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자 자서전 영상 오디오북


제2장 3화 시댁생활



   그러나 꿈 같던 신행 사흘이 어느새 지나고 날이 밝으면 정든 식구들과 헤어져 시댁으로 가야 하는 마지막 밤에는 온갖 걱정으로 마음이 무겁기만 했었다. 우리는 미국 유학을 위해 대구 부관학교에서 군사영어교육을 받고 있던 그이의 교육과정이 끝날 때까지 4개월 동안 대구 봉덕동 시댁에 들어가 시부모님을 모시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이순자 자서전 76~77 페이지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76~77쪽

   그날따라 그이와 함 께 들어설 시댁 문턱이 왜 그렇게 높게만 생각되는지, 아무리 마음을 다잡 아도 자꾸 움츠러들기만 했다. 그날 그이는 내가 우여곡절 끝에 마련해준 그 양복차림이었고 난 한복차림이었다. 친정인 대구 대명동에서 시댁인 봉덕동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그이는 그날 일찍부터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내 서툰 한복맵시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추운데 오느라고 욕 봤지. 어서 오이라.”
   "올케야. 부모님 모실라고 이리 치분데 왔나. 고맙기도 하제. 올케 볼라고 내사 짬을 내서 안 왔나.” 처음 인사를 드리러 왔던 날처럼 이번에도 어머님과 셋째 시누이가 대문까지 달려 나와 내 손을 잡아주셨다. (이순자 자서전 78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78~79쪽

   일 못하는 태가 줄줄 흐르는 며느리였다. 그래도 살림해보겠다고 애를 쓰는 것이 귀엽고 안쓰러우셨던지, 시아버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이 면 큰 가마솥에 물울 길어 가득 채워주시고 내가 나오기 전에 미리 군불 까지 지펴주셨다. 이른 새벽 ‘어떻게 그 추운 부엌에 들어가나’, 끔찍한 생 각에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부엌에 들어갔을 때 이미 불이 지펴져 훈훈 한 데다 가마솥 가득히 더운 물마저 끓고 있어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었다. 그러다 저 멀리서 대문을 열고 나가시는 시아버님의 ‘어험’ 하는 큰 기침소 리가 들려오면 사정을 알 수 있어 코끝이 시큰해졌었다. 또 빨래하다가 부엌에 들어갈 일이 생겨 자리를 비우면 나와 동갑내기 시동생은 얼른 구정물을 버리고 정결한 물을 한 통 길어놓고는 저만치 달아나곤 했다. (이순자 자서전 80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80~81쪽

   사랑이 많은 부모님일수록 엄하다고 했던가 시어머님의 자식사랑은 깊고도 엄하셨다. 그런 어머님이 그분 생일만 되면 멀리 육사에 가 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가난한 살림에도 반드시 그 ‘약탕기의 쌀밥’을 지으셨다고 한다. 지금은 집안의 아름다운 전설이 된 그 약탕기의 쌀밥은 평상시 쌀밥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자식들을 위해 생일에만 특별히 마련하는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생일예식이었다. 휴가가 되어 집에 오면 그이는 그때까지 치우지 않고 찬장 위에 고이 놓여 있는 그 ‘생일 쌀밥’을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먼 서울에 있어 정작 생일 당사자인 그분은 먹을 수 없는데도 어머님은 매년 묵묵히 그 예식을 치러오고 계셨던 것이다. (이순자 자서전 82 페이지 중에서)

이순자 여사 자서전 8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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