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자서전 영상 오디오북
한 동네 이웃이었던 육사동기 이동남 대위로부터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 듣던 날 육군대위 계급에 불과한 남편은 군사혁명을 주도한 박정희 장군과의 면담을 결심하고 대담하게도 육군본부로 찾아갔다. 그리고는 박 장군을 만나자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저는 혁명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제가 시도하려고 하는 것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로 하여금 혁명지지를 위한 시가행진을 하도록 주선해보는 것입니다.” (이순자 자서전 110 페이지에서)
민심을 얻는 데 성공한 혁명세력은 이후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혁명을 주도했던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이 바뀌었다. 박 장군은 제2대 의장으로 취임했다. 박 장군도 강한 인상을 받았던 모양 인지 의장 취임 후 그이를 의장실 민원비서관으로 임명했다. 자신의 곁에서 일하게 한 것이다. 그것이 1961년 7월의 일이다. 자신의 꿈과 포부였던 군의 야전(野戰)이 아닌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비서실이라는 임지가 남편에겐 참 뜻밖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훗날 역사의 전면으로 나설 중요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직속상관인 비서실장 박태준 대령, 비서실장 보좌관 윤필용 중령, 경호대장 박종규 소령 같은 인물들 사이에서 박 의장을 보좌하면서 혁명초기 권력중심부의 중요한 목격자가 되어갔다. (이순자 자서전 112 페이지 중에서)
혁명의 초기, 아직 신선함과 패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혁명의 심장부에서 박 의장을 가까이 모시는 일에 그분은 큰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권력의 중심부인 최고회의의 의장을 보좌하는 민원비서관이라는 직책이 중요한 자리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개인적으로 신뢰와 존경을 갖게 된 박 의장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남편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애초 군인이라는 외길만을 가려고 했던 남편은 다시금 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한 열망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생각 끝에 결국 최고회의를 떠나 고급장교로서의 필수 과정이었던 ‘광주보병학교의 고등군사반’에 입교할 것을 결심했다. 자신을 신임해주는 박 의장께 감히 민원비서관직을 사임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최고회의의 일은 언제나 야전군 생활을 천직으로 여기던 남편에게는 외도(外道)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순자 자서전 114 페이지 중에서)
잘 들었습니다~~~~ 그시대의 상황을 잘 설명하셨네요~~ (이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