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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



위의 광주청문회 동영상은 1988년 12월 22일의 박석태 기자의 중간결산보도로 시작한다:

<광주 청문회는 그러나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발포 문제와 지휘 책임 문제, 초기 과잉 진압 문제 등 핵심 문제에 대해 증인들의 증언이 상반되거나 엇갈려 실체규명의 확실한 실마리를 찾지 못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발포 문제에 대해 최 웅 당시 11공수여단장 등 공수부대 관계자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반에 시민군이 먼저 총격을 가해 자위권 행사의 일환으로 발포를 했다고 증언했으나 야당 측과 피해자 측은 그 때는 시민군이 무장을 하기 전이며 공수부대가 발포를 해 시민들이 정당방위로 무장을 하게 됐다고 맞서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5.18시민군과 공수부대 중 어느 편이 선제 발포하였느냐는 5.18측으로서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을 것이다. 총성이 올린 때는 정확히 오후 1시경이었고, 5.18측은 불과 30분만인 오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어거지 주장은 한달 후인 1989년 1월 26일 광주청문회 때 놀랍게도 시민군편 증인 김영택 기자의 증언에 의해 와장창 무너졌다. 위 동영상 시작후 2분 24초에서 우리는 김석진 기자의 다음과 같은 멘트를 듣는다:

<김영택 씨는 이에 앞서 관광버스가 돌진해오기 직전 시위대가 탄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었으며 이 때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김영택 씨는 이처럼 낮 12시58분 공수부대가 첫 집단 발포하는 순간 시위대 쪽에서 다른 총 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시위대도 함께 발포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미 오전 중에 시위군중이 카빈총을 들고 간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오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공수부대 집단 발포"라는 말은 국민을 속이기 쉬운 말이다. 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의 공수부대는 총 200발이 실탄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민군은 그보다 천배가 넘는 실탄, 즉 20만발이 넘는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위 사진에서 우리는 2005년에 또 발견된 당시 시민군 실탄을 본다. 그러면 실탄이 장진된 총을 가지고 온 시민군과 달리 실탄이 없었던 공수부대는 어떻게 그날 오후 1시경 200발이 실탄을 보유하게 된 것이었을까? 위 동영상 시작 3분 27초에서 김석진 기자의 멘트 "두 번째 증인으로 나온 임정복 당시 31사단 보좌관은 5월 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할 때 실탄 두 상자를 공수부대에 인계했으며"를 듣듯 그 실탄은 공수부대 실탄이 아니라, 보병부대 31사단 실탄이었다.

그리고 31사단이라는 부대명으로 일컬어지는 광주향토사단 96연대 1대대 소대장 중위 한동석이 그 실탄을 전달한 장본인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계엄군 장교=공수부대 장교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심어주나, 한동석 중위는 공수부대 장교도 육사출신 장교도 아니었다. 그는 ROTC 출신이었다. 무엇이 대학생과 전경의 차이인가? 학교 다니다가 전경으로 지원하면 학생신분이 불과 몇달만에 전경신분으로 바뀐다. 1980년 5월의 광주에서 한동석 중위가 바로 그런 입장에 있었다. 그런 그가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울분을 느끼며 2007년 5월부터 역사학도의 블로그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를 찾았다.

900개가 넘는 댓글이 빽빽한 이 블로그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
는 2007년 5월부터 몇달간 두가지 유형의 울분의 전투장이었다 (댓글이 워낙 많아 댓글 페이지 1을 찾아 댓글 입력일 표시가 <한동석 2008.05.08 19:10>로 되어있는 댓글부터 보셔야 함.) 그리고 너무 댓글이 많아 지금은 한참 댓글 페이지를 뒤로 돌려야 하는 그 블로그 댓글 토론장이 한동석 중위가 실명으로 역사의 비밀을 증언하는 증언장이었다. 한편으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공수부대의 잔인성에 울분을 터뜨리며 그 울분을 거기 터뜨리는 네티즌들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사건의 현장 증인 한동석님은 전혀 다른 종류의 울분, 즉 영화 "화려한 휴가"의 역사왜곡에 울분을 터뜨리며 생생한 증언 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었다.

무엇이 팩트였는가? 21일 도청 앞의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없었다. 탄통 3개는 한동석 중위기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인의 판단에 따라 7공수에 전해 주었던 것이요, 심지어 31사단 탄통을 7공수에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조차 없었다.  위 동영상에는 나오지 않으나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는 특전사 대대장의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광주청문회 당시에는 그런 진실된 증언은 묵살되었었다. <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연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었는가? 오직 헬기로 철수하면서 자신의 탄통을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었던 장본인만이 그 사실과 그 상황에 대한 증인이 되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청문회 당시 국회 청문회장으로 전화를 걸지 못했던 것이 오래오래 한으로 남는 한동석님은 그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다:

<<저는 5월 21일 오후 2시경까지 도청 광장에 포위되어 있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헬기로 탈출하기 전에 저희들이 휴대 중이던 <국가보안목표 경계근무용 M-16 탄>을 제7공수부대 *** 대위에게 전달한 장본인입니다. 1988년(?) 청문회 TV생방송 당시, 저의 신분이 신분(해군 군무원)인 지라 오히려 진실를 이야기해도 더욱더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 뭐라고 표현할 수없는 위압감과 가족들의 안전이 염려되어 ... 전화 다이얼을 돌려서 "특전사 대대장의 말<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이 맞고, 31사단 병력 소대장(본인)한테서 받았음.을 증언해야 했었는데....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 진실은 언제나 하나 밖에 없고 반드시 밝혀지리라는 신념을 믿고 , 눈물을 머금고 인내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전두환 전대통령이 구속되기 직전에 <서울 지검>에 출두하여 위의 소신을 검사 앞에 처음으로 증언 하였던 것입니다. >>

영화 "화려한 휴가"에 스토리가 있는가? 광주사태의 진정한 스토리 중 하나가 바로 한동석 중위의 스토리였다. 그는 20일 밤 MBC방송국이 불타고 있었을 때 부하들과 더불어 그 속에 갇혀 목숨이 위태로왔다. 용산참사를 생각해 보면 불타는 건물 속에 갇혀있는 자들의 위기감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부하들과 더불어 모두 타죽는데도 소속 부대로부터 철수 명령이 없었다. 철수명령이 없는한 군인은 경계근무지를 이탈하지 못한다. 그러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는 방송국 옆집 담장을 넘는 방법으로 비상탈출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폭동을 일으키는 난동자들에게 붙들리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심야에 겨우겨우 부하들을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다보니 도청으로 와서 밤을 새게 되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 무장시민군에 겹겹이 포위된 그곳이 또 하나의 사지였다. 다행히 31사단이 헬기를 보내 자기 소대 병력을 비상탈출시켜 주었으나, 사지에 공수부대를 남기고 탈출하는 것이 너무도 미안해 탄통을 넘겨주었던 것이었던바, 그 사실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저는 그 당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의 한동석 중위입니다.80년 5월 20일 밤 9시 30분경에 시위대의 방화로 불타오르고 있는 MBC방송국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당시 향토사단 군인 소대장입니다" MBC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 비상 탈출하여, 밤 11시 경부터 다음 날인 5월 21일 <도청 발포사건>직후까지 (불행 중 다행으로 도청광에 공수부대와 같이 포위 되어 있었던) 도청광장에 있다가 오후 1시 반경에, UH-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으로 철수했던 장본인입니다. 헬기로 철수작전하기 전에 , 5월 20일 밤까지 MBC방송국과 기독교방송국,전일방송국(?) 에 배치되어 있었던 3곳의 경계용실탄 3탄통(한 탄통 안에는 M-16소총 20발 짜리 탄창에 15발씩 장전되어 있었음)을 제7공수 *** 대위님께 전달하고 철수했던 바, 도청 광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 .... 27년 전에 발생한 그 상황의 진위를 가리는데 한가닥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글을 올렸습니다.>>

발포명령은커녕 실탄을 인수인계하라는 명령도 실탄을 인수인계받으라는 명령도 없었다. 단지 그것은 사지를 탈출하는 소대장과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의 한 장교 사이의 우발적인 행동이었다.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원들이 살아남으려면 공포탄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겠기에 넘겨주었던 것뿐이었다. 너무도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우발적으로 취해진 그 행동에 대해 한동석님은 이렇게 증언한다:

<<7공수 외는 저가 잘모르지만 7공수는 실탄이 없었기에 철수하는 저희 병력에게 <실탄 인수인계>를 요구하지 않았겠습니까? 자기도 실탄을 보유하고 있는 데 다른 부대에게 실탄을 요구하는 경우는 어떠한 경우라도 없을 테니깐요.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일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

전북 금마에서 온 7공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실탄을 보유하지 않고 있었음이 아주 분명하다. 그러면, 서울에서 온 11공수 3개 대대 병력에는 실탄이 있었는가? 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던바, 그 사실을 1995년 2월13일 국방부 검찰부 고등검찰관실 신문조서에서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은 이렇게 진술한다:

<<교신이 끝난 뒤 조금 있으니 UH-1H 헬기가 상무관 앞에 착륙하길래 제가 벌써 교대병력이 왔나 하고 살펴보니 상무관 앞 쪽에서 일반 보병부대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헬기 쪽으로 뛰어 가서 탑승을 했습니다. 제가 주위 병사들을 보고 ‘저 병력은 뭐지?’ 하는 동안 헬기는 이륙했는데, ‘그 병력은 31사단 병력인데 MBC 방송국을 경계했던 병력이랍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배속받은 병력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식만 챙기는 놈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대대장님! 병사들이 31사단 병사들로부터 실탄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제가 ‘그러면 안되는데, 병사들이 실탄을 가지면 안되고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이 휴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병사들이 진짜 실탄을 얻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저도 너무 피곤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제가 병사들이 실탄을 얻었는지, 그리고 병사들에게 배분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책입니다. 당시는 병사들이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실탄을 얻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31사단 병력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78 )

이로써 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한동석 중위가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준 세 개의 탄통에 들어있던 실탄 수는 총 200 여발이었는데, 7공수가 독차지하지 않고 그 중 일부를 11공수 병사들에게도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저 위의 탄통은 시민군 탄통이지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21일 도청 앞의 시민군은 20만발이 넘는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고에서 시민군에게 피탈당한 실탄 수를 근거로). 그러나, 근 천 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는 고작 총 200발의 실탄밖에 없었다. 이 숫자대로라면 병사 한 명당 5개 이상의 실탄을 가질 수 없었다. 행정병 등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하사관급 이상의 병사와 장교들에게 10발씩 지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상부 명령에 의한 지급은커녕, 현장 지휘관의 명령에 의한 지급도 아니었다. 31사단 96연대가 철수하면서 우발적으로 넘겨준 실탄이 일부 병사들에게 우발적으로 배분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원인이 되었던 그 200 여발의 실탄을 한동석 중위가 보관하고 있게 된 경위는 무엇이었는가? 한동석님이 그 경위를 설명한다:

<<3탄통의 실탄은 저희 대대(담양)에서 출동할 때(5월 중순경) 소대장 3명과 30여명의 병력이 3곳으로 나누어서 광주 시내에 <국가보안목표경계임무>를 띠고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MBC 방송국, 그리고,전일방송국 & 기독교 방송국에 *중위와 *소위가 배치되면서 경계용실탄 1탄통씩 보유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저희병력이 5월 20일 밤 9시 반경에 MBC방송국에서 비상탈출할때 실탄과 소총만 휴대하고, 긴급하게 나와, 우여곡절 끝에 XX경찰서을 잠시 경유한 후에 무등산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우연히 도청 광장에서 먼저 철수한 *중위와 *소위를 만나 저희 부대원 전원(장교 3명 & 30여명의 병사)이 합유하게 되어서 각각 보유하고 있던 실탄을 합한 것이 모두 3탄통이 된 것입니다. (그 3탄통의 수량이 약 200 여발 정도 될 겁니다) 그리고, 2 -30 여분 후에 저희 31사단 병력은 UH-1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까지 철수하게 됐던 것입니다.>>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는 공수부대에 살인 목적이 있었다는 거짓 인식을 주기 위해 조작되었다. 그러나, 실제 사건에서 살인 목적을 가진 자들은 시민군 틈에 있었다. 화염병이 일으킨 용산참사를 생각해 본다면 도청 앞에서 시민군 화염병에 맞아 온몸이 화염에 쌓이거나 시민군 장갑차에 깔려 죽거나 다친 병사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 한동석님은 그 광경을 이렇게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 당시(5월 21일)에 계엄군(31사단병력과 공수부대병력)은 도청 분수대를 거점으로 도청 광장에만 남아 있었지요. 그래서 도청 광장에 있는 군인들을 몰아 내기 위하여 도청 건물 뒤 뿐만 아니라 사방 팔방에서 차량, 화염병, 돌멩이 등 등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공격을 했으며, 최후의 저지선만 남아 있다가 금남로 대로 쪽이 먼저 뚤리면서 발포가 났고,후진하던 공수부대 장갑차에의해서 공수부대 요원이 피해를 보았고, 그 직전 까지는 맨몸으로 인간 바리케이트를 치고(대형을 갖추고 버팀) 밀집된 대형의 앞이 보이지 않는 관계(키가 큰 장병이 앞에 선두에 서고 키가 작은 장병은 후미에 섰기 때문에) 후미에 서 있던 공수부대 장병들은 날아오는 화병병을 볼 수 없기에 피하지 못하고 철모에 화염병이 맞아서 순식간에 머리부분 부터 몸 전체로 화염에 쌓이는 처참한 광경도 목격하면서 분개했던 기억도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부터 퍼진 광주학살 유언비어는 시민군 무장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조작되었다. 사건의 선후에 대해 속이는 이 유언비어와 달리 무장시민군이 계엄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먼저 있었다. 공격하는 시민군 편에서 계엄군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그 실제 상황을 생각해 보라. 무장시민군 편에서는 헬기로 철수하는 31사단 병력이 공수부대에 실탄을 넘겨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민군 장갑차가 공수부대를 덮쳤을 때 시민군 편에서는 공수부대에 실탄이 있는 줄 몰랐기에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전날 밤 시민군 편의 선무방송이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으로 들렸다. 만약 당신이 ROTC 출신 장교로서 현장에 있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느끼며 받아들였겠는가? 한동석님의 다음 증언이 그 상황을 객관전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어떻게 글로 설명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전쟁터라고 생각하시는 게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50월 20일 밤 상황은 시민들한 테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챙피스러운 이야기지만, 무기로 시민들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무작정 돌과 화염병을 맞을 수도 없고, 외부에서 지원병력이 시내로 들어올 수도 없이 고립이 된 상황인데, <귀가>라니요! <야영> 잠을 잘 수가 있나요?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는 데... 오죽하면 저가 단독으로 MBC방송국에서<탈출을 결심>하고 무전기 까지 끄고 병력을 인솔하는데 방향만 무등산 쪽으로 향했겠습니까?

그런데 운 좋게도 광주 경찰서(?) 까지 1차 탈출에 성공하여 잠시 쉬고 있는데, 뒤를 돌아 보니 MBC 방송국 건물과 옆의 병원 옥상까지 불길이 완전히 쌓였던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전병이 실수로 무전기를 개방하여 교신하는 과정에서 2소대(분대병력)와 3소대(분대병력) 가 안전한(공수부대가 집결되어있었음) 도청광장으로 먼저 대피를 하게되었고, 저희 병력은 경찰서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무기와 실탄만 챙겨서 무등산 방향으로 2차 탈출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2,3소대 병력을 만나게 되어서 선임 소대장인 저가 96연대 1대대 소속 3개팀(선임소대장 저를 포함하여 두명의 소대장<중위 & 소위>)을 재편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자정 무렵(5월 21일 0시) 입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영화에도 나오는 젊은 여성의 선무방송은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 입니다.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의 엠프 방송)>>

위 동영상에서 김영택 기자는 12시58분경 시민군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어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하는순간 시민군과 공수부대가 동시에 발포하였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총성에 대해 보다 정확하고 전문적인 감각을 가졌던 한동석 중위는 분명히 시민군 총성이 먼저 울렸다고 증언한다: "저가 주장한 5월 21일 최초 총소리는 금남로 방향의 특전사 인간 바리케이트가 "탕 !~ "하는 사제총(?) (M-16소총 소리는 아님)가 나면서 뒤로 밀리면서 양쪽으로 갈라졌던 것입니다."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 역시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와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 (
http://cafe.daum.net/518cafe/8yGb/78
)

안부웅 중령과 김영택 기자가 목격한 이 상황이 바로 한동석 중위가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 상황이었다. 실탄을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었으며, 실탄을 인수인계했다고 보고할 겨를도 없었다. 탄통 3개를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며 30명의 96연대 병력을 헬기에 태우는순간 시민군 편에서 먼저 총성이 울리고 이어 약 1분간의 맞사격이 있었으며, 모든 것이 아주 순식간에 발생하였다. 한동석님은 그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은 도저히 보고 절차를 밟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실탄 인수인계>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아 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 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 했을 것일라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시위대가 순간적인 기습 공격으로 인간 바리케이트 방어대형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대형 트럭의 질주<공격>로 대기 중이던 대형이 각자 흩어져서(도청 정문 을 통해 내부로) 부대를 재정비하는데 지휘자들은 정신이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읍니다. >>

그리고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다는 사실은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 시민군 총기오발 사고로 증명된다. 최초로 총성이 울리던 순간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당시 공수부대가 도청 안에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나와 삼촌은 떼밀리다시피 해 도청 앞까지 가게 됐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공포다."

누군가 외쳤다.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아저씨 아저씨, 나 총 맞았어요." >>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 에서 네번째 작은 제목 "21일 도청 앞 발포" 이하.)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는 무장시민군이 섞인 인파였다. 운집한 전체 시민 수는 이십 만이요, 무장시민군 수가 오천이라 했다. 총성이 울렸는데도 사람들이 도청 앞쪽으로 밀려왔다. 만약 공수부대 집단발포라는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밀려올 리가 있겠는가? 현장의 시민들은 공포로서 이해했으며, 더구나 총소리 방향을 모르고 있었다. 김수영은 공수부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그가 들은 것은 뒤에 따라오던 청년이 총 맞았다고 소리친 것, 그가 본 것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뿐이었다.

시민군 진영에서 먼저 총성이 울렸음을 한동석 중위와 안부웅 대령이 분몋이 들었다. 그리고, 시민군 진영에서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었음을 시민군 김수영이 분명히 목격하였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시민군 지프차 위에서 오발 사고가 났다고 한다. 시민군 지프차가 왕래하고 있었다는 것은 도청을 점거할 목적으로 시민군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말한다. 시민군 지휘부가 지프차를 타고 금남로 일대를 왕래하며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지프차 위에서 총기 오발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시민군 진영에서 계속 발포 사건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최초의 총성은 시민군 진영에서 울렸다. 즉, 5.18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시민군 김수영이 서술하듯이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수영이 목격한 잦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는 탈북군인들이 증언하듯 폭동 선동을 위한 의도적 오발사고였을 수도 있다. 그 경우 살인의도를 가진 자들은 시민군 틈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진에서 더러는 철모까지 쓴 폭도들이 지프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진실은 시민군 편에서 총성이 울렸다는 것이며, 그 총성 중에는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대로 시민군 지프에서 발생한 총기오발 사고도 있었다.


(* 상단 동영상은 1988년 12월 22일, 1989년 1월 26, 27일의 광주청문회 영상물을 함친 동영상인데, 세번째 영상물인 27일자 광주청문회 표지 다음에 26일자 동영상이 겹쳤습니다. 도청진압작전 사망자 수에 대한 5.18측의 허위 주장이 드러나는 1989년 1월 27일자 광주청문회 영상물은 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_5-27.ht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BC International

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은 미국인가 북한인가?

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

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

광주사태의 진실탐구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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