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자서전 영상 오디오북


제1장 제1화 '인연의 시작'



   1939년 3월 24일 홍매화 움트는 봄 나는 만주 길림성 동관(東關)에서 태어났다. 그 21년 전인 1918년 겨울 만주 송화강 인근의 삼송(杉松)에 한 조선 소 년이 가족과 함께 도착했다 대한제국 멸망 후 8년이 지난 때였다. 고향이 경상북도 성주(星州)인 그 소년의 가족이 길림성 삼송으로 이주해온 것이 다. 이규동(李圭東)이라는 이름의 여덟살 난 그 소년이 바로 나의 아버지다. 아버지가 부모님을 따라 만주에 정착하게 된 사연은 알 수 없다. 다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 땅으로 이주하게 된 데에는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들어간 조국의 사정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생각만 해볼 뿐이다. 당시 만주 길림성 화순(樺旬)현은 조선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이순자 자서전 18페이지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18~19쪽

   북만주 오지 장춘(옛이름은 신경)에 8.15 광복의 소식이 들려왔다. 장춘은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광복이라고 하면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 기와 만세 함성이 연상되지만 겨우 일곱 살 어린 나이에 북만주 오지에서 내가 맞은 조국의 광복은 그것과는 꽤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광복이 임박했을 무렵은 전쟁 말기였다. 심한 폭격과 공습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어른 들은 급히 아이들을 끌어안고 방공호로 쓰이던 마루 밑으로 들어가 폭격을 피하곤 했다. 무서운 폭격이 지축을 흔들었다. 히공을 찢는 폭음과 날카로운 섬광은 우리가 엎드려 있던 마룻장 틈새를 통해 금방이라도 전부를 삼킬 듯 뚫고 들어왔었다. (이순자 자서전 20 페이지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20~21쪽

    그러나 그토록 고대하던 조국 땅의 첫 체류지인 월미도 수용소는 별난 방식으로 우리를 맞았다. 사정없이 뿌려대는 디디티(DDT) 가루 세례가 그것이었다. 이가 들끓어 발진티푸스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행 모두에게 뿌려진 새하얀 디디티 가루 그것이 조국이 우 리에게 건넨 첫 환영인사였다. 여덟 살이었는데도 유난히 몸이 작고 피부가 까맣던 나는 그 디디티 가루를 온몸에 뽀얗게 뒤집어쓰고 나니 마치 흰 떡고물에 굴려놓은 경단 같았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불편하고 처량했던 월미도 수용소를 벗어나 다시 서울 장충동의 또 다른 수용소로 옮겨졌다. (이순자 자서전 22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22~23쪽

    전쟁이 시작되던 그 일요일 비상소집 연락을 받고 황급히 집을 나가신 아버지한테서는 연락조차 없었다. 막상 강을 건넜지만 우리 가족은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다. 결국 아버지의 근무처이던 육군본부가 수원으로 옮겨갔다는 소문 하나만을 믿고 우리는 무작정 수원을 향해 떠났다. 아버지는 그때 새 직책인 육군본부 중앙재무과장직을 맡고 계셨다. 그러나 소문은 믿을 것이 못 되었다. 수원엔 육군본부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낙심한 우리는 우선 눈에 띄는 빈 집에 들어가 먹을 것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집 주인이 급히 피난을 떠났던지 그 집엔 삶은 보리와 약간의 밀가루가 남아 있었다. 피난길에 배를 곯고 있던 식구들은 그것으로 요기를 할 수 있었다. (이순자 자서전 25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24~25쪽

    감천에서 보낸 짧은 기간은 비록 고달픈 피난지 생활이었지만 내겐 그래도 소녀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과수원의 고요한 녹음, 여성적인 바다가 기막히게 어우러져 목가적 풍경을 자아내던 그 한적한 마을은 어린 내겐 그대로 낙원이었다.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을 다니고 있어야 할 나이였다. 그러나 전쟁 중이라 학교에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 채 나는 매일 빨갛게 타는 저녁노을이 온 마을을 완전히 감싸안을 때까지 동생들과 망아지처럼 뛰어놀았다. 하지만 그 즐겁던 시간도 잠시였다. 얼마 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이 수복됐고 우리는 서둘러 감천을 떠났다. (이순자 자서전 25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26~27쪽

    피난지 대구가 내게 특별한 곳이 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전쟁 통해 기약 없이 중단됐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절 피난민 학생수에 비해 학교가 턱없이 부족해 그저 나무 기둥 몇 개에 겨우 지붕만 척 얹어 놓은 임시 건물에서 공부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것이 대구 봉덕국민학교의 임시 교사였다. 그 임시교사는 기와를 구워 보관하던 창고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다 새로 배정돼 들어간 정식 피난지 학교가 희도초등학교—당시에는 희도국민학교—였다.
그 학교는 공교롭게도 먼 훗날 내가 사랑에 빠지게 된 그 사람의 모교이기도 했다. (이순자 자서전 28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28~29쪽

    임지에 계신 아버지가 전학 수속을 위해 대신 보내신 젊은 군인이 학교 복도 저편에 나타나면 난 아무 말없이 다시 학교를 옮겨야만 했다. 그분들은 대개 육군 상사나 중사였다. 정든 친구들을 떠나 다시 낯선 곳으로 가야 하는 이별의 통증들이 반복됐다 낯선 집, 낯선 고장, 낯선 학교, 낯선 친구들, 지역적으로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넘나드는 현기증 나는 이동이었다. 내성적이었던 나는 그 낯선 공간과 시간 사이를 묵묵히 물결처럼 흘러다녔다. 다시 의욕을 내어 적응해야 한다는 것. 그 잦은 도전들은 매번 참 막막한 것이었다. 더구나 학교마다 학업의 진도도 달라 애를 먹고 남몰래 울기도 했었다. (이순자 자서전 30~31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30~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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