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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말뜻조차 모르던 독립투사들?

서울1945 박창주

  요즘 KBS드라마 서울1945를 지켜보다 보면 친일파 타령이 지나쳐 조직적 범죄로 빠져드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 한 예가 박창주를 친일경찰로 내세우는 설정구도이다.  이승만 박사는 방 한 칸 없어 돈암동 남의 집에 얹혀 지내셨는데, 무슨 저택이 있고 보좌관들이 있었다는 말인가?  더욱이 박창주를 이승만 박사 측근 인물로 등장시키는데, 박창주 실제인물은 평생 단 하루도 경찰 신분이었던 적이 없을 뿐더러  1947년 육사 3기생으로 입교하여, 대한민국 건국 후 국군 창군 이후에야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가 마치 일본경찰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건국 이전에 경찰이요, 이승만 박사 측근이었던 것처럼 조작하여 여운형 암살 배후 인물로 등장시키는 것은 상당히 악의가 있는 역사 왜곡이다.


이것은 박창주 실제인물에 대한 명예훼손일뿐더러 그 유족에 대한 혹독한 고문이다. 과연 KBS가 개개인들에게 아무 근거 없는 누명을 씌워 여론 폭력을 가할 권리가 있는가? 역사 논리에서 지나친 픽션 소설은 삼가야 한다는 한 예가 이년 전 한승조 박사 사건이다. 한승조 박사는 “일본이 1945년에 원자폭탄 투하로 패전국이 되고 우리 민족이 승전국들과 함께 하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이 말이 앞뒤 다 자르면 한승조 박사가 친일파 누명을 쓰게 된다. 그 분의 글 한 줄 읽을 시간도 없는 이들이 픽션 소설부터 써서 그분을 친일파로 매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친일파 타령이 감정적으로 치우치고 비합리적으로 나가는 것을 보면서 필자가 한마디 쏘고 싶은 말은 이 말이다: “일본은 조선독립운동을 도와주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이다. 필자는 식민지 개발론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런 사실들이 관찰된다. 일본의 수탈은 사실 상당히 과장되었다. 우리나라 농토는 수천 년 간 경작을 하였었기에 조선시대에 해마다 소출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인구는 조선 건국 오백 년에 여전히 오백 년에 여전히 오백 만에 머물러 있었음에도 식량 부족으로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는 백성이 많았다. 그리고, 저수지가 없어서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홍수로, 비가 조금만 적게 오면 가뭄으로 흉년이 잦았다.

20세기 문명은 전기문명인데, 전기는 일제시대에 댐과 수력발전소들이 건설되면서 보급되었다. 그리고 철도를 부설하고 북한에 비료 공장들을 지으면서 남한에서 쌀 생산이 크게 늘어났는데, 잉여분을 일본이 수탈한 것이 아니라 수입하였으며,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민족자본은 항만, 공장, 철교, 교육시설, 병원, 산업시설 건설에 투자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세금도 쌀로 내고, 봉급도 쌀로 주는 경우가 많아서 국고는 물론 서민의 호주머니에도 화폐가 별로 없었는데, 일제시대의 조선은 세계 곳곳의 무수한 독립운동 단체들을 현금으로 후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 있었다.

일제시대 조선인 일본군을 친일파라고 부르는 이들도 그 시대 정황을 모르는 오류를 범한다. 구한말에 일본육사에 유학생을 많이 보냈으며, 한일합방 이후 조선인은 육사지원은커녕 군인이 될 수도 없었다. 1916년 이후 조선군이 편성되었으나, 조선인 고위장교들이 일본인 졸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구한말에 유학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과 동등하게 진급하였기 때문이었다. 일본육사 출신 중 일부는 독립군을 창군하여 독립군 대장들이 되었고, 조선군 잔류 동기생들은 자기네 봉급을 반으로 쪼개어 독립군 가족 생계를 책임져 주었다.

조선인은 1937년부터야 조선총독부국군병에 지원할 수 있었으며, 일본육사의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정일권이나 박정희 등 만주국 국비 유학생들을 일본에서는 일본육사 출신으로 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일본군이 되는 과정인 1~2학년을 거치지 않고 3학년에 편입학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총독부국군(조선군) 조선인 병사들도 일본에서는 일본군으로 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조선인 병사들에 대한 지휘권이 일본육본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1920년 이후 러시아의 재침략에 항상 대비하는 임무가 조선군에 있었는데, 중일 전쟁 등으로 조선군 내 일본인 병사들이 해외로 착출되어가자 그 부족한 병력만큼 조선인 병사로 채웠다. 조선인 병사도 해외에 파병할 수 있도록 병역법이 개정된 때는 일본이 연합국에 최후의 저항을 하기 시작하여야 했던 1944년 여름 이후였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무참하게 패배한 것을 본 장제석 총통의 구국운동의 시작은 먼저 일본군사학교에 입교하여 3년간 훈련받는 것이었다. 군 현대화는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무술 고수들이 많은 중국에서조차 먼저 체면을 굽히고 일본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군 현대화는 구한말 위정자들의 오랜 숙원이기도 하였는데, 그 일을 1937년 이후 일본인들이 해주었다. 만약 조선이 독립될 줄 알았으며 그들은 조선인 지원병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국군이 창군된 후 반세기 동안은 국군이 일본 자위대보다 우월하였는데, 국군은 일본군과 미군의 전술을 모두 전수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해방 조국의 국군이 일본군보다 강군이 되는 것이 애국이었기에 일제시대에 해방 조국을 위해 일본군 군사학을 빼내어온 이들 역시 건국의 공로자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만주에서 항일운동이 있었다고 사기치는 이들은 “그러면 종전 후 왜 만주국은 독립국이 되지 못하였느냐”는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1919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이후 만주족은 무장한족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조선인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을 기점으로 만주족은 역사에서 사라진 민족이 되었고, 영토나 국민 수가 훨씬 적었던 우리 민족은 자주 독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갈림길은 1943년 11월 6일 카이로 회담 때 루즈벨트 대통령과 장제석 총통의 대화에서 결정되었다. 만약 만주를 모택동이 차지할 것을 알았다면 장제석 총통은 만주도 독립시켜 주자고 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본래 오합지졸이었던 모택동의 공산군이 1946년 만주를 침략하여 정복한 후에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중국 본토를 모두 점령하였기 때문이었다.

중국이 만주국은 중국의 속국이라고 우기는 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만주에 대한 발언권은 없었다. 조선 독립문제도 중국이 만주국은 중국의 속국이라고 우기는 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발언권은 없었다. 그래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조선인에게 독립국을 유지할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을 꺼냈다. 역사 기록에는 조선이 수천 년 간 중국의 속국이었다가 일본 식민지가 된 것으로 나오는데, 이승만 박사는 본래 독립국이었다며 해방과 독립을 요구하니 사실 여부를 중국에서 판정해 달라는 뜻이었다. 그때 장제석 총통이 “조선을 독립시켜 주자”고 강력 발언한 것은 다시는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주장을 중국은 하지 않겠다는 강력 발언이었으며, 그래서 루즈벨트 대통령은 조선 해방과 독립을 약속하여 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독립이란 단어를 제일 처음 사용한 이는 이승만이었으며, 1896년 조선정부의 대신과 협판, 외국의 공사, 영사, 선교사, 그리고 학부형 등 800여명의 청중 앞에서 전 졸업생을 대표하여 “한국의 독립”(Independenceof Korea)라는 주제로 영어 연설을 한 것이 우리민족이 독립이란 단어를 사용한 첫 번째 연설이었다. 물론 이승만의 이 연설은 한국인의 사상 첫번째 영어 연설이기도 하였다. 그의 유창한 영어가 돋보인 이 영어 연설을 계기로 청년 이승만은 조선의 위정자들과 서울에 있는 외국 외교관 및 선교사들이 주목하는 ‘유망한 인재'로 부상하였으며, 그 해 7월 서재필과 이승만이 주축이 되어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그런데 일제시대에 각 단체들이 앞다투어 독립이란 간판을 갖다 부치다보니 1980년대 이후에는 공산당을 독립투사라고 주장하는 좌익소설이 등장하다가, 마침내 KBS드라마 서울1945에서 동북항일연군이 독립군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동북항일연군이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단체로서 만주국 침략에 성공하면 만주 조선족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나누어주겠다는 꾀임으로 만주의 조선족을 유혹한 마적단이었다. 독립운동가들도 무수히 학살한 이 마적단을 독립군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KBS가 독립이란 단어의 뜻조차 몰랐다는 증거요, 해방 조국 60년이 지나도록 공영방송이 “독립”이란 말뜻조차 몰랐다는 것은 일제시대 독립군 중 대다수는 독립이란 말뜻을 몰랐음을 의미한다. 물론, 1910~20년대에 진정한 독립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독립”의 말뜻조차 모르는 단체들,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있었기에 해방 조국 60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어떻게 조국 독립이 완성되었는지 모르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지금 노무현이 독립이란 말뜻을 모르거니와 사실은, 박헌영은 물론 김구 선생, 김규식 선생, 여운형 등도 독립이란 말뜻을 몰랐다. 그들은 여전히 조선시대 사대주의에서 일보 이보였다. 조선시대 조선인들에게는 독립국의 개념이 없었다. 연호는 중국 연호를 썼으며, 국가 대사는 중국 황제의 재가를 얻어야만 집행될 수 있었으며, 조공을 갖다 바쳐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논리는 일본인들에 의해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국사를 가르치지 않고 중국 고대사만 가르쳤으므로 우리는 우리 민족 역사를 몰랐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려시대가, 그 이전에 삼국시대가 있었음을 일제시대에 비로서 배웠던 것이다.

왜 이승만과 서재필 등 독립운동의 선구자들이 1896년에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는가? 14년 후의 일을 미리 내다보았는가? 실은, 중국 속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 개념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다.“ 그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승만이 제시했으며, 이승만과 일본 학자들이 동시대에 그 작업을 하였기에 KBS는 이승만을 친일파로 매도하고 싶은가보다. 그러면, 왜 일제시대 이승만은 미국 망명 후에도 일본이 30만불 현상금을 걸었던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함구하는가? 30만불이면 지금 돈으로도 30억원이니 그 당시 천문학적 거금이요, 여운형에게는 정치자금을 대준 일본이 왜 이승만에게는 그런 천문학적 현상금까지 걸면서 해외에 체포조를 보냈겠는가?

서울1945

이승만 박사도 일본인 학자들도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논리적 작업을 하고 있었으나, 방향은 서로 달랐다. 조선은 국가승인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일본의 입장이었고, 조선은 국제사회의 국가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이승만 박사의 입장이었다. 그리고, 여운형 등 다수의 해방정국 주인공들이 일본처럼 조선 국가승인 무용론을 고집하였다. 여운형과 박헌영의 건준이 김구 선생과 임정의 환국을 금지하였으며, 박헌영이 공산당 패권싸움에서 여운형을 거세하였으며, 임정의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간에도 입장이 서로 크게 달랐으나, 조선 국가승인 요건 취득 방해에는 굳게 뭉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KBS드라마 서울1945 내용은 조선 국가승인 요건 취득 방해파 옹호론 일색이다 보니 역사배경 설정에서부터 큰 오류를 범한다. KBS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건국의 주체였다고 시대 배경을 설정하지만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우리 민족 해방과 독립 약속을 하였을 때 그 조건으로 국제사회로부터 국가승인을 받을 수 있는 요건이었다. 즉. 민주적 선거로 정권이 창출되면 국가승인을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 대통령 서거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만은 우리 민족에 관심을 쓸 겨를이 없었다. 하지 중장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였는데, 하지 중장은 여운형과 김규식 선생에게 홀려 공산당과 손잡고 좌우합작을 하려 하였으며, 이승만 박사를 배척하였다. 하지 중장은 정치에는 무식하여 남한마저 공산주의자들 손에 넘어갈 수 있는 선택을 하였던 것이며, 또 좌우합작은 미국이나 유엔으로부터의 국가 승인 불가 상태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KBS드라마 서울1945 는 좌우합작이 권력 분배인 것처럼 여론몰이를 하고 있지만, 기름과 물을, 불과 물을 한데 섞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탈린도 한 체제, 한 노선을 위해서 공산당 동지 삼천 만 명을 학살 또는 숙청하였으며, 소련 군정은 그런 요인 암살 문화를 그대로 한반도에 가지고 들어왔다. 김일성과 여운형의 권력 분배를 박헌영이 허용할 리 만무하였으며, 박헌영도, 김규식도, 이강국도 김일성 손에 죽었다. 여운형 암살 배후 역시 김일성이다. 김일성 치하에서 중학교 다니며, 3년 공산주의 사상 교육받은 19세의 한지근이란 청년이 평양에서 여운형 사진과 약도와 러시아제 권총을 받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그 길로 여운형씨 집 부근에 찾아가 암살하였다. 그렇다면 그 배후가 김일성이었다는 사실은 99.9% 분명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스탈린 동지가 임명한 자가 한반도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며, 혹은 누구든 목소리 큰 놈이 군주가 되어야 한다며 선거를 방해한 인물들은--의도적이었든 아니든--조국의 독립을 방해하였다. 조국 독립이 완성되려면 외국으로부터 국가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리 국가승인 요건이 민주적 선거였다. 국가승인을 받지 못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여전히 일제시대처럼 해외 여행을 위해서는 중국 여권이나 일본 여권을 받아야 한다. 여전히 민족 대표가 국제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국제정치에 무지한 여운형, 박헌영, 김구, 김규식 등이 독립 무효화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으며, 하지 중장도 그들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가 1046년 겨울 미국에 날아가 한반도 문제를 즉시 유엔에 넘기라고 하였으며, 미국 정부가 한반도를 문제를 미군정에서 유엔으로 넘겼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북한이 유엔선거감시위원단 입국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는데, 왜 KBS는 그 책임을 이승만 박사에게 뒤집어씌우는가? 만약 만주국이나 티베트가 미국의 국가승인을 받아두었더라면 중공군의 침략을 받지 않았을 것이기에 미국의 국가승인은 큰 의미를 지닌다. 일단 민주적 선거로 새 정권이 수립되었을 때 미국이 즉시 국가승인을 해주면서 동맹국들도 동시에 국가 승인을 해 주도록 미국이 힘을 써주었는데 여기에는 중대한 역사학적 의미가 있었다. 반만년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국제사회로부터 국가승인을 받았다. 더 이상 우리 민족은 중국의 속국도 아니요, 일본이 침략해서도 안 된다는 의미가 여기에 있었다. 그럼에도 노무현이 미국의 국가승인을 부정할 때 여기에는 스스로 독립 무효를 자초하는 국제정치학적 논리의 문제가 있는 것이요, 노무현 정권의 하수인인 정연주의 KBS 드라마 서울1945를 국민이 우려하는 것도 “독립”이란 말뜻조차 모른체 왜곡된 사관만을 특정 시청자들에게 심어주는 제작의도 때문이다.

우리는 이 글 셋째 단락에서 “일본은 조선독립운동을 도와주었다.”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즉,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중국인의 사관의 신조어가 동북공정인데, 그런 동북공정 논리를 깨뜨리는데 일본 학자들이 큰 기여를 하였다. 우리 민족의 역사 교육은 일제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반만년 역사는 그 큰 틀이 일제시대에 잡혀진 그대로였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였기에 우리 민족이 자동적으로 독립하였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데, 일본의 패전과 우리 민족 해방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은 일차적으로 역사 논리의 문제요, 우리 민족은 중국의 속국도 아니요, 한일합방 문서는 불법이라는 역사 논리에 국제사회가 동의함으로 비로소 우리 민족이 자주 독립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자주 독립을 보장해준 국제 사회의 노력과 조약들을 부정하는 것은 “독립“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서울1945 문석경

BBC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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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통치 반대가 민족반역이었다고 묘사한 KBS 드라마


광복군을 주적으로 삼던 마적단이 독립군이라는 KBS


KBS드라마 서울1945 동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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