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자서전 영상 오디오북
우리 부부가 처음 마련한 우리만의 첫 보금자리 보광동 집은 보광동 버 스 종점 부근 넓은 채마밭 끝에 있었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보광동 9호9 통9반이란 다정한 주소를 지닌, 집 앞을 나서면 채마밭 입구에 서 있는 동네교회가 보였고, 장독대에 올라 발꿈치를 들면 저만치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집이었다. 대지 50평에 건평 17평, 방 세 칸에 부엌 욕실 긴 마루 작은 마당, 장독대가 있는 아담한 양옥집이었다. 친정아버님은 기왕 집을 마련하려면 좀 큰 것으로 장만하라고 하셨지만 막상 그렇게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따로 용도가 있었던 20만 원을 떼어놓고 100만 원은 다시 친정 아버님께 관리를 부탁드린 후 나머지 80만 원을 들여 구입한 집이었다. (이순자 자서전 130 페이지에서)
따로 떼어놓은 20만 원은 시댁식구들을 위해 쓸 작정이었다. 사실 돌이 켜보면 친정살이를 하며 수입의 모든 것을 ‘집장만하기 통장’에만 넣느라 그 긴 세월 동안 시부모님께 반듯한 선물 하나 해드리지 못했었다. 그렇게 불효한 자식으로 살다 보니 남편도 나도 가난한 살림에 고생하시는 시 부모님 생각만 하면 늘 마음이 괴로웠다. 언제나 옥양목 두루마기에 흰 고 무신, 낡은 중절모에 부러진 안경에 끈을 매어 귀에 건 시아버님 오랫동안 치아가 없어 입가에 합죽하게 주름이 잡혀버리신 시어머님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큰맘 먹고 당시로선 큰돈이던 20만 원으로 뭘 사드릴까 궁리하던 우리는 부모님께 무엇이 가장 필요하신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시아버님께는 고급양복지로 두루마기 한 벌을 맞추고 구두와 안경을 준비했다. 시어머님께는 물론 틀니가 가장 급했다. 그리고 고운 빛깔의 한복 두 벌과 손가방 하나를 추가로 마련한 후 두 분 부모님을 위한 용돈도 따로 넉넉히 떼어놓고 시동생과 시누이들의 선물도 장만했다.
(이순자 자서전 132 페이지 중에서)“당신이 고생 고생해 겨우 집 한 칸 장만하자마자 이런 부탁을 하려니 참 면목이 없소. 하지만 당신은 훗날 내가 잘되면 잘해줄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겠지만 부모님은 벌써 저렇게 나이가 드셔서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시는데 언제까지 기다려주실지 어떻게 알겠소? 내 평생의 소원이니, 이번 기회에 부모님을 모셔서 원 없이 효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내 그 고마움은 일평생 잊지 않으리다.” . (이순자 자서전 134 페이지 중에서)
당시 서울에서는 을지로 2가 신영병원의 민병철 박사가 간 전문의로 유명했다. 남편은 직접 민 박사를 찾아가 아버님의 치료를 부탁했고 아버님 은 상경하시자 곧 입원하실 수 있었다. 환자가 워낙 건강체질이라 최악의 경우 간암으로 판정이 나와도 환부만 잘 도려내면 살려낼 수 있다는 민 막사의 말에 우리 내외는 일단 안도했다. 하지만 걱정스럽게도 정밀검사에 들어갈 무렵 아버님은 자주 고열에 시달렸다. 이후 의뢰서를 들고 찾아 간 원자력병원에서도 오랜 시간 간 사진을 찍는 일이나 조직검사를 받는 일에 무척 지쳐하셨다. 그 모습에 걱정이 되면서도 곧 아버님이 쾌차하시리라고만 생각했다. (이순자 자서전 137 페이지 중에서)
그날로부터 일곱 달 반을 아버님은 우리 곁에 더 계셔 주셨다. 병세는 기울어 이미 생명은 황혼이었고 대소변을 가리는 일조차 힘겨웠던 마지막 투병의 벼랑 끝이었다. 그래도 그 일곱 달 간의 병상은 시댁 일곱 남매의 눈물겨운 정성으로 채워진 따뜻한 병상이었다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모두 넉넉지 않은 처지였고 또 생업으로부터 빠져나오기도 힘겨웠지만 서로 돌아가며 한시도 아버님의 병상을 비우지 않고 아버님을 돌봤다. (이순자 자서전 138 페이지 중에서)
그렇게 반 년쯤 지나자 아버님의 병세는 갑자기 호전되는 듯했다. 형제 들이 정성으로 구해오던 한약이 효험이 있는 모양이라고 모두들 흥분했 다. 아버님의 좋아지신 모습에 안도감을 느낀 그이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독일정부 초청의 시찰 길에 올랐다. 당시 우리처럼 분단국가였던 서독정부는 한국군 장교 초청 시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시찰일정은 35 일간이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 아버님께 큰절을 올린 것이 그이에게는 아버님께 올린 마지막 인사가 되고 말았다. (이순자 자서전 141 페이지 중에서)
아버님 운명 당시 남편은 이미 귀국길에 있었다. 그 비통한 소식을 가장 먼저 남편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당시 불편한 통신사정으로는 귀국길의 남편에게 그 소식을 전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사정으로 남편이 미처 귀국하지 못한 상황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많은 분들이 오셔서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셨다. 감사하게도 박 대통령께서는 전갈을 보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종규 경호실장을 보내어 조의를 표해 주셨다. (이순자 자서전 143 페이지 중에서)
세계의 자유 민주 영웅
박정희 대통령 각하 !
박정희 대통령님과 함께 울던
서독 수상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피안의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