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6월 11일
광주 사태의 불씨 윤상원과 치유자 한경직 목사미국이 경제 발전의 토대가 필요하던 때에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장기 집권할 특권을 부여한 미국 국민은 현명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도 박정희 대통령처럼 경제 정책에 뛰어난 지도자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미국 경제는 사정은 매우 나빴다. 정부가 경기 부양책을 쓰면 쓸수록 점점 더 대공황의 늪에 미국 경제가 빠져들었기 때문에 정부는 시장 경제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루즈베트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제 개발을 하는 뉴디일 정책을 실시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처럼 그에게도 국민에게 자신감과 희망을 주는 호소력이 있었으며 좋은 경제 정책을 강하게 밀고 나가는 지도력이 있었다. 한국에서 박정희 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다시 나타나기 힘든 것처럼 미국에서 루즈벨트같은 대통령이 다시 나타나기 힘든 것을 안 미국 국민은 루즈벨트가 몇번이고 대선에 재출마할 수 있도록 미국판 유신 헌법 개정을 하였다.박정희 대통령 못지 않게 검소한 종교인은 한경직 목사님이셨다. 대교회 원로목사답지 않게 너무 검소하게 생활하시던 그 분은 교인이 새옷을 선물하면 그 날로 남에게 주고 늘 헌옷차림으로 지내셨다. 이분이 1980년 8월에 당시 전두환 장군도 참석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축도 순서를 맡았다는 이유로 2,000년 4월 19일 하오 1시 15분에 이 땅 위에서의 나그네 여정을 마치시기 전까진 모진 수모를 당하셔야 했다. 5.18 광주 사태 때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의 소리가 컸으므로 최규하 대통령께서 그해 7월 하야의 뜻을 밝히심과 더불어 전두환 장군에게 대통령이 될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하셨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구국의 결단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반민주적 시위를 반년간 선동한 김대중이 아니라, 본분에 충실한 전두환 장군이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국가의 기강을 잡고 국력을 발전시킬 적임자였다. 우유분단했던 최규하 대통령의 큰 업적은 전두환이라는 새 지도자를 발굴하여 내각에 추천한 일이었다. 내각이 최규하 대통령의 뜻을 받듦에 따라 그해 8월에 전두환 장군을 국가의 새 지도자로 띄우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며, 전두환 장군이 참석하는 조찬기도회에서 한경직 목사님이 축도 순서를 맡으셨다. 그리고 그 기도 중에 "여호수아와 같은 장군이 되게 하소서"라는 글귀가 있었다 한다. 그래서 어째서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지도자가 5.18 광주 학살의 책임자을 위해 축복 기도할 수 있느냐는 비난이 이십 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광주 사태 당시 발포 명령과 전두환 장군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한경직 목사님의 판단이 옳았다. 문익환과 홍근수 같은 정치 목사들의 정치적 판단은 늘 그릇되며, 한경직 목사님 같은 진정한 복음의 전도자는 남보다 더 맑은 혜안을 가지고 있다. 편견과 아집과 탐욕이 있는 자들의 눈은 사실을 보는 힘이 있기에는 너무 흐리다.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은 정계의 원로로서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은 교계의 원로로서 전두환 장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사단장 시절 청렴하며 사병들의 맨앞에서 사병들과 더불어 뛰던 그의 모습을 본 군인들도 그가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보았다.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결코 밝혀질 수 없는 두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는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이 발포명령자였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5월 18일 오후 4시 40분에 시작된 진압 작전의 명령자는 호남 출신이요 광주향토사(31사단) 사단장이었던 정웅 소장이었다. 그리고 그 위 명령자는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이었다. 광주 일대의 경찰서들이 폭도들의 습격을 받아 모두 파괴되고 경찰들과 그 가족이 대피한 상황에서 내무부의 요청에 따라 광주향토사가 시위 진압 작전에 나섰던 것이다. 미국인과 한국인의 차이점은 미국인은 육하원칙의 근거가 없는 유언비어는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직 일반 시민들은 전두환이라는 이름 석자조차 들어본 적이 없던 때에 폭도들은 그 시위 진압 명령자가 전두환이라며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고 외쳤다. 그러면, 만일 그 유언비어를 조작해 낸 폭도는 천리안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실을 알았다면 전두환 당시 합수부장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그런 지시를 하였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육하원칙에 입각한 사실이 없는 유언비어는 미국에서는 코웃음거리도 안된다. 그러나 한국 사림들은 그 유언비어에 사반세기 동안 속아왔다. 미국과 한국의 국력의 차이는 이런 의식 수준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같은 장성이라도 이희성 장군은 당시 전두환 장군과는 비교도 안되는 상급자였다. 일개 합수부장이 계엄사령관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 단순 명료한 사실이 그토록 어려워서 유언비어에 속아넘어간다는 말인가! 5.18 광주 사태에 대하여 또 하나 증명될 수 없는 사실은 그것이 민주화 운동이었다는 주장이다. 당시 도지사를 강제로 축출하고 도청을 점령하여 해방구 사령부의 기지로 삼았던 폭동지도부(그들은 항쟁지도부라는 표현을 씀) 삼백 명은 노동자, 양아치, 무직자,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들 및 십대 청소년들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들의 도청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도청 사무실에 폭약을 설치한 것을 항쟁이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단 한 쪽이라도 그들의 민주주의 철학을 진술하는 글이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단 한 장의 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전혀 민주주의 사상이 없이 어떻게 민주화 운동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윤상원은 무엇 때문에 폭동을 선동하였을까? 그가 북한과 내통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잠시 접어둔다면 아마 상대적 빈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경직 목사님이나 박정희 대통령처럼 집 한채 없었던 분들에게는 상대적 빈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숭고한 정신적 가치관이 있는 자는 가난해도 결코 가난하지 않다. 그러나 지난 5월 31일 자살한 서울대 시간 강사에게는 상대적 빈곤을 절실한 문제였다. 서울대 박사요 부부가 대학 강사이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상대적 빈곤감은 그에게 자살을 택하게 하였다. 윤상원도 남달이 상대적 빈곤감을 느끼는 성격의 사람이었던 듯하다. 1950년 8월 15일 당시 전라남도 광산군 임곡면 샘골에서 부친 윤석동씨의 3남 4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윤상원은 임곡국민학교와 광주북중학교를 거쳐 1967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71년 전남대학교 문리대 정외과에 입학해 생활하던 그는 부친의 가업이 기울면서 잠시 휴학하고 막노동을 해야 했으며 누이도 공장에 여공으로 취업했다. 이때부터 그는 공산주의 서적 독서에 심취했다. 1978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다시 막노동을 하며 노동자들 의식화 교육을 하였다는 점에서 좌익 혁명가였다. 그는 막노동자이되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노동자였으며, 크고 작은 분규가 있는 곳에는 어디나 자기 패거리를 데리고 나타났으니 아주 독특한 인물이었다. 자살한 서울대 시간강사의 문제는 소망을 상실한 문제였을 것이다. 한 미국의 노숙자는 48세에 버클리대 수석 졸업을 하였다. 인생길에는 비오는 날도 궂은 날도 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오늘의 좌절을 이기며, 소망을 상실한 사람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다. 한국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패배감을 가지고 살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패배감, 명문대에 혹은 인기학과에 진학하지 못한 패배감이 있다. 배움의 대열에서 낙오된 자들의 패배감이 있다. 그 서울대 강사에게는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 때 주변에서 도와주는 이들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다는 현실 때문에 우울해졌다고 한다. 윤상원도 전남대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던 중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막노동을해야 했던 것이 그토록 가슴아팠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상대적 빈곤감에 대한 해답은 자살도 폭동 선동도 아니다. 5.18 광주 사태의 근본 원인은 하층 서민의 혁명이었을진대 그 소외된 서민의 상처에 대한 치유책은 윤상원이 아니라 한경직 목사님께 있었다. 무엇이 영락교회의 출발이었던가? 이북에서 피난온 삼팔 따라지들의 천막교회였다. 그 당시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무시받는 집단이 삼팔 따라지들이었다. 맨손으로 월남한 그들에게 소망은 무엇인가? 그들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가? 그렇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들도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윤상원이 북한과 내통하고 있었는지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지만 그는 우리 사회의 상대적 빈곤의 문제를 계급 투쟁으로 해결하려는 혁명가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비록 그가 정당으로는 김대중의 신민당 소속이었다 할지라도 그는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경제를 멍들고 병들게 하는 그 길이 해결책인가? 그의 꿈대로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오히려 국가 경제를 병들고 시들게 한 후에 그 고통은 서민에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광주 서민의 상처는 전국의 서민들이 공유하는 상처요 그 상처 치유책은 폭동 선동이 아니라, 한경직 목사님처럼 가나한 서민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설교이다. 5.18항쟁 자료는 의하면 광주향토사 정웅 장군(호남출신)이 시위 진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던 1980년 5월 18일의 상황 전개를 이렇게 기록한다: 시위대는 錦南로3가 가톨릭 센터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경찰의 페퍼포그에 밀려 중앙 로로 꺾어진 다음 때마침 忠錦지하상가 공사로 자갈이 나뒹굴던 중앙로에서 일제히 돌을 집어들어 忠壯로 파출소를 향해 내던지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유리창이 박살나고 내부에 있던 경찰들이 옥상으로 대피했다... 일단 불붙은 시위대의 군중심리는 경찰에 대한 계속된 공격으로 이어졌 다. 낮 12시 45분엔 山水동 파출소가 습격을 당했고 黃金동학생회관 앞에서 는 도시락을 먹던 경찰들을 시위대가 기습, 경찰이 도주하자 페퍼포그 차 에 불을 질렀다. 이때 이미 錦南로 시위군중은 1천 5백명, 忠壯로 골목골목 에는 1천 6백명의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음료수 병과 돌을 던지며 시위의 강도를 더해갔다.(시위대수:95년 7월 18일 검찰수사기록)>> 당시 상황을 광주의 한 언론인은 이렇게 회고한다: 필자는 80년 5월 18일 전라남도 광주시 광산동에 위치한 지방지 전남매일신문사 편집국 제2사회부 차장직에 재직하면서...18일 오후 7시가 되자 전남도청 앞에 자리잡은 전투경찰 중대병력 규모가 시위 대학생들의 도청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방패와 진압봉을 앞세우고 두겹 세겹으로 정문을 막고, 수백명의 시위 대학생들은 손에 손에 횃불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조선대학교 방향으로 질서정연하게 행진해 나갔다. 어둠이 깔린 밤8시 조선대학 광장에 집결한 학생 시위대는 평화적인 횃불시위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 이렇듯, 광주 언론인의 증언에 따르면 폭도들이 경찰서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간은 5월 19일 오후 세시였다. 이와 유사한 무장 시민군의 민중 봉기가 1975년 월남 중부지방에서도 있었다. 아마 그들은 그것이 북쪽의 공산군에 남침의 기회를 줄 의도는 없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주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민중 봉기를 기회로 월맹군이 남침하여 4월 15일에 월남이 패망하였다. 나라가 패망하고 난 후에 민주화 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김대중은 5억불을 대북비밀송금할 때 핵무기 개발 자금으로 주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김정일은 그렇게 사용하지 않았던가. 광주사태 때 휴전선의 집결한 인민군은 광주 사태가 다른 도시들로 확대되는 것을 총공격의 신호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주향토사 사단장 정웅장군(호남출신)이 2개 공수대대를 보내어 시위 진압 작전을 실시한 것은 정당한 일이 아니던가. 그리고, 5월 18일~19일 양일간의 시위 진압 책임자는 광주의 정웅 장군이었는데, 어째서 그 책임을 전두환 합수부장에게 뒤집어씌우는가? 거짓말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것을 민주화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국력을 소모시키며, 국력이 약해지면 그 피해는 서민에게 돌아간다. 거짓말은 결코 광주 사태의 상처를 치유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사실에 충실하고 진실할 수 있다면, 그리고 한경직 목사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사랑과 위로와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 광주 사태 상처를 치유하는 올바른 길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