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괴담 작가가 전두환 재판 증인이 된 사연


    문재인은 자기야말로 지독한 독재자이면서 광주사태 39주년 기념식에서 "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다"고 연설하였다. 그래서 5.18 사기꾼들에게 공개 질문을 한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전두환 5.18 재판은 2017년 여름 문재인이 송영무 국방장관에게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를 재조사하라고 지시함과 거의 동시에 시작하였다. 문재인의 지시는 광주사태 때 헬기 사격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하라는 무언의 압력이기도 했다. 송영무 국방장관이 국방부로 하여금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에 착수하게 하였으나, 석 달 동안 전혀 헬기 사격의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자 조사 기간을 석 달 연장하였으나 그래도 전혀 증거를 찾지 못하자 송영무는 대변인에게 헬기 사격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는 개인 의견을 애매모호한 말로 포장하여 보고하게 함으로써 문재인의 체면을 지켜주다. 민사재판에서는 국방부 대변인의 애매모호한 개인 의견을 인용하여 전두환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그러나 형사 재판에서는 권력의 시녀의 아무런 증거 없는 개인적인 의견 보고는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단정할 만한 증거가 되지 못한다. 이 재판을 위하여 5.18 사기꾼들이 총동원되어 지난 2년간 모든 기록을 뒤지면 헬기 사격 증거를 샅샅이 찾아 보았으나 찾지 못하고 5월 13일의 공판에서 5명을 증인으로 법정에 출석시켰다. 그런데 다른 네 명의 허접한 허위증언은 누가보아도 일고의 가치가 없고, 유명한 5.18 유공자 이광영의 증언만 이 날의 증언의 하이라이트이다.

    단적으로 말하여 이제 문재인과 전두환의 5.18 역사전쟁의 승부는, 즉 문재인과 전두환 중 누구 말이 진실되고 누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이광영의 지난 5월 13일의 증언이 사실인지의 여부에 달려있게 된 것이다. 바야흐로 이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사상 초유의 거짓과 진실의 대전투의 승부가 이광영의 증언의 진실 여부에 달려있게 되었고, 그래서 모두가 이광영을 입을 쳐다보게 된 것이다. 지난 광주사태 39주년 기념식 때 문재인이 헬기 사격을 끝내 밝혀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연설을 또 다시 하였으나 이제는 문재인도 이광영을 입을 쳐다보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게 되었다.


    지난 5월 13일 KBS는 5.18 당시 이광영이 승려였다고 보도하였다. 이광영이 승려였는가? 아니다. 그는 1985년 5월에 조갑제 기자가 인솔하는 월간조선 특별취재단과 인터뷰하였을 때 학력과 직분을 사칭하였을 뿐이다. 학력과 직분을 사칭한 자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광주 괴담을 지어냈다. 그래서 광주사태 당시 이광영이 어디서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해서조차 매번 말이 달라졌다. 1985년 5월에 조갑제 기자 일행과 인터뷰하였을 때는 "동국대 승가학과를 나온 나는 그때 광주시 황금동 집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월간조선 1988년 3월호 p.461). 조 기자에게는 동국대 승가학과를 나온 불교계 최고 학벌의 스님이 창녀촌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하였다는 말이 수상하지도 않았는가? 이광영은 이듬해 2월 23일의 광주청문회에서는 조찬형 위원이 "증인이 승려의 몸으로서...."라고 질문을 하자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 바로 구례 화엄사에 출가해 가지고 승려가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광영은 자기가 조갑제 기자 일행에게는 자신이 동국대 승가학과를 나왔다고 말을 했다는 것을 어느새 잊었는가? 그런데 이광영은 광주청문회 출석하기 반년 전의 5.18 증언록에서는 출가하려고 구례 화엄사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재수하기 위해 곡성에 있는 태안사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1972년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법대를 지원했으나 씁쓸한 패배의 잔을 맛본 채 재수생활에 들어가야 했다. 나는 짐을 싸들고 곡성에 있는 태안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조갑제 기자가 곧이들었던 것처럼 동국대에서 승가학을 전공한 것이 아니라, "동국대 법대를 3년간 청강생으로 수료했다"고 했다. 전라도 스님이 어떻게 청강하기 위해 저 멀리 서울 동국대까지 통학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월간조선 기자들에게는 자기가 광주 황금동 (당시 윤락가)에서 사법고시를 공부를 한다고 말해 놓고서도 5.18 증언록에서는 나주 다보사에서 법률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5.18 사기꾼들에게는 이광영의 이 말이 이상하지도 않은가? 전라도 스님들은 절에서 불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법률공부를 하는가?

5.18 유공자 이광영의 거짓말

    이렇듯 5.18 유공자 이광영의 거짓말은 그 바닥이 뻔히 보이는데도 지금 더불어민주당은 이광영의 거짓말을, 즉 광주사태 유언비어를 맹목적으로 맹신하지 않으면 처벌하겠다는 5.18 특별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광영의 거짓말 작품들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아 전혀 일관성이 없는데 그 중 어느 거짓말을 맹신하라는 것인가?

    지난 5월 13일자 kbc 8시 뉴스는 "5.18당시 승려였던 이광영 씨는 80년 5월 21일 오후 일행과 함께 차를 타고 옛 전남도청으로 향하다 헬기에서 조준사격을 당했다고 증언했습니다."라고 보도하였다. 그런데 왜 이광영이 군용지프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은 시청자들에게 알리지 않는가? 자, 군용헬기가 도청 상공에서 잠시 정찰을 하던 때는 5월 21일 오후 2시 반경 단 몇초간뿐이었다. 그때 헬기 조종사는 민간인들이 군용지프를 타고 다니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던 때였는데 헬기에서 군용지프를 조준사격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

    지금 5.18 사기꾼들이 광주법원에서의 5.18 재판을 위해 찾는 증인은 도청 상공에서 5월 21일 낮에 헬기 사격을 하는 것을 본 증인이요, 이광영은 그 날 도청 가까이 간 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도청 상공 헬기에서 자기를 향해 조준사격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는 말인가?

거짓말하는 5.18 유공자 이광영

     "백운동 로라티를 지날 때 군용 헬기에서 총을 쏘는 게 보였다. 여학생이 인도에서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그 여학생을 차에 태우고 기독병원으로 달려갔다" (월간조선 1988년 3월호, p. 463).백운동을 전남도청 구간으로, 기독병원을 적십자 병원으로 바꾸면 이광영의 이전의 5.18 증언들은 거짓말이 되는 것이요, 이광영의 증언들이 허위로 밝혀지면 광주단체들의 주장의 대전제가 무너지고, 김영삼 정부 시절의 5.18 재판 법리가 흔들리며, 1997년 4월의 대법원 판결은 사기꾼들의 농간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어 5.18 재판을 다시 하여야 한다. 이광영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광주괴담이 월간조선 1988년 3월호에 등단한 이래 그의 괴담 작품은 5.18측의 주요 흥행물이었다. 지금 문재인의 주요 어젠다(Agenda)가 헬기 사격 조사인 이유도 그가 그런 류의 괴담 흥행물에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요, 그의 정치적 흥행 대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광영은 5월 21일 낮에 군용지프를 타고 있었고, 그때는 군용차량을 타고 다니는 민간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군인들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때였다. 그래서 5월 21일 오후 2시경 백운동 로라티를 지날 때 군용 헬기에서 총을 쏘는 게 보였다는 이광영의 증언은 그 즈음에 백운동에서 계엄군 성폭행이 있었다는 의혹을 조사하라는 문재인의 지시와 모순된다. 백운동에 군용차량을 탄 계엄군들이 있었다면 헬기에서 백운동 군용차량을 향해 사격을 하였다는 이광영의 증언은 사실 성립이 안된다. 더욱이 만약 이광영이 참으로 백운동에서 헬기 사격을 목격하였다면 지금 갑자기 그 장소를 백운동에서 도청으로 변경하지 않는다. 광주청문회에서는 이광영이 그 장소가 월산동로터리라고 하였다.

    이광영의 5.18 증언이 처음 월간조선에 실렸을 때는 이광영은 5월 21일 오후 2시경 광주 돌고개에서 백운동으로 이동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5개월 후인 1988년 8월의 5.18 증언록에서는 광주교도소에서 백운동으로 또 거짓말하는 5.18 유공자 이광영

    이광영의 증언이 월간조선 편집자에 의해 처음 활자화되었을 때는 이광영이 "여학생이 인도에서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그 여학생을 차에 태우고 기독병원으로 달려갔다" (월간조선 1988년 3월호, p. 463). 그런데 지난 5월 13일의 법정 증언에서는 "그때 이제 인도에서 다친 젊은 학생 비슷한 사람을 우리 차에 싣고 적십자(병원)에 가서"라고 하였다. 백운동 인도에서 여학생 부상자를 지프차에 태워 기독병원으로 갔다는 말이 전남도청 인근 인도에서 젊은 학생 비슷한 사람을 싣고 적십자병원으로 갔다는 말로 바뀌었다. 만약 이광영이 참으로 부상자를 병원으로 후송하였다면 병원 명칭이 바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광영이 후송해 준 학생도 이광영처럼 5.18 유공자가 되었을 것이고, 병원 기록이 있을 것이고, 이광영이 간부직을 역임하였던 5.18 부상자회 회원일텐데 왜 그 학생 이름을 대지 못하는가? 그 이유는 지난 30여년간 정계에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던 이광영의 헬기 사격 증언은 실화가 아니라 광주괴담이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1997년 4월의 대법원 판결은 한국 사법 사상 초유의 비극이요, 슬픈 희극이었다. 법관들이 주로 광주괴담에 의지하여 판결을 내렸기에 이 재판은 슬픈 코미디였다. 광주괴담에 의한 마녀사냥식 여론몰이 인민재판 광풍이 일어났을 때에 몇몇 월간지 편집장들은 객관적인 팩트보다는 괴담을 실어야 흥행에 유리하다는 판단을 하였으며, 입에서 말이 슬슬 나오는대로 거짓말을 지어내던 이광영은 잘 알려진 괴담 작가였다. 5.18 재판은 문민독재자 김영삼 대통령이 그의 비겁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전두환 사형의 판결을 정해 놓고 한 재판이었으며 (사형 선고 쇼를 한 후 3년간 감옥에 가두었다가 사면하기로 각본을 짜놓은), 마녀사냥식 여론몰이 인민재판에 편승한 채동욱과 최환 등 정치검사들은 광주괴담에 짜맟추어 사건을 구성하고, 조작하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시절의 5.18 재판에서 5.18 사기꾼들이 이광영을 증인으로 출석시킨 것은 5.18 사기꾼들의 자충수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과거의 그의 5.18 증언들의 사실 여부가 국민들의 관심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광영은 헬기사격에 의한 부상자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인물이며, 그의 그런 주장과 더불어 1995년 5.18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광영이 거짓말을 했었다는 사실은 이미 지금부터 34년 전인 1995년에 철저한 검찰 조사로 밝혀졌었다. 검찰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 208쪽은 이광영이 거짓말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헬기 사격 주장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기소할 사유가 되지 못함을 이렇게 보고하였다:

위 이광영은 5.21. 14: 00경 헬기 사격으로 15-6세의 女學生이 어깨 부위를 被擊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하였다고 진술하였으나, 적십자병원의 당시 진료기록부와 응급실 관계자의 진술에 의하더라도 그 당시 헬기 사격 피해자가 來院 하였음을 확인할 수 없었고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검찰부. 1995, 208).
검찰의 1995년도 광주사태 조사보고서

    이렇듯 검찰 조사 결과 이광영의 증언은 허위 증언이었음이 밝혀진 사실을 최환 등 5.18 정치검사들은 용렬하게도 국민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고, 당시 몹시 편파적인 언론들도 미친듯이 광주괴담 흥행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기에 유언비어와 괴담과 거짓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5.18 성역화가 가능할 수 있었다. 당시 5.18 법관들과 언론이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던 객관적 검찰조사보고서, 즉 헬기 사격은 없었다는 보고 내용이 「전두환회고록」에 인용되자 광주단체가 전두환 전 대통령을 고발함으로써 마침내 이광영의 5.18 증언이 법정에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고발 사유는 고 조비오 신부 명예훼손이었다. 그러나 1988년의 광주청문회 때 조비오 신부의 거짓말이 탄로나자 1989년 2월 23일에 이광영이 구원투수 역할을 했었기에 헬기 사격 여부에 대한 재판은 이광영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광영은 헬기 사격 부상자를 보았다고 주장한 유일한 인물인 까닭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입에서 말이 슬슬 나오는대로 거짓말하는 것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과거의 그의 5.18 증언이 모두 허구였던 사실만 탄로날 뿐일 것이다.

    5월 21일 저녁 광주시청을 점령하고 있던 무장폭도 총에 맞아 5.18 유공자가 된 이광영은 그가 줏어들은 광주사태 소문들을 모아 거짓말을 지어내고 그것을 5.18 증언이라고 속인 사실은 월간경향 1988년 3월호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월간경향 편집자는 광주괴담 흥행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이었는지 5.18을 8.15라고 활자를 찍었다. 이광영이 광주괴담은 "입체특집/광주사태를 재심한다. 8·15 광주사태 시민군 수기 : 금남로 10일, 스님이 겪은 연옥"이란 거창한 제목으로 포장되었다.

    공교롭게도 월간조선과 월간경향이 1988년 3월 동시에 이광영의 5.18 증언을 게재하며 그를 명승으로 부각시켰다. 월간조선에서는 이광영의 5.18 무용담은 5월 19일에 시작된다. 그때까지는 그는 광주 황금동 (당시 윤락가) 자기 집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월간경향에서는 그의 5.18 무용담은 5월 18일에 시작된다. 월간경향에서는 이광영이 광주 황금동에서 사법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5월 18일 우연히 광주로 왔다가 오후 5시에 김영찬이 총상을 입은 것을 보고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광주사태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할 수 없는 거짓말을 이런 말로 시작한다:

이 부상자는 당시 나이 18세로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김영찬이란 고교생이었다. 이날 학교가 끝나자 증흥동 집으로 가기 위하여 시위 군중 옆을 지나다 장갑차에서 쏘는 M-16 자동소총에 의해 복부 관통상을 입고 전남대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월간경향 1988년 3월호 132-133).

    이광영의 거짓말은 청산유수이다. 이광영은 이 사건이 그때부터 그가 시위에 참여한 동기라고 증언한다. 그러나 5월 18일 일요일에 학교를 간 고교생이 있었는가? 더구나 김영찬은 야간부 학생이었는데 낮에 학교가 끝났는가? 김영찬 군 사고날짜는 5월 18일이 아니라 19일이었고, 귀가 중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광주 상무대 기갑학교 기간병들이 탄 장갑차 감시경이 깨져서 정차하고 있는 순간 그 안에 타고 있던 광주 군인 9명을 불에 태워죽이려고 해치를 열고 불이 붙은 볏단을 집어넣다가 발생한 사고였다. 마치 자신이 5월 18일 오후 5시 경에 최초 발포 목격자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것이 그의 시위 참여 동기였던 것처럼 증언한 것은 증언이 아니라, 어설프게 줏어들은 이야기들을 짜깁기한 것이다. 그래서 원출처를 밝히지 않은 그의 짜깁기 괴담은 모두 사건 전개 순서가 사실과 다르고 사실관계가 틀리는 것이다.

    한 예로 이광영의 광주괴담 작품들 중에서 가장 흥행이 잘된 헬기 사격 괴담을 들어보자.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진실을 5.18 사기꾼들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도 이광영의 광주괴담을 근거 삼아 5.18 사기꾼들이 박금희 양(고등학생 총기오발 사고로 사망한 춘태여상 학생)이 헬기 사격으로 사망했다고 선전하기 때문이다. 지금 5.18측 광주민주화운동 이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박금희 양이 기독병원에서 헌혈한 후 귀가하던 중 헬기에서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즉사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고등학생 총기오발 사고로 복부를 맞았음). 그런데 이광영의 증언에서 헌혈을 하겠다고 조르는 여학생을 만난 시간은 오후 6시경이었다. 병원까지 가서 수속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다가 헌혈을 마치려면 족히 두 시간을 걸리고, 그때는 의사들과 간호원들도 퇴근하였을 시간인데 무슨 헌혈을 하였다는 말인가? 더욱이 박금희 양이 고등학생 총기오발 사고로 사망한 시간은 오후 2시 이전이었는데 어떻게 오후 6시 이후에 헌혈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군용헬기는 오후 2시 반경에만 단 몇분간만 도청 상공에 있었을 뿐이요 양림동으로 간 적이 없었는데 누가 병원에서 헌혈을 한 줄을 어떻게 알고 헌혈한 여학생을 족집게처럼 골라 조준사격하여 단발에 명중시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지금 더불어민주당은 그런 광주괴담을 맹신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5.18 특별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지만 오후 2시 이전에 사망한 박양이 어떻게 오후 6시 이후에 헌혈을 자원할 수 있었다는 것인지 먼저 설명해 주어야 하는 것이 바른 순서가 아니겠는가?

    이광용의 광주괴담은 김영삼 정부 시절의 5.18 재판 법리의 대들보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 아무리 수사하여도 무장난동자들로부터 군무기를 회수하는 작전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털끝만치라도 관여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안나오자 증거는 나중에 찾기로 하고 먼저 사형 선고를 하는 편법을 사용하였다. 지금 문재인 정부가 5.18 재조사에 목을 매는 이유는 광주단체들은 문재인 정부 시절이 전두환이 발포명령자였다는 증거를 찾을 마지막 기회라고 여기기때문이다. 광주단체들의 광주민주화운동의 핵심 이론은 광주사건을, 즉 광주민주화운동을 전두환이 야기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이광영의 광주괴담의 일부였다. 1989년 2월 23일의 광주청문회에서 이광영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광주사건을 의도적으로 끌어가지고 군부가 정치일선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서 나서는 자체가 국민들로 하여금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하는 하나의 예비음모된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29차 광주청문회, p8).

    이광영의 이런 주장을 뒤집어 말하면 전두환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켰으므로 자신을 비롯한 5천 명의 5.18 국가유공자들은 모두 전두환의 허수아비들이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1995년에 채동욱과 최환 등 정치검사들은 광주괴담 작가들의 이런 주장을 그대로 빌려 5.18 재판법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전두환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켰는지를 어떻게 알았는가?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에, 즉 전혀 입증이 안되기에 그런 주장 역시 괴담이다. 그런 주장을 증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5.18측이 범하는 오류이다. 이광영은 전두환을 본 적도 없었는데 그가 전두환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현장 목격한 증인일 수 있다는 말인가?

    광주괴담 작가들의 발포 명령에 대한 주장 역시 증언이라기보다는 괴담에 가깝다. 1988년 3월호에 월간경향이 시민군 수기라며 게재한 이광영의 5.18 증언록에서 이광영은 5월 20일에 "계엄군 공식적으로 발포명령을 내렸다"고 하였다. 만약 이것이 이광영이 확인하고 말한 것이라면 지금 문재인 정부가 국고 낭비하며 5.18 특위를 구성할 필요할 필요 없이 이광영에게 물으면 된다. 그러나 심지어 광주단체들조차 이광영의 이런 증언은 전혀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지금 미국 정부에 미국 정부 문서 공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왜 문재인 정부가 5.18 특별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는 것인가? 아무리 한국에 문재인처럼 괴담을 맹신하는 미개인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광주사태 40주년이 가까워지면서 이제는 그동안 괴담에 속았던 것을 국민들이 자각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런 합리적 자각에 사기꾼들은 도저히 합리적 대응을 하지 못한다. 괴담은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물론 악성 유언비어가 5.18 세력의 주무기였으며,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일단 싸움의 양상이 변하여 거짓과 진실의 대결이 되면 유언비어 제작 진영에서는 논리적 반박을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지금 문재인 좌파 정권이 국민이 광주사태의 진실을 말하지 못하게 입을 막는 5.18 특별법 제정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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