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자서전 영상 오디오북
트렁크 두 개를 달랑 들고 이모님 댁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려고 보니 시간은 야속하게도 새벽 네 시였다. 대문 앞에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발길을 돌려 근처 효창공원으로 갔다. 벤치도 없는 공원이었다. 우리는 풀밭에 트렁크를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 아침이 되길 기다렸 다 그이는 말할 것도 없고, 기껏해야 얹혀살겠다고 찾아와서 이모 내외분의 새벽 단잠을 깨울 염치는 내게도 없었다. 내가 남편과 그렇게 옷 보따리 트렁크를 놓고 앉아 있던 효창공원은 처녀시절 내가 그이와 만나 가슴 두근거리며 산책하고 미래를 설계하던 곳이었다. 눈을 감자 사랑에 빠져 이와 함께 그 공원을 걷던 꿈 같은 시절의 내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어 그 위에 또 하나의 나, 이미 처녀시절은 가고 결혼하여 그의 아내가 된 새로운 모습이 겹쳐져 떠올랐다. 임신한 몸으로 단칸방 하나 준비하지 못해 이렇게 남편과 함께 낡아빠진 트렁크를 벤치삼아 빈 공원에서 날 이 밝기를 기다리는 처량한 새댁의 신세, 그것은 처녀시절의 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새벽부터 아침에 이르는 시간의 거리가 그렇게 길게 느껴진 날이 또 있었던가. (이순자 자서전 85 페이지에서)
"지금 우리 군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은 양심과 실력을 갖춘 장교라네. 하지만 현재 우리 군의 실정으로는 양심 있는 장교가 사람답게 가정을 꾸려가기는 정말 어려운 여건이지. 나도 젊은 장교시절을 지내보아서 그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네. 그러나 가난은 결코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고 피해갈 일도 아니네. 또 장교의 아내되는 자도 남편이 원칙이 아닌 것과 타협하고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내조를 잘 해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 사정을 생각해서 내가 이번에 이 집을 구했네. 비록 전셋집이고 함께 살자면 불편한 점이 많겠지만 들어와 함께 살도록 하게. 사정이 나아질 때까지 같이 살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생활 문제는 어떻게 풀어갈 수 있지 않겠나.” (이순자 자서전 86~87 페이지 중에서)
아버님의 진급으로 갑자기 서울로 올라오게 된 동생들은 예전에 내가 경험했던 잦은 전학으로 인한 어려움울 똑같이 겪고 있었고 때마침 입시 까지 앞두고 있었다. 첫아이를 임신해 유난히 입덧이 심하던 내가 팔을 걷 고 동생들의 가정교사 노릇을 시작하자 가장 고맙게 생각하신 분은 어머 님이어서 친정살이에 대한 내 송구함을 다소 덜어주었다 또 언니, 형부와 함께 사는 것을 연신 즐거워하던 동생들도 시집간 언니가 자신의 공부까 지 도와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껴서인지 차츰 학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는 동생들을 보며 어머님도 내심 무척 대견해하셨 다. 동생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난 옛날에 어머님이 하셨던 것처럼 어김없이 침을 퉤퉤 뱉어가며 그이의 군화를 닦는 일에 솜씨를 부렸고 작업복에 풀을 먹여 날이 서도록 잘 손질해 다려놓기도 했다. (이순자 자서전 88 페이지 중에서)
나는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결국 그렇게 말씀드렸고 내막을 모르시 던 시부모님은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까지 멀어진다는 말은 정말 맞는 것 같다. 몇 달 전에는 그렇게 정이 들어 눈물을 뿌리며 하직했던 시부모님이 그동안 뵙지 않고 지내다 만나뵙는다고 그렇게 서먹하고 어렵게 느껴졌다니 말이다. 결국 남남으로 시작한 며느리가 낯선 가문에 들어와 손님이 아니라 며느리란 이름의 자식이 되어가려면,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고 곁에서 모시는 길 밖에는 왕도가 없다는 그 소중한 진리를 그날 나는 새삼 깨닫고 있었다. (이순자 자서전 91 페이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