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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의 서울말과 KBS 드라마의 거짓말



  두 개의 오디오가 합쳐친 위 오디오 앞에 15분은 1945년 8월 15일부터 두 달간의 다큐멘터리이고, 뒤에 1분은 KBS 역사왜곡 드라마 서울1945 (31부 마지막 장면)에서 여운형 부하가 지껄인 대사인데 잘 들려요? 앞 오디오는 이승만 박사의 귀국 연설로 끝나는데요. 이런 이승만 박사의 육성 오디오나 연설 장면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고, 전혀 있을 수 없었던 픽션으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속이는 드라마 서울1945 제작자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이승만이 홍안의 미소년이었던 시절에는 한글 교육이라는 것이 없었으며, 한글 띄어쓰기도 아직 없었다. 한글 띄어쓰기는 이승만의 모교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 선교사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 초등학교, 중고등학교가 없었던 시절에 배재학당을 2년만에 졸업한 이승만은 청년의 나이에 이미 당대 최고의 정치 논객이었는데, 시대를 만나지 못한 개화 운동은 그를 24세부터 6년간 한성감옥서(漢城監獄署)에서 옥중 생활을 하게 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 때에야 비로서 조종 고관들이 청년 이승만이 시대의 선각자였음을 알아보았으며,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은 평민 외교관 신분으로 미국 대통령 T.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로 만나기 위해 도미하였다. 그러나, 태프트-가츠라 밀약이 이미 체결된지 닷새가 지났던 때였으므로 빈손으로 귀국할 수 없었던 이승만은 워싱턴 D. C.에 있는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대학교에 3학년 학생으로 편입학하였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거치지 않은 배재학당 2년의 학력을 인정해 주어 3학년생으로 받아준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생각하면 놀라운 배려였다. 이어 1년간의 하바드대 석사과정을 거쳐, 프린스턴대 정치학 박사과정을 2년만에 마치고 그의 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상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 동대학에서 출판되었다.

바로 귀국한 이승만은 YMCA 총무로 활동하던 중 1910년 10월부터 1912년 3월까지 약1년 반 동안 그의 강의를 들은 제자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던 임병직, 허정, 이원순, 정구영 등 유명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11년 11월, '데라우찌(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라는 핑계로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이른바 ‘105인 사건(The Christian Conspiracy Trial)은 그들 시각에서 보면 이승만의 전국 YMCA 조직운동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었기에 이승만은 검거 대상 제1호였으나 다행히 YMCA국제위원회 총무 모트(John R. Mott)박사의 개입으로 체포를 면하고 37세였던 1912년 3월 26일 서울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자, 여운형은 공산당 지도자였으며, 일본 본토의 공산주의 혁명 기운이 거세어 공산당이 일본의 주적이었던 시대에 여운형은 총독부와 거래하며 조선에 안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1940년대에야 신사참배 요구 압박이 있었을 뿐 아직 전혀 탄압 대상이 아니었던 때에 기독교 지도자 이승만은 조국에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일본인들 편에서는 여운형이 아니라, 이승만이 항일운동가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KBS드라마 서울1945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승만이 친일파였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일제시대에 일본 공산당이 공산주의 이론에 훨씬 앞서 있었으며,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일본인 스승에게서 그리고 일본어 서적으로부터 공산주의 이론을 배워오고 베껴왔는데, 그것이 어떻게 항일운동이었다는 말인가? 사실, 일제 시대 항일운동은 주로 기독교인들이 하였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가 YMCA 총무 자격으로 실제로 한 일은 성경과 구미역사 그리고 국제법 등을 가르치는 것이었는데, 한일합방 문서의 불법성을 국제법으로 증명하는 전문가가 이승만 박사였으며, 그가 시원스럽게 한일합방 문서의 부당성을 풀어나갔으므로 민족에 독립운동의 희망과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였을 때 우리나라에는 그를 아는 이들이 별로 없었다. 아직 라디오 있는 가정이 별로 없어 해방 소식도 몰랐으며, 국민 80%가 문맹자였던 시대에 조선인들이 어떻게 해외 독립운동가들 이름을 일일이 알 수 있었다는 말인가? 행여 이름을 알아도 그것이 그를 지지하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다시 33년만에(사실상 41년만에) 조국에 돌아온 이승만 박사는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땅에 돌아온 것이었다. 그의 주변에 YMCA 총무 시절의 그의 정치사상의 영향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던 이들이 하나둘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단지 그들이 옛 스승 이승만 박사를 찾아왔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로 매도하는 드라마 작가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위 오디오 중 이승만 박사의 귀국연설에서 우리가 듣는 그의 유창한 서울말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1945년 9월 9일 총독부 일본기를 내린 미군정이 제일 먼저 한 일은 9월 14일에 경성을 서울로 개명한 것이었다.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말이 런던 말이라고 하는데, 서울말은 어디서 왔는가? 드라마 서울1945의 주인공들은 모두 함흥 출신들인데(실제로 그런 인물들이 없었음) 함흥 사투리와 서울말이 동일하게 나오는 것부터가 엉터리다. 그럼 현재의 서울말은 어디서 왔는가?

해방 직후 우리말은 상당히 일본말과 섞여 있었다. 도시락을 벤또라고 했으며, 해방 60년 조국에도 여전히 무의식 중에 일본 단어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의 한국말은 전혀 일본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 한국말이었으며, 표준 서울말이었다. 그 당시는 해외 생활 몇년 만에 한국말을 잊어버리기 쉬운 때였으며, 이승만 박사가 간혹 만날 수 있었던 조선인들은 하와이 노동자들이었는데 과연 구한말에 한성(서울) 출신 중에서 하와이로 해외취업갈 이들이 몇이나 있었겠는가? 만약 우리가 지금 구한말 시대 사람들의 말과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매우 감동적일 것이다. 1945년 10월 16일 귀국 연설 때의 이승만 박사의 말은 구한말의 우리말을 그대로 간직한 말이면서도 바로 오늘날의 표준 서울말이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위 오디오에서 이승만 박사의 귀국 연설 후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이 5초간 들리린 다음 여운형 부하의 목소리가 나온다. 동우와 최운혁(이강국)의 친구여 갓 함흥에서 온 자라 한다. 문동기와 최운혁과 동우가 오형이라 부르는 여운형 부하가 함흥에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유창한 서울말을 구사하는 것도 순 엉터리이거니와 그 내용은 더더욱 엉터리다.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그해 12월 찬탁 반탁 정국으로 첨예화되었던 것이지 그 전의 일은 아니다.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 박사가 숙소를 정할 무렵인 11월에 이승만 박사를 맨먼저 찾아온 이들은 여운형과 박헌영 일행이었다. 그들은 이승만 박사를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하고 그 제의를 받아줄 것을 설득하려 했다. 왜 공산당이 반공주의자 이승만 박사를 주석으로 모시려고 안간 힘을 썼을까?

KBS 역사왜곡 드라마 서울1945에서는 좌익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없었고, 우익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독립운동을 했었다. 1919년 블라디보스톡에 수립된 노령 임시 정부가 이승만 박사를 ‘국무경'으로 추대하였으며, 4월 15일에는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를 ‘국무총리'로 임명했으며. 그 후 5월 말에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임시정부도 그를 ‘집정관총재(執政官摠裁)로 추대하였다.

따라서, 박헌영과 여운형도 건준이 국제사회와 국민의 인정을 받으려며, 즉 정통성을 세우려면 이승만 박사의 이름이 필요했다고 판단하였던 듯하다. 건준이 행동강령 1호로 상해임정의 귀국을 막았던 것은 중국공산당의 우방이 되려 하였던 건준은 국민당 정부의 우방 상해임정을 적국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건준이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자마자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으로 추대하였던 것은 아직은 이승만 박사가 그의 반공 노선을 겉으로 표명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한다. 드라마에서처럼 이승만 박사가 주변 사람들을 "빨갱이"로 불렀다면 박헌영과 여운형이 그를 그들의 주석으로 받들려 하였을 리 있었겠는가? 더구나, 빨갱이라는 용어 자체가 여러 해 지나 한국 동란 이후 등장하는 용어였다.

1945년 11월은 좌익 진영에서 그를 주석으로 추대하고, 이승만 박사 편에서 정중히 사양함으로 서로 예를 갖추던 시기였다. 조국 독립의 공감대가 더 컸었기에 이데올로기 대립은 아직 없었다. 그런데, 12월부터 찬탁 반탁 정국이 시작되었으며, 신탁통치만큼은 우익 진영에서 허용하거나 양보할 수 없었던 문제였기에 그때부터 좌익과 우익 대립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정치 역학의 문제였다. 좌익 진영은 스탈린의 지령을 따라 찬탁 시위를 하고 있었기에 독립운동가들 편에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던 사안이었던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지금 KBS 드라마가 너무 심한 픽션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 않은가? 소련이 김일성을 대중 앞에 선보인 날이 10월 14일이었으므로 함흥에 있던 김일성 부하가 여운형을 돕기 위해 서울에 온 일이 실제로 있었다 해도 그 시기는 10월 14일 이후이다. 10월 16일 귀국한 이승만 박사가 대중 앞에 첫 모습을 보인 것도 10월 20일 경의 일이다. 그러면, 함흥에서 서울에 갓 도착한 여운형 부하(드라마의 최동혁 친구)가 도대체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 무엇을 안다고 그를 친일파로 매도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KBS는 시청자들의 이런 궁금증에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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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가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는 진정한 이승만 박사의 모습을 고화질 동영상으로 보고 싶으세요? 예를 들어, 귀국 직후 이승만 박사와 하지 중장이 김구 선생을 중앙에 세우고 찍은 사진 등을 KBS 드라마는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런 희귀 자료를 고화질 동영상으로 보고 싶은신 분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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