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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미군은 양민 학살범인가 자유의 용사인가?

 


한국전쟁 동영상/ "젊은이들이여 전쟁을 아는가?".

 

  노근리 사건 희생자 백여 명을 추모하기 위하여 미국이 이미 수백 만불의 보상금을 지불하였음에도 좌익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기 위해 계속 이 사건을 이용하고 있다. 미군은 우리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삼만 육천 명이 전사하였으며, 근 이만 명에 가까운 미군이 북한에 포로로 잡혀간 후 아직 생사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수십 만 명이 한국전 때 입은 부상으로 평생 중환자실에서 지내거나 불구자가 되었다. 대한민국 삼천만 인구의 자유와 생명을 보존해 주기 위해 이런 영웅적인 희생을 치룬 미군에 좌익이 노근리 양민 학살의 혐의를 뒤집어 씌우는 것은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이다. 만일 살인 강도 만난이를 몸에 상처를 입어가며 구해주었더니 강도로부터 구해줄 때 조금 찢어진 옷 때문에 생명의 은인을 오히려 범죄자로 몰아가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이라크 지형을 인공위성으로 손바닥 뒤집듯 정확히 관측하는 현대전에서도 미군이 미군에 오폭하는 사고는 있었다. 1950년 7월 26일에 노근리를 침공하는 인민군 탱크의 전진을 저지시키기 위해 출전한 미군 전투기도 당시 지도의 불완전함 때문에 미군과 피난민들에게 오폭한 사고가 있었다. 육안으로 적군과 아군 식별이 안됨으로 생긴 실수는 우방 터키군에게도 있었다. 1950년 10월 16일 압록강까지 진격하였던 국군 장병들은 승리의 희열에 넘쳐 수통에 압록강 물을 담았다. 인민군에게 서울을 뻬앗긴지 백일 만에 거둔 역전승이요, 꿈에도 그리던 남북 통일이 실현되는 순간이기에 그 희열은 더욱 넘쳤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며칠 후 우방 터키군의 공격에 전멸을 당하였다.

    터키군이 1950년 10월에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중공군 인해 전술이 시작되었으며, 터키군은 통역조차 없이 압록강 전선에 배치되었다.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중공군 1개 부대를 전멸시켰다는 보고를 U.N.군 사령부로 올렸기에 이상해서 확인해 보니 터키군이 전멸시킨 부대는 한국군 부대였다. 그 실수 후에 정말 중공군이 나타나자 물밀듯 쳐들어오는 적의 대군을 본 터키군 지휘관은 자기 군모를발뒷금치에 내려놓았으며 터키군 병사들은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단 한명도 그 모자선 뒤로 한걸음도 후퇴하지 아니하고 중공군을 막아 싸우다가 모두 장렬히 전사하였다.

    한국전 최대의 위기는 7월 20일 이후 열흘 간의 전투였다. 당시 한국에 파병된 미군들은 취침 중에 소집되어 배에 실려 한국 최전선 전투에 투입되었으니 막사도 없었으며, 전략을 세울 겨를은 커녕 식사할 틈도 없이 북한군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미군으로서는 일본에서 군정 업무를 보던 24사단과 25사단을 한국전에 파병한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 두 사단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참패하여 궤멸되었으며, 대전이 함락된 7월 20일의 한국전 최대의 위기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국의 두번째 임시 수도 대구와 그 이남은 방어한다는 맥아더 장군의 의지가 확고하였기에 미 제1기병사단이 7월 22일 신속하게 한국에 파병되어 24사단 작전 지역을 인계받았으며, 제1기병사단 7연대는 노근리가 그 전략적 요충지인 영동 전선에 배치되었다.

    북한의 막강한 탱크 부대를 미군은 2차 대전 때 쓰던 녹슨 구식 소총으로 막아싸워야 했던 것이 장비의 열세라면 최소한 군의 사기는 필요하였다. 그러나 7월 5일 오산에서 첫 전투가 시작된 이래 미군은 북한군에 연전 연패를 당하였으며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수천 명의 미군이 전사하였으니 아마도 당시 미군은 심리적으로 공황 상태에 있었을 것이다. 노근리가 그 전략적 요충지였던 노근리 전투를 더 힘들게 한 것은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의 게릴라 전술이었다. 1975년에 월남을 패망케 한 것도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월맹 공산군이 월남 중부 지방에 침투하여 일으킨 월남판 광주사태였다. 그리고 1950년 7월 25일부터 7월 29일까지 노근리 지역에서 있었던 영동 전선 전투에서 미군이 피난민으로 위장한 인민군과 빨치산과 유격대를 무슨 수로 순수 피난민과 구별해 낼 수 있었겠는가.

    1950년 6월 25일에 남침한 김일성은 그 다음날인 6월 26일에 평양방송을 통해 "남반부 빨치산들은 해방구를 확대 창설해 적의 배후를 공격, 소탕하라"고 촉구하였다. 6.25 전쟁 때 인민군 못지 않게 무서운 적이 빨치산과 남로당 치안대 등 남한 내부의 빨갱이 세력이었다. 당시 빨치산은 민간인 복장 속에 무기를 감추고 미군을 악랄하게 공격하였다. 그 한 예가 1950년 8월 25일 지리산의 이현상 부대가 경남 거창의 미군사령부를 습격하여 100 여명을 전사시킨 일이었다. 빨치산 외에도 유격대가 있었으며, 남로당의 빨갱이 세력의 남한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미군의 치안 유지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장인이 그 간부 중 하나였던 남로당 빨갱이들이 경찰과 공무원과 지방 유지들 및 그 가족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있었다.

    미련한 좌익은 강도의 칼에 찔리고 있는 피해자를 의인이 구출해 줄 때 조금 찢긴 옷 때문에 의인이 학살 범죄자라고 주장한다. 만일 당시 미군의 전력이 북한군보다 우월하였다면 그런 어거지 주장의 근거가 조금이나마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불행히도 당시 상황은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장비가 월등히 우세한 적의 탱크 부대를 미군 소총 부대가 무슨 수로 막아낼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같은 소총수끼리의 교전에서도 죽는 쪽은 미군이었다. 북한군은 남침을 위한 사격 훈련을 몇년간 받아왔다. 그러나 한국에 첫 파병된 미군 병력은 어제까지 일본의 미군 군정 사무실에서 펜대 잡고 근무했던 행정병들이었다.

    일본의 미군 군정 시절에 전투병은 필요 없었다. 군정 사무실에서 군인이 하는 일은 관공서에서 행정 관리가 하는 일과 똑같은 일이었다. 펜대만 가지고 근무하던 미군 병사들이 7월 1일 새벽 취침 중 갑자기 집합되어 2차 대전 때 쓰던 구식 녹슨 총 한자루씩 지급받은 채 배에 실려 한국 전선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비전투병력이라도 한국에 파병했어야만 했을 만큼 한국이 멸망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미군 병력은 인민군 남하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총알받이용으로 배치되었다. 미국은 한국을 구하기 위해 수만 명의 자국 젊은이들을 희생시켰던 것이었다.

    부대 막사는 커녕 취사 시설조차 변변치 않았던 미8군 사령부에 7월 20일의 참패 소식은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미24사단과 25사단 병력이면 충분히 북한군을 방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결사 항전에도 불구하고 7월 20일에 대전은 함락되었으며 미24사단은 절반이 넘는 병력을 잃었으며 사단장 딘 소장이 실종되었다. 궤멸된 24사단 대체 병력으로 미1기병사단이 한국에 파병된 날이 7월 22일이었다. 그러나 2차 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하사관들은 이미 24사단에 착출되었었기에 1기병사단은 상병이 하사관 역할을 해야 했을 정도로 오합 지졸이었으며 이제 갓 17세, 18세의 꽃다운 나이의 신병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미1기병사단이 대전 이남에 배치되었을 때는 이미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한 후 신속히 남하하고 있었으며 제1군단 예하 3사단은 7월 22일 투입된 미1기병사단 지역을 공격하였다. 북한군은 정규군 전술로 '일점양면 전술'이라는 포위전술을 구사하며 신속히 진격하였으며 미군을 가장 당혹하게 만들었던 후방 침투전술과 게릴라 전술을 교묘하게 결합하여 운용하였다. 북한군의 사단 정찰대는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미군들의 전투진지, 포대위치, 지휘소 등을 탐지해 내었고 일부 병력은 후방의 애로를 차단함으로써 미군의 퇴로를 막았다. 북한군 정찰대는 자주 민간복장으로 위장하여 미군 방어선을 통과한 후 후방에서 미군 진지를 급습하였다. 정규 정찰대를 활용하는 것 이외에 특별히 편성하여 남파된 유격대, 지역 빨치산 및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작전에 활용하여 미군들을 습격하고 교란시켰다. 미군들이 가장 식별하기 어려운 북한군의 침투전술은 게릴라를 피난민으로 가장하여 미군진지 후방으로 투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와중에서 미1기병사단 7연대 2대대는 문제의 노근리에 배치되었다.

    미련한 좌익은 1950년 7월 22일에 파병된 미 1기병사단과 금년 5월에 이라크에 파병된 한국군 사이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못한다.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을 뿐 전혀 승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군이 영동 전선을 통과하여 낙동강을 도하하는 날이 대한민국의 종말을 의미하던 때에 미 1기병사단이 적의 남하를 잠시나마 저지시킨 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다. 건강한 사람이 밥 한 그릇 덜 먹어도 생명에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응급환자에게는 링겔 주사 한병이 죽음과 삶의 차이이다. 이처럼 미 24사단이 궤멸되었을 때 미 1기병사단이 신속하게 그 작전 지역을 인계한 것은 풍전 등화의 한국을 구한 의미가 있다.

    때는 바야흐로 적장 김일성이 무슨 일이 있더라도 8월 15일 이전에 부산까지 정복하라는 명령을 내린 때였으니 8.15 5주년 기념일에 통일 기념행사를 치루려던 것이 김일성의 음흉한 꼼수였다. 그리고 그러기에 노근리가 그 전략 요충지였던 영동 전선을 미군은 그토록 치열하게 방어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7월 25일 노근리 철로에서 피난민을 검문했던 7연대 H 중대 제임스 컨즈의 증언을 들어보자. "어떤 피난민 여자는 소형 무전기를 등에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때 말이죠. 인민군은 아이 업은 여자들 등에 수류탄을 감추고 다니게도 했다니까요." 컨즈는, 당시 피난민을 위장한 인민군이 너무 많아 그들을 색출하는데 고심했다는 말도 한다. 당시 1사단 일지에도 동일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피난민중에 임산부와 아기가 있었다. 수색을 해보니 그 여자는 임신한 것이 아니라, 소형 무전기를 감추고 있었다."

    다음날인 7월 26일 미공군의 오폭의 희생자 중에는 미군도 있었는데 그 상황을 컨즈는 이렇게 증언한다. "인민군 탱크가 밀려오고 있었는데 우린 탱크가 없어서 미공군이 그때 우릴 구해 준 겁니다." 패터슨도 이에 동의한다. "노근리사건 말입니까? 거기에 대해서 기사 나온 걸 많이 봤습니다. 노근리 사건은 전쟁이 빚어낸 불행한 사고였습니다. 노근리사건 전날 인민군 탱크가 밀고 들어와서는 아군 지역으로 침투해 왔었죠." 그날 노근리 철로의 피난민 행렬 뒷편으로 인민군 탱크들이 따라오고 있었고 미군은 탱크에 대적할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비행기 폭격이 불가피하였다고 한다.

    노근리 피해자측에 유리한 증언을 한 에드워드 데일리(Edward Daily)에 따르면, 그날 불과 몇킬로 전방에서 노근리 철로를 따라 돌격해 오던 북한군 탱크가 아군을 향해 포를 쏘기 시작하였다. 당시 작전 지도 6722-1번 한구석에도 27일 아침 8시 45분 영동에 수백명의 적이 나타났다는 첩보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데일리는 "사실 그때는 7연대가 전쟁에 투입된 지 겨우 2,3일 밖에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경험이 없는 우린 굉장히 당황했고 두려웠고 일종의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라고 당시 정황을 회고한다.

    데일리는 또 "굴 안에서 총탄이 발사되면서 번쩍하는 걸 봤구요, 총소리도 들었습니다"라고 말하며 패터슨도 "그날 사격이 시작되었는데. 먼저 총을 쏜 건 이 굴안에서였습니다. 우리쪽에서가 아니라, 피난민들쪽에서 말입니다. 그쪽에서 먼저 H중대에 사격을 가했지. H중대가 사격을 한게 아닙니다"라고 증언한다. 이어 데일리는 "짐 컨즈하고 사병들 몇이 굴 안에 들어가서 무기하고 피난민 복장을 한 인민군을 발견했죠. 수통과 소총 세정, 자동소총이 아닌 권총을 찾아냈대요"라는 증언도 덧붙인다. 짐 컨즈도 "다음날 굴 안에 들어가서 보니까 수류탄 몇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형기관총도 봤구요"라고 증언한다.

    노근리 사건이 일부 노근리 주민에게 1950년 7월 26일 하루의 비극이었다면 노근리 전투에서 생존한 미 1기병사단 7연대 병력 대다수는 그날 이후 45일간의 낙동강 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하였다. 그 몇 안되는 생존자 중 플린트는 한국 기자가 방문할 당시 병원에서 17개월을 보냈다기에 기자가 물었다. "파킨스씨 병 때문이었나요?" 고개 저으며 그는 "총에 맞았다"고 대답했다. "총을 맞았다고요? 어디서요?" "한국전 때요." "한국에서요?" "저는 미국 정부에서 퇴역군인한테 주는 289달러의 연금도 거절했어요. 많은 전우들이 전쟁터에서 죽는 걸 봤거든요." 플린트는 여전히 과거의 전쟁터에 머물러 있는 듯 했다. 한국전이 끝난 이후 그는 정부 연금도 거부한 채 약에 의지해 평생을 살아왔다. 이렇듯 노근리 사건의 또다른 희생자였던 플린트는 "당시 한국전 상황에선 피난민 중에 인민군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는 상황을 항상 가정해야 했습니다"라고 회고한다.

    데일리는 그날 7월 26일 이런 명령이 하달되었다고 증언한다: "어떤 피난민도 작전지역을 통과시키지 말라. 반복한다. 피난민이 작전지역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저지할 것이며 그들을 적으로 간주하라." 피난민 중에 민간인 복장의 인민군과 빨치산과 남로당 빨갱이들이 섞여 있었음을 암시하는 명령문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7연대장 니스트 대령은 7연대 일지에 "피난민 속에 인민군이 침투해 있다"고 기록하였으며, 1사단 일지에도 1사단장 게이 소장이 '무고하게 보이는 흰옷의 무리중의 상당수가 인민군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여기서 우리는 그날 미8군 워커 중장이 '피난민은 단 한사람도 전선을 넘을 수 없고 무리를 지어 움직여선 안된다'라는 지침을 내렸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하루전까지만 해도 피난민 이동을 도와주던 미군의 정책이 왜 갑자기 바뀌었을까?

    좌익은 1950년 7월 26일이 우리나리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때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그토록 노근리 사건을 왜곡한다. 바로 한달 전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된지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십만명의 국군 병력 중 6월 28일 한강 둑 남쪽에 집결한 병력이 고작 만 여명이었으며, 그나마 무기를 버리고 한강을 헤엄쳐 건너온 패잔병들이었던 당시 상황이 태평 성대였는가?  한국 정부가 수도 서울을 버리고 대전에 피난온지 한달도 채 못된 7월 20일에 대전이 함락되자 다시 대구로 임시 수도를 옮겨야 했던 상황이 태평 성대였는가? 전방에서는 북한군이 쳐들어오고 후방에는 빨치산과 유격대와 남로당 빨갱이들이 득실거리던 상황에서 임시 수도 대구마저 적군의 손에 함락되면 나라 운명은 어찌 되었겠는가?

    노근리가 전략적 요충지인 영동 전선은 한국의 새 임시 수도 대구를 인민군이 공략할 길목이었다. 그 길목을 사수하던 미군의 작전에 무리가 있기는 했었으나 그들이 생명을 바쳐 우리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바로 엿새 전인 7월 20일에도 미24사단장은 직접 권총을 들고 인민군 장갑차를 막아싸웠다. 당시 한국군 참모총장 계급이 대령이었던 때 소장이면 그 직급이 대단히 높은 어른이다. 권총으로 장갑차와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딘 소장이 모를리 있었겠는가? 아니다. 그는 한국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몸을 내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앞질러 후방을 차단한 인민군 탱크 부대의 공격으로 후퇴 중 야산에서 고립된 딘 소장은 5주일 동안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방황하다가 남한 두 명의 민간인의 밀고로 북한군에 포로로 붙들렸다.

    미군은 24사단 사단장의 실종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영동 전선을 사수히였다. 혹자는 7월 20일 딘 소장이 대전에서 권총 들고 인민군 탱크 부대와 싸운 것도 7월 26일 7연대가 노근리에서 소총으로 북한군 탱크 부대에 대항한 것도 어리석은 작전이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딜걀을 바위에 던지는 격이었던 어리석은 작전에는 1급 군사기밀이 감추어져 있었다. 50일 후인 9월 15일은 인천상륙작전 D 데이(D day)였다. 북한군이 낙동강을 넘어 부산마저 함락하면 대한민국은 영영 멸망한다. 9월 15일 이전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저지하여야 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딘 소장은 권총 들고 인민군 탱크 부대를 막아 싸웠으며, 7연대는 노근리에서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의 영동 전선 통과를 저지하였던 것이다.

    7월 26일 노근리 사건 상황을 약술하면 제7기병연대 제2대대는 그날 아침 주곡리 북쪽 진지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사상자를 내며 후퇴 중에 있었다. 북한군 제3사단 선발대 일부 병력은 이날 해가 질 무렵까지 노근리에서 약 3㎞ 떨어진 가리 터널에 접근하였고 북한군 제2사단의 일부 소규모 부대는 제7기병연대 제2대대의 우측방 1.5㎞ 떨어진 월류봉 주변까지 진출하였다. 북한군은 이날 해질 무렵에는 근거리에서 미군에 대한 야간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며, 실제로 7월 27일 02시경에는 서송원에서 노근리 방향으로의 포격과 함께 공격으로 전환하였다.

    게릴라를 포함한 북한군 정찰병들의 활동은 소규모 단위로 계속되었다. 7월 24일 밤 미군 제7기병연대 제2대대는 노근리에서 게릴라 공격을 받았고, 7월 25일 18시에서 26일 18시 사이에는 황간-영동간의 도로에서 미군 트럭이 게릴라 공격을 받았다. 영동-황간 도로상에 약 20명의 게릴라가 매복하여 이들에 의해 트럭 3대가 파괴되고 4명의 병사들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으며, 황간-관리 간에는 게릴라 약 300명이 침투해 활동하고 있다고 보고하면서 우리 지역에 대규모 게릴라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결론짓고 있다. 7월 26일 관리(황간 동쪽 8㎞ 지점)에 침투하였다가 교전 끝에 사살된 한 게릴라의 몸에서 노획한 일기로 볼 때 게릴라들은 이 지역에서 깊숙이 미군 진지에 투입하여 정보를 획득하고 병참선을 교란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북한신문에서도 확인된다. [조선인민보]는 영동에서 북한군 제3사단이 지역 '빨치산'들과의 긴밀한 협동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영동점령에 기여하였다고 쓰면서 빨치산들의 기여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제2대대 장병들은 7월 25~26일 밤 영동 동쪽의 주곡리 근방 첫 전투에서 북한군의 야간 침투공격을 받아 공황상태하에서 무질서하게 철수하였으며, 노근리에 도달해서는 피난민들 사이에 게릴라들이 끼어 있을 지도 몰랐기 때문에 방어 진지선으로 접근해오는 피난민 집단에 대해 경계심을 품고 이들을 강력히 통제하고자 하였다. 같은 날 7월 26일 10시 제8군사령관의 '피난민 전선통과 절대 금지' 명령도 예하 부대에 하달되었다.

    난생 처음 전쟁을 경험하는 17~18세의 미군 병사들은 쌍굴에서 피난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이 사격을 개시하자 방어 사격을 하였다. 즉시 사격 중지를 했지만 이미 날아간 총탄은 인민군과 순수 피난민을 구별할 리 없었다. 분명 쌍굴 안의 피난민들 중에는 부녀자들도 있었으므로 미군 병사들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노근리에서 대전투가 벌어질 위험이 증대될 수록 피난민들은 더욱 후방으로 피난가려 하였으며, 7연대 2대대는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의 대구 침투를 저지시켜야 할 임무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행하어야 했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안되는 상황에서 미군이 할 수 있는 일은 쌍굴 안의 피난민이 영동 전선 남쪽으로 이동할 때마다 그러면 안된다는 뜻으로 위협 사격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악역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쌍굴 안의 순수 피난민들은 미군의 위협 사격이 있을 때마다 얼마나 공포감을 느꼈겠는가? 그리고 전우들이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 게릴라들의 공격으로 계속 쓰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미군 병사들은 쌍굴 안의 피난민들이 과격 행동을 보일 때마다 얼마나 공포감을 느꼈겠는가? 피난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의 영동 전선 통과를 저지시키라는 가혹한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던 일을 당시 미군들은 평생 가슴 아파한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순수 피난민이 억울하게 희생되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그 문제는 일차적으로 북한군의 사악한 위장 전술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근자에 사스 전염병 환자를 격리시키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그것은 소를 희생시키고 대를 구하는 것이 바른 정책이기 때문이다. 만일 7월 26일 미군이 그렇게라도 영동 전선을 방어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과 빨치산과 유격대에 의해 낙동강 전선 방어망이 뚫렸다면, 그리고 그날로 북한군이 대구를 함락하고 낙동강을 넘어 부산을 공격하였다면 어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북한군이 남침과 피난민을 위장한 게릴라 전술이 노근리 사건의 근본 원인이었으며, 미군은 우리나라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들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던질 만큼 최선을 다한 것이 사실일진대 우리는 그것이 양민 학살이었다는 좌익 논리를 거부해야 할 것이다.

    미 제1기병사단 7연대 2대대는 1950년 7월 26일 노근리에서 선의의 순수 피난민 희생자가 생길 수 있는 악역 작전 임무를 수행하여야 했다. 그러나 피난민으로 위장한 악독한 게릴라 전술로 8월 15일 이내에 북한군이 부산까지 점령하려고 했던 당시 상황에서 피난민으로 위장한 북한군의 영동 전선 통과를 저지하라는 상부의 명령은 대한민국을 풍전 등화의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한 필요한 조치였을 것이다. 더욱이 7연대 병력은 그날 이후 45일간의 낙동강 전선 전투에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대다수 전사하였다. 그들이 누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는가? 바로 우리 한국 국민들의 자유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럴진대 그들에게 양민 학살범의 누명을 씌우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자유의 용사들이라고 불러야 한다.

 

공산당 격퇴를 환영하는 마을 주민들
한국 전쟁 중 마을 주민들이 공산당 격퇴를 환영하는 모습.
자유를 지키는 미군 용사들이 진격하는 곳마다 공산당은 격퇴되었으며.
마을 주민들은 잃었던 자유를 되찾았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을 혈맹이라 부른다.


 

 

  ☞ 노근리 사건 당일의 한국전 상황을 보여주는 동영상 

  1975년 4월 월남에도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조직된 시민군이 있었는데, 월맹군에 편성되어 정부군을 공격하며, 수도 사이공을 침략하였던 무장시민군을 월남군은 어떻게 대하여야 했는가?

  1980년 5월 중순 광주에도 스스로 시민군을 자처하는 무장시민군이 출현하였다. 그들 스스로 순수시민과 구별하여 시민군이란 명칭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특징지었다.  


이 사진은 머리가 긴 국군 사진이 아니다.

  518시민군도 철모를 썼으며 더러 군복 차림의 시민군도 있었기에 국군 편에서도 국군과 시민군을 식별하지 못하며, 시민군 편에서도 국군과 시민군을 식별하지 못하여 발생한 사고들이 있었다.  한국인끼리도 이러할진대 1950년 7월 26일 한국의 임시 수도 대구를 사수하는 전투 때 피난민 복장으로 위장한 유격대와 인민군을 미군 편에서 육안으로 식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임시수도마저 적군에 함락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다급한 상황 하에서 영동전선 봉쇄 명령이 7연대 2대대에 하달되었다.

  1975년 4월 30일 월맹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월맹군의 수도 사이공 침투를 막지 못했기에 패망하였다.  1950년 7월 26일 소수의 병력으로 임시 수도를 방어하여야 했었던 미군 지휘관에게 영동전선 봉쇄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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