위대는 전일빌딩 앞과 전남매일신문사 입구, 노동청 입구까지 접근해 왔다. 시민들이 타고 다니는 차량 중에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낸 차량 2대도 목격할 수 있었고, 광주의 시민들은 마치 금남로로 집결하기로 약속이라도 한 듯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는 시민들 의 숫자가 10만 명에 육박할 거라 생각하며 서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장갑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면서 쏜살같이 분수대 앞 공수대원들의 봉쇄망을 뚫고 수협을 지나 전남매일신문사 쪽으로 통과했다 (박시훈 1989).

이어 시민군 APC장갑차에 군인이 압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는데, 시민군 이수범에 따르면 그 시간은 오후 1시 30분이었다:

시민 대표가 공수대들에게 시간 제약을 주며 퇴각할 것을 요구하자 군인 중령이 나와 말했다.
"상부에 연락을 취해 곧 나가도록 해보겠다."
그런데 12시 30분이 되었는데도 움직일 기세가 보이지 않자 시위대 측에서는 다시 요구를 했다.
"왜 약속을 해놓고 물러가지 않느냐. 빨리 물러가라."
그렇지만 오후 1시가 되었는데도 공수부대는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위대 측에서는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니까 예의 그 중령이 다시 나와서 말했다.
"상부에서 아직 연락이 안 와서 그러니 조금만 기다려달라. 늦어도 1시 30분까지는 나가겠다."
그 뒤부터 시위대 쪽에서는 시간별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너희들 물러날 시간이 10분 남았다. 5분 남았다." 하면서 계속 시간을 알려주었다.
그러는 도중 시민 쪽에서 가지고 있던 APC 장갑차 한 대가 군인들 쪽으로 달려 갔다. 그때 공수부대원들은 2열 횡대로 해서 YMCA 앞 횡단보도를 중심으로 우리와 마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갑차를 몰고 가니 미처 피하지 못한 군인들이 몇 명 치어버렸다. 그때 한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이 부상을 당한 걸로 알고 있다. 그 일이 있고 나자 공수부대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시간이 오후 1시 30분이었다. 내가 왜 그 시간을 기억을 하냐면 우리가 계속 시간 카운트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계를 보면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군인들이 조금씩 물러나가니까 시민들은 왕창 밀어버렸다 (이수범 1989).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을 깔아죽인 사건 발생 시간에 대하여 시민군 이수범의 증언과 검찰측 자료, 즉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 사이에 30분의 간격이 있다.  1995년의 이 조사보고서는 그 시각이 13시경, 즉 오후 1시경이었다고 이렇게 기록한다:

13시경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는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하자,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死亡하였고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0:150).

앞에서 시민군 이수범이 언급한 중령은 안부웅 중령이다. 1995년 2월13일 국방부 검찰부 고등검찰관실에서 광주사태 당시 11공수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은 그 사실을 이렇게 진술한다:

-12시 넘어서의 상황을 진술하시오.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와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8:88).[2] 

기자와 시민군과 계엄군 등 현장에 있던 모든 이들이 그렇게 증언하듯이 안부웅 중령 역시 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음을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라는 말로 증언한다. 즉, 시민군 장갑차가 군인을 깔아 죽이던 바로 그 찰나에 시민군 진영에서 총성이 울렸다. 어째서 시민군 진영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시민군 장갑차가 돌격하였을까?  최초의 시민군 총성은 시민군 장갑차 돌진 명령 신호탄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시민군 장갑차가 권용운 상병을 깔아죽인 사건은 정확하게 낮 12시 59분이었으며, 그 장갑차는 앞이 뾰족한 장갑차였음을 김영택 기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극히 순간적으로 전개된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숨돌릴 틈도 없이 눈 깜짝하는 사이인 낮 12시 50분, 아시아자동차에서 빼앗은 앞이 뾰족한 장갑차 1대가 전속력으로 질주해 들어왔다. 수협 전남지부 앞에 서 있던 공수부대원들은 급히 피했지만 미처 물러나지 못한 2명이 이 장갑차에 치이는 바람에 권용운 상병은 즉사하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 (김영택 1996, 109-110).

안중령은 최초의 총성이 울리기 직전 시민군들의 차량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고 했다. 사실인가? 재수생 시민군 윤석진은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오후 1시 정도 되자 우리는 금남로 5가에서 모두 내렸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 나는 힘들게 가톨릭센터 맞은편 지 화도까지 올라왔다. 공수들이 도청 분수대를 중심으로 전일빌딩과 수협 앞주변으로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골목골목에 서 있었다. 시민들은 투석전을 벌이다가 도청을 밀어 버린다고 군용트럭을 끌고 나왔다. 군용트럭 적재함에 휘발유를 부어놓고 고무줄을 잡고 내려옴과 동시에 적재함에 불을 붙였다. 불이 붙은 채 관광호텔 앞가지 잘 갔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그러나 은행나무를 들이받고 그곳에서 타버렸다. 다음에는 불도저에 시동을 걸어 같은 방식으로 보냈다. 불도저도 가톨릭센터 앞 지하도 공사장에 거꾸로 빠져 버렸다.그때 느닷없이 총성이 울렸다 (윤석진 1989).

한동석 중위가 들은 최초의 총성은 단발성으로 2~3회 울렸다. 그 총성은 상무대에 소재한 31사단(광주향토사단)에서도 들리는 총성이었으며, 총소리에 놀란 31사 대대장이 한 중위에게 전화를 건 것이 헬기를 보내31사 소대 병력 철수를 도와준 계기가 되었다. 그 사실을 한 중위가 증언한다:

저의 기억으로는 단발성으로 2-3회인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총소리는 아주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에 그 당시 위급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려웠던 상황에서도 총기를 사용한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었지요. 하지만 한번 총성이 울리고 나니까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엉망이 되고 말더군요. 그 때까지 저는 외부와 차단(MBC 방송국과 도청광장에만 포위되어있던 상황) 되어 있는 상황의 연속이어서 도청 광장 바깥 상황은 전혀 몰랐지요. 그래서 공수부대의 장갑차 두 대 중 한대는 시위대의 화염병 공격으로 소실되어 기능이 마비되고, 그 반대 쪽이 있던 다른 한대의 장갑차 해치에서 캘레바 50(대공화기)이 공포로 불을 뿜었습니다. 소리도 굉장히 크게 울렸지요. 저도 처음 들어보았지요. 그래서 저는 데모대가 해산 될 줄 알았습니다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까 시위대도 이미 무장이 되어 있었기에 시위대가 해산 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막 바로, 대대장님께서 바로 무전기로 "무슨 총소리인가?" " 피해 사항은 없는 지?" 무전이 와서 상황보고를 하고 난 후에 약 20분 후에 헬기가 지원 되어 도청 광장에 착륙하였으나. 공수부대 병력과 시위대의 위급한 환자부터 수송하느라 수 차례 양보했다가 겨우 탑승하여 도청광장에서 이륙하여 사단 연병장으로 이동했습니다. 공중에 올라가서 시내를 내려다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도청을 에워 싸고 있다니...(http://blog.daum.net/sionvoice/10752484 댓글 한동석 2007.08.06 18:48).

이렇듯 31사 96연대 소대 병력을 철수시키러 온 헬기는 바로 31사 병력을 철수시키지 못하고 응급환자 수송을 몇 차례 하여야 했다. 전날 밤 전경 4명을 죽여 놓고도 병원으로 후송도 못하게 했던 시위대와 달리 군인들은 시위대의 위급한 환자들도 헬기로 후송해 주었다. 그리고 겨우 탑승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동석 중위는 순간적으로 그의 소대 실탄 탄통을 7공수 병참 장교에게 넘겨주었다. 아마 여기에는 공수부대를 사지에 남겨놓고 보병부대만 철수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작용하였던 듯하다. 무엇보다도, 총을 쏘고, 화염병을 던지며, 장갑차와 트럭과 버스로 들이받고 깔아 뭉길 기세로 마구 돌진해 오는 시민군 앞에서 무방비 상태인 특전사 병력에게 최소한의 방어 수단이 필요할 거라고 직감하였기 때문이다. 먼저 철수하는 보병부대에 탄통이 있는 것을 본 7공수는 그 탄통을 넘겨달라고 했고, 한 중위는 기꺼이 얼른 넘겨주었다. 한 중위는 상부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런 극한 상황에서의 자기 판단에 따라 탄통을 넘겨준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7공수 외는 저가 잘모르지만 7공수는 실탄이 없었기에 철수하는 저희 병력에게 를 요구하지 않았겠습니까? 자기도 실탄을 보유하고 있는 데 다른 부대에게 실탄을 요구하는 경우는 어떠한 경우라도 없을 테니깐요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한동석 2007.07.23 10:08).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 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 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시위대가 순간적인 기습 공격으로 인간 바리케이트 방어대형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대형 트럭의 질주 '공격'로 대기 중이던 대형이 각자 흩어져서 (도청 정문을 통해 내부로) 부대를 재정비하는데 지휘자들은 정신이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한동석 2007.07.23 15:52).

31사 헬기가 도착하였을 때 안부웅 중령은 몹시 반가와 했었다. 11공수여단 참모장이 무전으로 지시하기를 ‘20사단과 교대할 예정이니 헬기장을 확보하라’는 말을 하여 그가 ‘상무관 앞과 도청 옥상은 헬기가 착륙할 수 있다. 염려 말고 교대병력을 보내달라’고 한 뒤 교신을 끝내자마자 헬기가 도착하여 벌써 교대병력이 온 줄로 여겼기 때문이다. 5・18측에서 공수부대 집단발포라고 주장하는 이 사건 전개과정의 전후관계를 부연하여 설명하면 시민군 기관총이 헬기를 향해 발포하였으므로 교대병력은 끝내 오지 못한다.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 중 전남도청 발포 부분은 시민군 대공 사격으로 교대 병력이 올 수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14시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放送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戰敎司로 복귀한 61연대장은 戰敎司에 병력 교체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고했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0:154).

가뭄에 벼가 타 들어갈 때 농부가 애타가 단비를 기다리듯 안부웅 중령이 언제 올지 모르는 (사실상 오는 것이 불가능했던) 교대 병력을, 11공수를 철수시켜줄 헬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착륙한31사단 헬기가 달랑31사 병력만 철수시켰을 때 그는 야속하게 여겼다. 한동석 중위도 자기네만 철수하는 것이 너무도 미안해 7공수에 60발씩 들어있는 실탄 3통을 넘겨주었다. 7공수 병력은 그 중 몇 발을 안 증령의 11공수 61대대 병력에도 나눠주었다.  안 중령은 한 중위의 소대가 헬기로 철수한 직후 그의 부하들이 실탄을 습득한 사실을 알게 되었음을 이렇게 진술한다:

-참모장과 헬기 착륙 여부에 대한 교신이 끝난 뒤 상황을 설명하시오.
“교신이 끝난 뒤 조금 있으니 UH-1H 헬기가 상무관 앞에 착륙하길래 제가 벌써 교대병력이 왔나 하고 살펴보니 상무관 앞 쪽에서 일반 보병부대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헬기 쪽으로 뛰어 가서 탑승을 했습니다. 제가 주위 병사들을 보고 ‘저 병력은 뭐지?’ 하는 동안 헬기는 이륙했는데, ‘그 병력은 31사단 병력인데 MBC 방송국을 경계했던 병력이랍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배속받은 병력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식만 챙기는 놈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대대장님! 병사들이 31사단 병사들로부터 실탄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제가 ‘그러면 안되는데, 병사들이 실탄을 가지면 안되고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이 휴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병사들이 진짜 실탄을 얻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저도 너무 피곤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제가 병사들이 실탄을 얻었는지, 그리고 병사들에게 배분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책입니다. 당시는 병사들이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실탄을 얻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31사단 병력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쉬고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갑자기 총소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제가 ‘뭐야’하고 일어나서 보니까 분수대 옆 충장로 쪽으로 시위대 버스 1대가 저희 병력을 덮쳤습니다. 당시 저희 병력들은 쉬느라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때 버스가 달려드니까 누군가가 버스를 향해 사격을 한 것입니다. 버스는 사격을 받고 분수대에 부딪친 뒤 방향을 바꿔 충장로 쪽으로 가다 담을 들이받고 정지했습니다. 이때 관광호텔 쪽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동시에 계엄군을 향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8:89-90).

당시 11공수는 31사단에 배속되어 있었기에 11공수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이 이륙하는 헬기를 바라보며 ‘배속받은 병력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식만 챙기는 놈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동안 헬기 안의 31사단 병력의 가슴 속에는 안도감과 미안함이 교차하고 있었다. 철수를 못한 특전사 병력에게 실탄이라도 전달해 주는 것이 하룻밤 생사고락을 같이한 전우에 대한 도리라 여겼기에 헬기가 이륙하기 직전 탄통을 넘겨준 당시 심정을 한동석 중위는 이렇게 회고한다:

저가 5월 21일 오후 2시경 헬기를 타고 도청 광장을 이륙해서 시내를 내려다 보면서 개미떼 같이 작게 보이는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해 있는 광주 중심지를 하늘로 날아서 탈출할 수 있다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을 지금 연출 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 했으며, 하루 밤(5/20)을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특전사 병력에 대하여 어찌니 미안한지... 눈물을 쏟고 말았다. (마음 속으로 혼자 도망가는 배신자 같은 죄스러움)병력이 많으니 헬기 수송작전은 불가 할 것이고 퇴로를 개척해서 무등산 쪽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위안을 삼은 것은 저가 전달해준 '3 탄통의 실탄'이 있으니 퇴각하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추측하건대 시위대가 주장하는 5월21일 "도청앞 집단발포" 에 저가 전달한 실탄이 사용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되네요. 송구스럽기 그지 없네요. 이미 총소리가 난 상황에서 31사단 병력(40 여명)은 헬기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특전사 병력도 막 바로 철수작전에 돌입하진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한동석 2007.07.12 11:53).

모든 증언이 한동석 중위와 안부웅 중령의 증언이 진실임을 뒷받침한다. 시민군 옹호 일색의 보도를 해온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조차도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경 시민군과 계엄군 양편 진영에서 거의 동시에 총성이 울린 것은 분명한 사실임을 광주청문회 때 못박아 증언하였다. 1989년 1월 26일의 청문회 때 김 기자가 한 증언을 그 날 저녁의 MBC뉴스에서 김석진 기자는 이렇게 요약 보도한다: 

김영택 씨는 이에 앞서 관광버스가 돌진해오기 직전 시위대가 탄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었으며 이 때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영택 씨는 이처럼 낮 12시58분 공수부대가 첫 집단 발포하는 순간 시위대 쪽에서 다른 총 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시위대도 함께 발포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미 오전 중에 시위군중이 카빈총을 들고 간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오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임정복 당시 31사단 보좌관, 즉 김대중의 평민당 광주 국회의원 정웅의 사단장 시절 보좌관 역시 실탄의 출처는 정웅 휘하의 31사단이었음을 명쾌하게 증언한다. 같은 날 뉴스에서 김석진 기자가 그의 증언을 이렇게 인용한다: “두 번째 증인으로 나온 임정복 당시 31사단 보좌관은 5월 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할 때 실탄 두 상자를 공수부대에 인계했으며.”

여기서 『월간조선』 1988년 7월호에 실린 조갑제 기자의 기고문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202쪽에 있는 문제의 문장을 다시 살펴보자: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 (조갑제 1988:202). 이 문장은 독자에게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혼동을 준다.  “31사단 헬기가 실탄을 갖고 왔었다”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헬기가 착륙한 후 누군가가 경계용 실탄을 전달해 주었다”의 의미도 이해될 수도 있다. 만약 조 기자가 후자의 의미로 쓴 문장이었다면 사실과 상당히 부합한다. 31사단이 보낸 병참지원 병력이 아니라, 31사단으로 철수하는 31사단 96연대 1대대 1개 소대 병력이 철수할 때 그들의 실탄 [두] 세 상자를 7공수에 인계하였다.

31사단 헬기로 실탄을 실어왔다는 5・18측 주장은 픽션소설 소재도 될 수 없는 이유는 몇 발이나 헬기로 실어왔느냐의 문제에서 말문이 막히기 때문이다. 몇만 발 실어다 주었다고 거짓말할 수 있는가? 제 아무리 거짓말로5・18 논리를 집대성하여도 이것이 5・18측 허위주장의 한계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의 장면처럼 도청광장에서 공수부대가 많은 양의 실탄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하며 공수부대로 넘겨진 31사단 실탄 수는 200 여발 정도였다. 그 사실을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 중 전남도청 발포 부분은 이렇게 밝힌다: “그 무렵 방송국 등의 警戒任務를 수행하다가 전남도청으로 철수해 있던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병력이 師團으로 철수하면서 경계용 실탄 200여 발을 7공수여단 35대대 군수장교의 요청에 따라 공수부대에게 넘겨주어, 35대대 장교들도 1인당 10발 정도의 실탄을 분배받았음”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0:151).

사병들은 실탄을 분배받지 못하고 장교들만 10 발 정도씩 분배받았다. 사격 명령은 사병들에게 실탄이 분배되었을 때 가능한 것인데, 전 무장시민군에 실탄이 분배된 시민군의 경우와 달리 공수부대 사병들은 실탄을 분배받지 못했다. 따라서, 발포 명령이 가능할 수도, 영화 ‘화려한 휴가’의 장면처럼 집단 발포가 있었을 수도 없었다. 31사단 96연대 1대대 선임소대장으로서 자신이 7공수 35대대 군수장교에게 넘겨준 실탄은 참으로 200 여발이었음을 한동석 중위가 이렇게 명쾌하게 증언한다:

3탄통의 실탄은 저희 대대(담양)에서 출동할 때(5월 중순경) 소대장 3명과 30여명의 병력이 3곳으로 나누어서 광주 시내에 를 띠고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MBC 방송국, 그리고, 전일방송국 & 기독교 방송국에 *중위와 *소위가 배치되면서 경계용실탄 1탄통씩 보유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저희 병력이 5월 20일 밤 9시 반경에 MBC방송국에서 비상탈출할때 실탄과 소총만 휴대하고, 긴급하게 나와, 우여곡절 끝에 XX경찰서을 잠시 경유한 후에 무등산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우연히 도청 광장에서 먼저 철수한 *중위와 *소위를 만나 저희 부대원 전원(장교 3명 & 30여명의 병사)이 합유하게 되어서 각각 보유하고 있던 실탄을 합한 것이 모두 3탄통이 된 것입니다. (그 3탄통의 수량이 약 200 여발 정도 될 겁니다) 그리고, 2 -30 여분 후에 저희 31사단 병력은 UH-1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까지 철수하게 됐던 것입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한동석 2007.09.09 17:53).

사실이 이러하며 그 전후관계가 이러함에도 광주청문회 때 심문한 의원들은 조갑제 기자의 글 원문과 다른 문장, 즉 “오후 2시께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조선대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는 문장을 조작해 냈으며, 그 이래 이렇게 조작된 문장이 5・18측 입장을 대표하였다. 그 이유는 발포 명령자를 찾아내지 못하면  5・18 논리는 뒤집혀질 수밖에 없는데,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밀어붙이려면 상부에서 실탄을 분배했다는 그들의 주장을 입증하여야 했다.  그래서 5・18측은 문제의 조갑제 기자의 글을 “31사단 헬기가 실탄을 갖고 왔었다”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의 오른팔인 정웅 광주 국회의원이 바로 31사단 사단장이었기에 공수부대 실탄 출처가 31사단이었다는 사실을 5・18측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선대에 보관하고 있던)이란 말을 슬쩍 끼어 넣어 문장을 조작했던 것이다. 왜 그들이 조갑제 기자의 글에 없는 말을 집어 넣어 문장을 조작했는가? 그 이유는5・18측은 발포 명령자가 있었다는 그들의 주장을 밀어 붙이기 위해 조갑제 가지의 애매한 문장 “오후 2시쯤 31사단 헬기가 도청에 내려왔을 때 경계용 실탄을 갖고 왔었다”에 목을 매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억지 해석을 근거를 마련하는 방편으로서 문장 조작을 했던 것이다.<

이렇듯 위의 조갑제 기자의 기사 중 문제의 문장을 조작하며, 그 조작된 허구를 바탕으로 엉터리 추리를 하는 자들, 즉 거짓말하는 자들의 무식하게 큰 목소리가 위세를 떨치고 있던 광주청문회 때 한동석 중위도 TV로 그 청문회 장면을 보고 있었다.  진실은 하나요, 안부웅 중령의 증언이 진실임에도 없는 사실을 꾸며 내어 큰소리치는 자들의 목소리에 그 진실이 묻히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그는 청문회장으로 전화를 걸고 싶었으나 그때 진실을 밝혔다가는 가족들의 안전도 염려되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는 신념으로 눈물을 머금고 인내했었음을 이렇게 피력한다:

저는 5월 21일 오후 2시경까지 도청 광장에 포위되어 있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헬기로 탈출하기 전에 저희들이 휴대 중이던 '국가보안목표 경계근무용 M-16 탄'을 제7공수부대 *** 대위에게 전달한 장본인입니다. 1988년(?) 청문회 TV생방송 당시, 저의 신분이 신분(해군 군무원)인 지라 오히려 진실을 이야기해도 더욱더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과 가족들의 안전이 염려되어 ...
전화 다이얼을 돌려서 특전사 대대장의 말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이 맞고, 31사단 병력 소대장(본인)한테서 받았음을 증언해야 했었는데....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 진실은 언제나 하나 밖에 없고 반드시 밝혀지리라는 신념을 믿고, 눈물을 머금고 인내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전두환 전대통령이 구속되기 직전에 '서울 지검'에 출두하여 위의 소신을 검사 앞에 처음으로 증언 하였던 것입니다. 저도 그 현장(도청 광장)에 있었지만,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발포권자는 없다!" 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L정권(10년간) 왜 못 찾았을까요? 없었으니까 당연히 못찾죠. 가공으로 만들지 않는 한... 그 동안 여러가지 작품들이 난무했지만 일방적인 (당사자들의 검증 없이) 추리가 사실인 것처럼 굳혀져 가는 현실이 안타까울 때가 많았읍니다. 이제는 어떠한 진실도 믿지 않을 것이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백오한 2007.07.07 06:56).

최초 총성은 시민군 진영에서 울렸음을 한동석 중위는 이런 말로도 표현한다:

직접 보지 않고 20m 후방에 저는 있었읍니다만, 추측하건대 , 1980년 5월 21일 정오 무렵, 도청 광장 금남로 방향에서 최초로 공수부대(특전사) 방어선을 돌파할 때 울렸던 사제 총기류(?)의 사용자가 고인이 아니라면 증언(?) 아마도 어렵겠지요? 아니면 혹시, 신변에 위협을 느낀 특전사 병력의 총기 사용이라면 사실을 증언(?) 해 주시면 실마리는 잘 풀려질 것도 같네요. 굉장히 무거운 요구시항인가요? 저의 예감으로는 전자일 것 같은데요! M-16 소총 소리는 분명히 아니었읍니다. 소대장 시절 부대 사격 통제를 많이 했었기에 가능함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댓글 한동석 2007.07.11 17:59).

오후 1시경 시민군이 선제 발포한 지 불과 한 시간 좀 지나서 부대 단위급의 무장시민군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실탄 수가 200발을 별로 넘지 않던 공수부대에 비해 이때 시민군은 이미 25만 발이 넘는 실탄을 보유하고 있다. 즉, 시민군이 공수부대보다 천 배 이상의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1시경 시민군이 선제 발포한 지 불과 한 시간 좀 지나서 부대 단위급의 무장시민군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실탄 수가 200발을 별로 넘지 않던 공수부대에 비해 이때 시민군은 이미 25만 발이 넘는 실탄을 보유하고 있다. 즉, 시민군이 공수부대보다 천 배 이상의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공수부대가 도청광장에서 시위대를 추격하며 사살하고 있었는가? 아니다. 지칠 대로 지쳐있는 계엄군이 주저앉이 있는 상태로 시민군 차량 공격을 받고 있었음을 시민군 장선호는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가 오후 2시쯤이었다. 도청 앞에는 계엄군들이 연좌하여 있었는데 그때 시위대 차량인 군용트럭 한 대가 계엄군 쪽을 향하여 빠르게 달려갔다. 순간적인 일이라 계엄군들이 피한다고 피했으나 그중 2명이 군용트럭에 치여버렸다” (장선호 1988).

2011년 7월 현재 광주사태와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는 리비아 사태가 넉 달째 지속되고 있다. 시민군은 미국과 나토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아직 그 누구도 승부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 광주사태 당시 21일의 총격전의 경우 그 승부를 예측할 수 있기까지 한 시간도 채 안걸렸다. 박시훈 전경이 3시부터 4시까지의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오후 3시경(21일) 잠시 보이지 않던 시민들은 차차 무장을 하고 나타났다. 공수부대의 총격을 받고 무장을 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공수부대와는 달리 카빈으로 맞서 접근해 왔고, 우리는 소리만 듣고도 어느 쪽이 쏘는 것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기동대원들은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누구의 총에 죽을지 알 수 없었다. 공수대원들 역시 무장한 시민군의 공격과 맨 몸으로 돌진해 오는 시위대의 위력에 점점 밀려나 도청 안으로 몸을 숨기고 벌벌 떨며 콩볶는 듯한 총성을 듣고 있어야 했다.
   3시가 지나자 승패는 결정지어진 듯했다. 일부 공수부대는 도청 안으로 들어가 장비를 싸는 등 철수할 준비를 하느라 부산했다. 점점 좁혀오는 시민군의 총성은 공수부대의 M16 총성보다도 더 무섭고 두려움을 주었다. 경찰병력 4천여 명은 몸을 떨며 도청 안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고심하고 있던 중 경찰국장이 혼자서 헬기를 타고 도망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찰의 대장은 도망가고 없는데 우리가 이곳에 남아 죽기밖에 더 하겠냐 싶어 기동대원들도 각자 알아서 해산하고 명령 있을 때까지 은신은신하도록 암묵적 지시를 받았다.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보호 본능으로 당시 군의 지휘체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4시쯤 공수대원들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기동대원들도 시민군의 공격을 피해 도청의 담을 넘어 도망쳤다 (박시훈 1989).



글 작성일: 2011년 9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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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주도한 5.18 광주사태 사료 전시관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음모 꾸몄던 광주일고 동문의 금융 비리

5.18광주폭동 유발한 박관현 사망 유언비어

리비아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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