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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유족회 회장 아들 전영진 열사는 시민군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광주사태는 그 다양한 명칭만큼이나 다양한 색안경들이 있는 사건이다. 운동권이 광주사태를 일컫을 때 가장 즐겨쓰는 명칭은 ‘광주학살’이다. 여기서 ‘학살’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용어가 아니다. 광주사태에서 ‘학살’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은 없었다. 단지 시민군 총기오발사고와 시민군 대형 교통사고들로 인한 생긴 희생자들에 대하여 공수부대가 애매한 누명을 쓴 경우가 허다하였을 뿐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운동권은 ‘학살’이란 용어를 고집하는가? 그것은 사람들이 그런 색안경을 쓰고 광주사태를 보게 하려 함이다. 이 경우 ‘학살’은 특정 색안경을 강요하는 선동 용어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색안경 논리만 지배한다면 다른 한쪽에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는 사람들이 생긴다. 5.18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이제는 시민군 증언록을 읽어보며 광주사태 당시의 각종 사고 발생원인을 정확하게 기술해야 하지 아니하겠는가.

 학운동은 시민군이 많이 모여든 지역이었는데, 26일에는 학운동 시민군이 최득춘씨 일가족 3명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범인은 최득춘씨 아들 최철이었는데, 평소 계모가 자기를 학대하고 이복동생 역시 자기를 형으로서 대접해 주지 않았다는데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시민군 총을 분배받고 사고를 냈다. 방위병이었던 당시 22세의 최철은 26일 새벽 4시 30분쯤 동구 학운동 734의 1 최득춘(당시 52세) 집으로 돌아오자 대문 여는 소리에 깨어난 아버지 최득춘이 아들이 총을 갖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네가 무슨 총을 갖고 있느냐”고 하자 순간적으로 평소 계모와 이복동생만을 생각해준다는 감정이 폭발, 아버지마저도 살해할 것을 결심하고 칼빈총 20여발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에게 난사하고 도주하였다. 후에 그는 시민군 중 공범 3명이 있었다고 자백하였다 (김영택 1996, 207). 이처럼 총을 소지한 시민들 수가 너무 많을 때 총기사고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계엄사 광주사태 전문’에 따르면 광주사태 전체 사망자 170명 중 군인 사망자가 22명이요 경찰 사망자가 4명이었다. 민간인 사망자 144 명 중에서도 시민군과 계엄군간의 총격전에 의한 사망자 수보다 시민군이 낸 사고로 발생한 사망사건이 훨씬 더 많았다. 즉, 시민군이 5 차에 걸쳐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였을 때 28 명이 사망하였으며, 시민군 “이동중 음주운전 및 과속으로 인한 전복•충돌 등의 교통사고를 일으켜 32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소총과 수류탄 등 무기류 취급 미숙에 의한 시민군 15명의 사망 사건이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6:302).

1. 시민 위에 떨어진 시위대 돌과 화염병

광주사태 때 임신한 여자가 크게 다친 이유는 19일 점심시간 무렵 가톨릭센터를 점령했던 시위대가 최루탄 가스를 피해 뒤로 밀릴 때 임신한 여자를 짓밟았기 때문이었음을 시민군 최영철은 이렇게 증언한다:
금남로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수차례 반복하다 시민들이 밀고 올라가 가톨릭센터를 점령했다. 유리창을 다 깨고 올라가 무전기와 총을 한 정 뺏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실탄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며 밀고 내려와 시민들이 뒤로 밀렸다. 그때 임신한 여자가 넘어졌다. 아무도 그녀를 일으켜세워주는 사람이 없었다. 도리어 그냥 밟고 도망치기에 바빴다. 나도 그 여자를 밟고 한일은행 쪽으로 냅다 뛰었는데 그 여자가 어찌 됐는지는 모르겠다 (최영철 1988). 

폭력시위가 시위대 부상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은 시민군 증언뿐만 아니라 계엄군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88년 광주청문회 때 광주사태 당시 5월 19일 상황에 대한 심명보위원의 심문에 대해 증언하던 중 김일옥 7공수 35대대장은 시위대가 던진 돌 중 절반은 시위군중 머리 위로 떨어졌던 사실을 이렇게 진술하였다:

저희 대대는 앞에서 이렇게 내려가고 데모군중은 도로를 꽉 메우고 서가지고 있고 저희들이 앞에서 밀고 내려가니깐 앞에 있던 사람은 자꾸 뒤로 나가면서 이 도로좌우측으로 빠져 나가면서 하는 그러한 상황이었는데 뒤에 있는 군중들은 그러한 상황들도 모르고 밀려 나가지는 않고 버텨서 있으니깐 앞에 있는 사람만 자꾸 빠져나갑니다. 그러면서 뒤에서 계속 여하튼 돌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 돌이 앞에서 좀 가까이 던지는 것은 저희틀한테 떨어지고 또 뒤에서 던지고 있는 돌은 자기네들 시위군중 머리에 떨어지고 하는 이러한 상황으로써의 그때에 시위에 피해가 있었습니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4: 728).

그때 김일옥 7공수 35 대대장과 대치하고 있던 시민군이 바로 차명숙, 전옥주와 한 차를 타고 있었던 허춘섭이었는데 그는 김일옥 대대장의 증언이 사실임을, 즉 선두에 있던 자기 동지도 시위대 대열 뒤쪽에서 던지는 돌에 맞고 쓰러진 후 뇌수술을 네번이나 받고 두 달 후에 사망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것을 본 다음 우리는 다시 구경나온 사람들이 우리 대열이 지나가도록 길을 비켜주어 계속 나아갔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 보니 노동청 앞길에 탱크 한 대가 서 있고 그 뒤로 공수들이 키보다 더 큰 방패를 들고 주욱 서 있었다.
   대열 뒤쪽에서 계엄군을 향해 와아- 하면서 돌을 던졌다. 그러나 그 돌은 선두에 있는 우리들에게 맞았다. 용덕이 형을 부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탱크가 쏜살같이 달려왔다. 선두대열은 앞으로도 뒤로도 물러설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나는 다행히 인도 위로 쓰러졌으나 용덕이 형은 도로 가운데로 넘어졌다……길바닥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었다. 용덕이 형은 의식불명이었다. 용덕이 형과 다른 부상자들을 전남대병원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와 용덕이형 가족들에게 알려주고 나는 그냥 잠을 잤다. 그 후 용덕이 형은 뇌수술을 네 번이나 하고 2개월 만에 죽었다. 고등학생 한 명도 머리를 다쳐 뇌수술을 했는데 그 애는 정신이 돌아버렸다고 들었다 (허춘섭 1989).  

  그러면 이토록 선두에 있는 시민들이 돌에 맞아 쓰러짐에도 시위대 대열 뒤쪽에서 계속 앞으로 돌을 던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만약 자기가 던진 돌에 시민이 맞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던 것이라면 그것은 군경과 시위대간의 유혈 충돌 선동 세력의 목적은 시민들이 다치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시민 부상자가 실제로 생겨야만 군인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봉기를 선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염병도 시위대나 시민에게 떨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고입재수생 시민군 조철응은 자신이 던진 화염병이 남의 가게 간판에 떨어져 간판을 태운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와 선배는 흩어진 일부 학생들과 함께 충장로로 갔다. 충장로 어느 골목에 가니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화염병이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화염병을 보았고 또한 처음으로 전경들을 향해 던져보았다. 그러나 처음 던져서 그런지 화염병은 내가 던지고자 했던 목표물에 닿지 않고 엉뚱하게도 가게의 간판에 떨어져 간판을 태웠다. 선배를 따라 노래를 부르고 구호도 외치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통금시간이 되기 몇 시간 전에야 집에 들어갔다. 밖이 시끄러운데 내가 계속 돌아다니자 어머니는 못마땅해 하셨다 (조철응 1989).

당시 20세의 농기구 종업원 시민군 김용호는 19일 자기 친구도 시위대가 던진 돌에 눈이 찢어졌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런데 5월 19일 저녁 친구가 비아 가는 쪽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눈이 찢어졌다는 애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후배들이 찾아와 왜 참여하지 않느냐고 부추겼다. 나는 가만허 앉아 있을 수 없어 20일부터 시내에 나갔다. 시내 전체는 최루탄에 뒤덮여 있었고 갖가지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김용호 1989).
시민에게 돌을 던지는 경찰은 없다. ‘친구가 비아 가는 쪽에서 시위를 하다가 경찰이 던진 돌에 맞아 눈이 찢어졌다”는 김용호의 말은 시위대가 경찰에 던진 돌이 자기 친구 눈에 맞았다는 말이다.

19일 시위대 트럭 운전기사의 운전미숙이 빚은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한 조철응은 19일 시위대 차량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한 조철응은 18일에 했던 실수를 20일에 반복하여 화염병으로 또 남의 가게 간판을 태운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도청 앞으로 가려고 수협 옆으로 난 골목으로 갔다. 그곳에도 시민들이 꽤 모여 있었다. 나는 부상으로 몸이 좋지 않아 직접 싸움에 참여하지 않고 사람들 속에 끼여 여기저기를 돌아보았다. 시민들이 많이 모이면 계엄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뿔뿔이 흩어지는 시민들과 함께 나도 우체국 앞까지 도망갔다. 그러나 그쪽에도 계엄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누군가 화염병을 나눠주고 있었다. 나는 몸이 아팠으나 그 순간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단지 시민들을 구타하고 잡아가는 계엄군을 물리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화염병을 받아 우체국 앞에 서 있는 계엄군을 향해 던졌다. 이번에도 역시 화염병은 빗나가 간판에 맞았다 (조철응 1989).

 이처럼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이 엉뚱한 곳에 떨어져 전혀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조철응이 던진 화염병들도 모두 소시민들 가게로 떨어졌다. 이 경우 가게 주인들은 광주사태의 피해자들이다. 그러면 그 가해자는 누구였는가?

왜 중졸 청소년 조철응이 남의 가게에다 화염병을 힘껏 던졌는가? 민주화운동을 위해서였는가? 아니다. 누군가가 화염병을 나눠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화염병을 나눠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조직적으로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청소년이 던지는 화염병은 빗나갈 것을뻔히 알면서도 주었다.  그걸 알면서 왜 주었는가?  사고를 일으키라고, 피해자가 생기게 하라고 주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이 여기저기 마구 화염병을 던지면 피해자가 생기며, 피해자가 생길수록 유언비어로 애매한 군경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며 폭동을 일으키기가 용이해진다. 화염병을 조직적으로 대생산하여 시위군중에 대량 분배한 세력은 바로 그 점을 노렸던 것이다. 

앞의 허춘섭과 조철응의 증언들이 보여주듯이 시위대 중 뇌를 다친 사람들이 있었던 이유는 시위대 돌에 맞거나 운전 미숙으로 인한 교통사고 때문이었다. 자. 5・18 사망자들 중에 시위대 돌에 맞아 뇌를 다쳐 사망한 이들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돌은 이미 흉기이고, 사람을 죽인 것은 살인이다. 시위대가 시위대를 죽이는 것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21일 아침 시민군 무기탈취조 차량 수십 대가 나주와 화순 등 전라도 서남부 지역 각지로 무기 탈취하러 떠나고, 전옥주가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유혈폭동 선동 선무방송을 하는 장면을 쭉 지켜 보았던 당시 수피아여고 2학년생 표강님은 그런 선동이 시민군 사망의 주요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그녀의 소견을 이렇게 피력한다:

 
내가 본 시위대 차량만도 수십 대였다. 나도 남자라면그 차에 탔을 것이다. 머리가 길고 가냘프게 생긴 여자가 계속 방송을 하고 다녔다. "시민 여러분, 학생들이 많이 희생당했습니다. 우리 같이 나가서 싸웁시다." 우리가 함께 참여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는 당시에 뚜렷한 의지 없이 참여했다가 죽은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표강님 1989, 174).
 

2. 시민군 총기 오발사고 및 시민군간의 총격전

그것은 실로 사실이었다. 대한민국 군경과의 유혈충돌을 선동하는 세력이 있었기에, 전옥주가 내전을 선동하였기에, 그리고 그 선동에 선동된 사람들이 있었기에 희생자가 생겼다.  그런데 그런 사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의 시민군 사망 사건이 시민군 총기 사고들이었다. 재수생 시민군 윤석진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들이 있었음을 이런 말로 긍정한다:

그리고 나도 벽에 붙은 채 걸음을 옮겨 금남로를 빠져 유동 삼거리 쪽에 왔을 때 총을 나눠주고 있었다. "총 쏠 줄 아요?" "몰라요." 총 쏠 줄 안다고 하면 무조건 카빈 1정과 실탄 한 클립씩을 주었다. 어떤 사람은 총을 받아 총 덮개를 풀고 개머리판을 버리고 몸체만 가지고 갔다. 총기의 몸체를 어깨에 메고 잠바를 걸치면 밖에서 보면 표가 나지 않았다.광주가 진압을 당하고 난 후에 총기회수가 제대로 안된 것은 그러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작위로 총을 지급해 주었기 때문에 오발사고가 많았을 것이다 (윤석진 1989).

시민군 총탄에 의한 첫 부상자 중에는 훗날 보상금 2억원 수령하고 월북한 윤기권도 있었다.  윤기권의 증언에 따르면, 21일 정오 무렵에도 전옥주가 여전히 유혈 투쟁 선동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때 윤기권이 들은 첫 총성은 시민군 총성이었다.  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  조금후 윤기권이 동명동 인근에서 맞은 총은 시민군 총이었다. 그곳은 도청 계엄군을 포위하기 위한 시민군 진영이었으며, 도청에서 그쪽으로 실탄이 날아가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래서 윤기권 본인도 그의 증언에서 “어디서 날아왔는지”라는 표현을 쓰며 상처도 그리 심하지 않았다.


날이 밝아올 무렵 20명 정도 트럭에 타고 차체를 각목으로 두들기면서 외곽도로를 달렸다. 우리는 화정동 로터리에서 내렸는데, 저쪽 편에서 계엄군들이 계속 지키고 있었다.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한번은 시외버스 한대가 지나가자 시위대측에서 붙잡아 "시위하는 데 쓰자"고 했다. 운전수가 잔뜩 겁에 질려 "좀 봐달라"고 애걸복걸하여 그 차는 그대로 보내주었다. 오전에 우리는 다시 금남로로 와서 계엄군과 대치하였다. 시민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었고 전옥주라는 여자가 계속 마이크로 방송하고 있었다. "시민 여러분, 학생들이 처참하게 희생을 당했습니다. 힘을 합쳐서 계엄군들을 몰아냅시다."
   그때 총소리가 났다. 나는 광주여고 쪽에 있는 신흥주유소 앞으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어디서 날아왔는지 내 오른쪽의 팔꿈치를 총알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픈 줄도 모르고 엉겁결에 피하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한 청년이 부축하여 동명동 쪽에 있는 제일약국으로 들어갔다. 약국 아주머니가 응급처치를 하여 팔 위쪽을 노란 고무줄로 동여매주었다. 그 청년을 따라 어느 체육관에서 조금머물다 진정이 되자 작은집으로 가겠다고 나왔다 (윤기권 1989). 
 그 날 21일 오후 3시경부터 이미 무장시민군이 아무데나 무작정 총을 갈겨댄 사실을 시민군 최영철은 이렇게 증언한다:

 
21일 역시 차를 타고 각목으로 차체를 두들기며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운전수들이 도청을 밀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다. 그날 오후 3시쯤 광주공원에서 총을 지급받고 한 50명 정도의 시위대원들이 학동다리에서 예비군에게 총 조작법을 배웠다. 총을 분해, 소제하고 있다가 방림동 산에 계엄군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무작정 출동해 총을 갈겨댔지만 아무도 없었다. 또 한번은 서방을 통과하다가 중흥교회에 계엄군이 있다고 해서 열 명이서 교회에 대고 무작정 총을 쐈다. 안이 잠잠해 들어가보니 교회 사람들만 방에 숨어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급박하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때 애매한 사람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는가 (최영철 1988).

 최영철은 광주공원 일대에서의 시민군의 그 무차별 발포 사건에 즈음하여 바로 자기 앞에 있던 고교생 시민군도 시민군 오발 사고로 죽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공원에서는 내 앞에 있던 학생이 오발사고로 숨진 일도 있었다. 교련시간에 배웠다며 총을 만지다가 잘못해 그렇게 된 것이다. 또 차에 깔려 죽었다는 공수대 한 명이 가마니에 덮여 있는 것도 봤다” (최영철 1988).   

그렇게 시민군 총에 애매하게 다친 광주시민들 중에 박금희 양도 있었다. 박금희 양이 21일 헌혈하고 귀가하는 길에 공수부대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박양은 21일에 헌혈한 적이 없다. 그녀가 기독병원에서 헌혈한 날자는 20일이었다. 그녀는 귀가 길에 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시민군 차에 실려가다 변을 당하였다. 그 사실을 박양의 부모는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그애 두 손을 잡아끌며,
   "상추라도 뜯어서 밥 먹자."
   "엄마! 저 쑥 뜯어서 쑥버물 해먹세."
   그 말을 들은 나는 이제는 안 나가겠구나
실어 안심이 되었다. 집으로 와서는 새로 산 슬리퍼에 위아래 검정색 옷을 입고 집안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시 밭에 나갔다. 잠깐 동안 밭일을
하고 11시쯤 집에 오니 금희가 없었다. 덜컥 겁이 나서 이웃 아줌마에게

물어보았다.

   "금희 어디 가든가?'
   "진작에 진흥원 쪽으로 갑디다."
   그 길로 나는 금희 단짝인 일심이 집으로 달려갔다. 마침 일심이는 집에 있었다.
   "나는 너랑 같이 간 줄 알았더니 너는 있었구나!"
   "금희가 왔었는데요, 시위대들이 타고 다니는 차를 타고 다시 갔어요"
   한참을 찾으러 다니다가 시계를 보니 5시가 다 되었다. 모든 친척집에 연락을 해봐도 금희는 없었다 (박명민, 문귀덕 1988, 178-179).


 박금희는 기독병원 인근, 즉 백운동 방면 남광주 지역에서 살고 있었으며, 공수부대는 그 날 그쪽을 지나간 적이 없었다.  그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도청 정문 앞에서만 도청 방어를 하고 있던 공수부대는 오후에 남광주와는 정반대 방향인 무등산쪽으로 퇴각하여 철수하였다. 그녀 동네 인근, 즉 백운동 방면 남광주 지역에서는 시민군 차량을 타고 다니던 시민군끼리 총격전을 벌인 사건이 있었다.  그때 시민군이 인가를 향해 총을 쏘아댔으며, 그녀는 그 총탄에 맞았던 것이다.

시민군 차량 급유 아지트였던 백운동에는 군인은커녕 그림자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 지역에서 발생한 총기 사망 사고는 시민군 총기에 의한 사고였음이 명명백백하다.  시민군 이수범은 백운동은 시민군 차량에 급유하는 시민군 후방 지역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시위차량은 주로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가져왔다는 군용트럭이 많았고 광주고속 버스도 있었다. 나는 그중 군용트럭 한 대에 올랐다. 내가 탄 차에는 7명 정도의 시위대가 타고 있었다. 다른 시위차량도 많았는데 이곳저곳에서 젊은 사람은 차에 타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차에 타는 사람은 대개 다 젊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들은 차에 타는 대로 백운동 쪽으로 차를 몰아갔다. 백운동 어느 주유소에서는 시위차량이 도착하는 대로 기름을 가득 넣어주었다 (이수범 1989).

그렇게 시민군이 시민들을 시민군 차에 태워 이 지역 저 지역으로 실어나른 후에는 데리고 오지 않은 것이 행방불명자가 생긴 원인이었다. 시민군 강주원은 21일 오전 자신이 승차했던 시민군 차량도 시민들을 담양으로 실어다 나른 후 그냥 출발한 사실을이렇게 증언한다:
내가 탄 차는 나중에 도착했다. 나는 일부 사람들과 주유소로 갔다. 주유소 주인은 어쩔 수가 없었는지 호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기름을 내어주었다. 시민들은 통이 있는 대로 기름을 담았다. 그곳에서 나를 포함한 몇몇은 또 다른 주유소로 가보자는 제의에 그곳을 떠났다. 주유소를 물어서 찾아가 기름을 빼내 차들이 있는 곳으로 와보니 차가 이미 떠나고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 지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각자 헤어졌다 (강주원 1988).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동승하고 가톨릭농민회 소속 시민군이 길 안내하는 시민군 차량은 운동권 노조 여공 등 젊은 여성들을 태웠는데, 그 이유는 봉기 선동 선무방송 및 무장시민군 이미지 프로파간다 등을 위해서였다. 영암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이서운 주부는 무장시민군이 젊은 여성들을 시민군 차량에 싣고 전라남도 여러 지역으로 데리고 간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다음날(22일) 오후에 노랫소리가 들려와 또 시위대가 들어왔으려니 생각하고 밖에 나가보니 트럭 한대가 왔다. 이번에는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여학생들까지 태우고 왔으며, 사람들 말로는 경찰서로 간다고 했다. 실제로 그 트럭은 경찰서 쪽으로 갔다. 이후로 시위대는 영암읍을 비롯하여 이 근처에서 차량을 징발해 갔으므로 사람들은 차를 숨겼다 (이서운 1988).

위의 박금희 양도 이렇게 시민군 차량에 실려 다니다가 시민군 총에 맞아 사망한 케이스였으며, 아가씨들을 먼 지방으로 실어다 놓고 데리고 오지 않는 것이 행방불명자가 생긴 원인이기도 했다. 시민군 차량은 처음에는 픽업 차량 행세를 하지만 그 픽업 차량 승차는 시민군에 자원 입대하거나 징병된 것으로 간주되었었음을 시민군 최영철은 5월 24일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이렇게 증언한다:
……월산동 외곽도로를 지나 백운동 철길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내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운전수가 차를 세우지 않고 남평 쪽으로 계속 달렸다. 그 지프차에는 운전수와 조수, 그리고 나 외에 청년 넷이 더 타고 있었다. 차는 진월동 효덕국민학교 앞에서 멈췄다. 그러자 조수가 우리 다섯 명에게 철모와 총을 하나씩 나눠줬다. 그는 시민군의 역할분담에 따라 외곽지역 방어를 맡았던 사람인 것 같다. 나는 공교롭게 카빈과 M1총을 다 지급 받았다. 카빈 실탄은 15발, M1 실탄은 세 발을 받아 바지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우리를 내려놓고 차는 바로 되돌아갔다. 차가 떠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학생들이 학교운동장 에서 "군인이다"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시간이 오후 2시쯤 되었을 것이다 (최영철 1988).

 시민군 사망 이유 중 하나기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였다. 고등학생 시민군 김수영은5·18 광주의거 유족회 회장 전계량의 아들 전영진도 임신한 여성도 5월 21일 시민군 총탄에 맞아 사망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김수영 1988).

 고등학생 시민군 김수영은  21일 시민군 진영 광주은행 앞에서 두 명의 고등학생 시민군이 시민군 총탄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의 현장 증인이다. 그 중 한 명은 차에 탔던 학생이었는데, 그 날 그 곳에서 시민군 차에 타고 있다가 사망한 고등학생이 바로 운동권이 전영진 열사라고 부르는 그 학생이었다. 어깨에 총을 맞고 머리를 다친 그는 전남대 병원으로 후송된 후 사망하였다.

비록 아주 가벼운 총상이었기는 했지만 광주은행 사거리 시민군이 쏜 총에 바로 그 시각에 부상을 당한 시민군 중에는 당시 14세의 중학생 시민군 지영길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바로 광주은행 사거리에서 총상을 입은 그 장본인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탄 차가 광주은행 본점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총소리에 놀란 운전사가 급히 커브를 틀었다. 어떤 사람이 다급하게 외쳤다. "모두 차 바닥에 엎드려."그 순간 바닥에 몸을 숙이면서 도청 앞을 힐끗 보니 시민들이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있었다. 트럭 제일 뒤에 타고 있던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굽히는 순간 머리를 몽둥이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내 옆에 앉아 있던 고등학생인 듯한 남학생이 나를 보고는 운전사에게 외쳤다. "총맞은 사람이 있으니 빨리 병원으로 갑시다.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니 피가 흥건하게 만져졌다. 곧 얼굴 전체가 피로 물들었다. 아마도 전일빌딩이나 관광호텔옥상에 있던 계엄군이 쏜 총에 맞은 모양이었다 (지영길 1989).

 이 사건 역시 그동안 계엄군이 누명을 써온 사건이었으나 전일빌딩 옥상에서 쏜 공포탄이 광주은행 사거리로 날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중학생 시민군 지영길은 트럭 맨뒤에 있었다.  수백 미터 앞 전방에서 누가 총을 쏜 것이라면 운전수만 명중 대상이 될 수 있을 뿐 뒤쪽 화물칸으로 실탄이 날아가지 못한다. 더구나 20 여명이 승차한 트럭에서 지영길은 맨뒤에 있었다.  오로지 그의 바로 뒤에서 쏜 총만 그를 명중시킬 수 있었으며, 그곳이 바로 광주은행 사거리였다. 앞에서 시민군 김수영 등이 증언하듯이 그때 광주은행 사거리 시민군이 총을 쏘고 있었으며, 지영길은 바로 그 총에 맞았던 것이다.

위의 시민군 김수영의 증언대로 이때 동구청 옆 골목에서 시민군 총탄에 맞아 부상 입은 시민군 중에 당시 용접공이었던  17세의 청소년 시민군도 있었다.  최인영은 총을 만져본 적도 없는 청소년이었다. 그런데, 최인영이 누군지 전혀 알 수 없는 자들, 그러기에 북한군 혹은 불순세력으로 우리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세력이 그를 특공대원으로 임명하고 도청앞으로 들어가 각개격파를 하라는 군사작전 명령을 내렸다. 그가 그 명령에 따랐을 때는 그는 국군을 상대로 전투행위에 돌입한 것이었다.  동구청 인근 지역은 시민군 진영이었다. 그래서 눈을 씻고 보아도 거기에는 공수부대는 없었다. 그런데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한 발의 총성이 집단 발포였는가?  아니다. 오발사고였기 때문에 단 발 총성이었다. 그리고 청소년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로 어깻죽지에 총을 맞은 청소년 시민군들이 여러 명 있었는데, 청소년 시민군 최인영은 자신도 어깨에 총상을 입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나 역시 총을 만져보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좀 들어보였던지 쉽게 한 정을 내주었다. 우리가 남평 지서에서 가져온 20정 정도의 총과 탄창이 시위대 청년들에게 고루 분배되잔 자체조직이 생겼다. 소위 특공대라 불리는 15명 정도의 청년들은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그러나 특공대 15명 정도가 무기를 들긴 했지만 무장한 공수부대와 정면대결을 하기에는 무리일 것이라 판단했다. 결국 우리는 도청 앞까지의 정면돌파는 피하고 각자 흩어져서 도청 앞으로 진격해 들어가 각개격파를 하기로 했다. 나는 혼자서 가톨릭센터 뒷골목을 거쳐 도청을 향해 나아가기로 했다. 동구청 부근까지 왔을 때 도청 앞 공수들과 시민군의 접전상황 이 보이지 않아 몹시 궁금했다. 상황을 살피려고 동구청 옆 골목으로 걸어나왔다. 총을 앞으로 겨냥 한 자세로 고개를 쑥 내밀고 금남로를 내다보았다. 마침 내가 서 있던 동구청 바로 정면에서 공사 중인 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서 공수부대들과 대치하여 싸우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뛰어가려고 했다. 그 순간 귀 가까이에서 '탕' 하는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나를 향해 사격하고 있다는 것을 직 감하고 멍해지면서 기절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잠시 후 정신이 들었다……순간 나는 꽂아놓은 링게르를 빼버리고 도망치듯 병원을 나왔다. 목과 오른쪽 어깨 사이를 앞에서 뒤로 스치고 나간 총알의 상처는 길지 알고 다만 피를 조금 흘렀기 때문에 반창고로 응급치료만 해둔 상태였다 (최인영 1989).

 5・18부상자 최인영이 입은 총상은 사실은 면도하다 면도칼에 벤 정도의 아주 가벼운 상처, 전혀 치료가 필요 없는 상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총에 맞았다.  그는 상처를 입거나 피를 흘려 기절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 총소리에 놀라 기절했었던 것이다. 이때가 오후 3시를 조금 지난 때였다.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는 무장시민군이 선제공격하기 이전에는 공수부대는 방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서술한다. 무장시민군이 군사작전을 세우고 군사 공격을 해 올 때에 공수부대가 도청을 방어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치이다. 도청 별관 옥상 등 도청 주변 건물 옥상에 한 명씩 네댓 명이 공수부대원이 배치된 때는 시민군 장갑차의 제3차 공격이 시작되었던 오후 2시 50분 이후였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0:153). 공수부대는 시민군에 사면 팔방으로 포위되어 있었고, 도청 주변 건물 옥상에만 네댓 명 배치되었으며, 그 외의 시민군 점령 지역에는 전혀 공수부대원들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공수부대가 동구청 옆 골목의 시민군 최인영에게 총을 쏘기는커녕 그를 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최인영 편에서도 그의 시야 그 어디에도 공수부대는 없었으며, 전혀 총소리를 듣지 못했다. 

무장시민군이 선제 공격하기 이전에는 공수부대원들이 도청 별관 및 상무관 옥상에 배치된 적도 없거니와 높고 육중한 전일빌딩이 시야를 가로막아 상무관 옥상에서 쏘는 총이 동구청 옆 골목으로 날아가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거니와 옥상 위에서 쏘는 공포탄이 저 아래 길바닥에 있는 사람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의 총상이  5・18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조준사격에 의한 총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반창고 하나 붙이는 것으로도 충분한 가벼운 상처였다는 사실만 보아도 명확하다.  만약  M-16 조준사격 거리에서  날아온 총탄이었다면 총알이  튼 반경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맴돌면서 관통하기 때문에  스쳐가는 총탄도 신체 일부를 후비며 큰 상처를 남긴다.  최인영은 총구로부터 10센티도 안 떨어진 곳에서 카빈 총탄에 맞았기에 실탄이 전혀 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작고 무딘 쇠조각처럼 목과 오른쪽 어깨 사이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총을 만져본 적이 없는 청소년 최인영이 실탄이 장진된 총을 분배 받았다.  총을 쏠 줄도 그는 방아쇠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총을 비스듬히 들고 뛰어가려는 순간 방아쇠가 격발이 되어 자기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은 그의 뒤에 있던 임신한 여자 가슴에 맞았다. 이 사실에 대한 현장 증인이 고등학생 시민군 김수영이다. 그는 최인영과 같은 특공대에 소속해 있었던바, 이 사실은 최인영이 무기를 분배 받은 바로 그 장소에서 그도 무기를 분배 받았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김수영의 증언을 여기서 다시 발췌 인용해 보자.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김수영 1988).

김정균은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우발적으로 오발사고가 났던 것이 아니라 시민군이 의도적으로 광주은행 본점 건물을 향해 총을 쏜 것이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또 한 며칠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시민군들이 광주은행 본점 건물을 향해 총을 쏜 적이 있다. 그때는 대부분의 사무실이 커튼을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은행 6, 7층 중 한 사무실의 창문에 커튼이 약간 젖혀진 것을 발견한 시민군들이 '계엄군이 저 건물에 있다'면서 총을 쏜 것이다 (김정균 1989).

광주시내 건물들로 총탄이 날라왔다. 어디서 날라왔는가? 시민군으로부터 날라왔다. 왜 시민군이 총을 쏘았는가? '계엄군이 저 건물에 있다'면서 총을 쏘았다. 그러나, 계엄군이 그 건물에 있었다는 증거가 있었는가? 아니다. 무장시민군이 완전 장악한 광주은행 일대에서 계엄군이 그 건물에 있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김수영은 자신이 무기분배를 받은 위치를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이라고 밝혔다.  그곳이 바로 시민군이 최인영이 증언하는 무기분배 장소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였다 (최인영 1989).  검찰측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 역시 21일 오후 3시경의 무기분배 장소는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였다고 기록한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50:153). 시민군 무기 분배가 시작되었을 때 무기를 받은 이들은 주로 중고생들이거나 진학 못한 청소년들이었다.  그리고 무기가 분배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총기 오뱔 사고로 시민군 사망자들이 생겼으며, 그 사고를 현장 목격한 김수영이 또 한 명의 청소년 시민군 최인영이 앞서간 동구청으로 옆 골목으로 갔을 때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임신한 여인가슴에 맞는 사건을 현장 목격하였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 (김수영 1988).

 이 여인은 청소년 시민군 최인영의 총기 오발 사고로 그의 어깨를 스치고 뒤로 날라간 총알에 맞아 사망하였던 것이다. 그 사실은 그때 그 골목에서 총을 가진 유일한 인물은 청소년 시민군 최인영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총성은 단 한 발 울렸는데, 임신한 여인 등 두 세 사람이 총탄에 맞았다는 사실 등으로 확인된다.  "여자들 유방을 대검으로 도려냈다. " "임산부 배를 갈랐다. " 등의 악성 유언비어의 원인이 바로 이 사건이었음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청소년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로 임신한 여인이 가슴에 총을 맞아 사망하자 그 누명을 애매한 공수부대에 뒤집어 씌었을 때 그런 유언비어가 생겼으며, 계속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는 방법으로서 그 유언비어가 유포되었을 것이다. 

동일한 청소년 시민군 최인영의 증언이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에서 1990년에 엮은『광주오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서는 이렇게 수록되어 있다:


남평지서에서 무기를 탈취해 3시경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에 도착한 우리는 시위대의 환영을 받았다. 그 무렵 무장한 시민군은 우리가 처음인 것 같았다. 시위대들은 서로 총을 받으려고 했으나 20정 정도밖에 되지 않아 총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만 분배되었다. 특공대라고 불리는 무장청년들이 모여 작전을 세웠다. 도청 주변에 있는 공수부대와 정면대결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서로 흩어져 도청을 향해 진격하기로 했다. 나는 혼자서 가톨릭센터 뒷골목을 통해 도청 쪽으로 가기로 하고 동구청까지 왔다. 총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하자 상황을 살피기 위해 동구청 옆 골목으로 와 금남로 쪽을 내다보았다. 동구청 맞은편에 있는 공 사장으로 가서 싸우면 좋을 것 같아 그쪽으로 달려가는데 '탕!'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

 5・18무장단체 혹은5・18 무장청년들을 특공대라고 부르는 자들이 있었다.  이 특공대에 대하여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알고 한가지를 모른다.  특공대라는 명칭은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정해진 명칭이다.  즉, 특공대라는 명칭은 5월 21일 오후 3시경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에서 우발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기획한 자 혹은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사전에 정했다는 사실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 총무 양강섭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다:  "15일부터 집행부 내부에서는 도청접수 문제가 심각하게 거론됐다. 한상석, 송선태, 정동년, 김상윤 등이 모여 회의를 했다. 협조적인 시민들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와 고교생을 동원하는 문제, 그리고 도시 침투에 대해서 논의했다. 특공대 조직까지 거론됐다" (광주매일『正史5・18』1995, 126-127).

또 우리는 전남대 학생 중에는 그 아무도 특공대를 조직한 자가 없었으며, 더구나 중고생과 청소년들을 데리고 특공대를 조직한 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이것은 전남대 학생회 운동권 조직이었던 집행부가 어떤 불순세력과 연계되어 있었음을 반증한다. 즉, 집행부에서 특공대 조직을 거론하였으나, 특공대 조직의 주체는 별도의 세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한가지를 모른다. 청소년 시민군 최인영도, 고등학생 시민군 김수영도 광주시민들도 우리도 여전히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다.  도대체 5월 21일 오후 3시경에  충금지하상가  사거리에서 특공대를 조직한 무장청년들의 정체를 우리는 모른다. 그들이 불순세력이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을 뿐 그 이상은 베일에 가리어져 있다. 그래서 그들의 정체가 밝혀지기도 전에  광주 운동권 김영진이 5・18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한 것은 성급하였다는 국민정서가 팽배한 것이다.


어째서 불순세력이 10 여명의 청소년들로 구성된 특공대를 조직하여 도청을 공격하게 했는가? 총을 쏠 줄 모르는 청소년들이 공수부대를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는가?  아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정반대였다. 청소년들은 쉽게 선동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쉽게 죽거나 부상당할 수 있다. 불순세력은 바로 이 점을 노렸을 것이다. 청소년 사망자가 생기면 무장봉기 선동이 더욱 효과적인 사실을 노렸을 것이다. 누구든 정말로 광주의 청소년들을 사랑하는 이라면  총을 만져본 적도 없는 청소년들에게 실탄이 장진된 총을 주고 국군을 향하여 쏘라고 선동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여하튼, 대부분의 시민군 및 민간인 희생자는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 에 희생되었다는 이것이 5・18측에서 공수부대 집단발포라고 주장하는 사건의 진실이다. 그러나 실제 사건에서는 대부분 시민군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사실, 그 날 도청광장에서의 시민군 사망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그 날 시민군 사망자가 생긴 원인은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하여 생긴 전투와 아침부터 전라도 전 지역으로 무기탈취하러 가다가 발생한 교통사고 등이었다.  무장시민군이 도청을 공격하던 중 뱔생한 사망사건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그 수가 적었다.  철수 허락을 받는 대로 군경은 즉시 철수하였던 까닭이다.   임신한 여성도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에 맞았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란 표현은 시민군 진영에서 날아온 총알이기 때문에  사용된 표현이다.  임신한 몸으로 공수부대와 총격전을 벌인 여성 시민군은 없었다. 이 여성은 시민군 총탄이 날아다니는 지역에서 사고를 당하였다.  


왜 시민군 및 시민 사상자가 생겼는가? 무장시민군이 여기저기서 총을 쏘며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자신도 여기저기서 총을 쏘며 돌아다녔음을 중졸 청소년 무장시민군 조철응은 이렇게 증언한다:


5월 21일에도 다시 시내로 나왔다. 이날 오전에 내가 어떻게 시위를 하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오후에 도청에서 전남대병원으로 가는 길목에서 화순 방면에서 가져왔다는 수류탄 2개와 카빈총 한 자루, 그리고 방독면 담는 가방에 가득 찰 정도의 실탄을 지급받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총을 쏘며 돌아다녔다 (조철응 1989)

 중졸 청소년은 총을 쏠 줄 모른다.  그런 중졸 청소년에게 수류탄 2개와 카빈총 한 자루, 그리고 방독면 담는 가방에 가득 찰 정도의 실탄을 지급한 자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총 조작법을 모르는 청소년이 그 총으로 민주화운동을 하기를 기대하였는가?  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잘 훈련된 군인도 조심해서 다루어야 하는 수류탄을 청소년들에게 준 자들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 그렇게 하였는가? 아니다. 정반대의 이유를 위해서였다. 중졸 청소년에게 수류탄과 총과 실탄을 주면 시민의 안전이 위험해진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청소년들을 무장시키는 자들이 불순세력 외에 또 누가 있었을 것인가?  

미공개자료・조선일보 취재일지 408~409쪽은 오후 4시 15분에 전남의대 12층 옥상에 설치된 시민군 LMG 2대 가 도청을 향해 발사하고 있던 사실을 ‘총리실 정보비서실 입전 보고’를 인용해 이렇게 기록한다:

• 오후 4시15분 시위대 전남의대 12층 옥상에 LMG 2대 설치, 5백m 떨어진 도청향해 발사중. 소방차 1대에 석유를 만재, 도청 방화위해 진출중. 일신방적 무기고에서 카빈 1백50정 피탈.
• 오후 4시21분 호남집중 무기고에서 카빈 1백80정, 실탄 9백발(화순), 승주지서에서 카빈 40정 탈취. ○○사단 병력지원 차 출동.
• 오후 4시25분 한국화약에서 화약 6트럭분 수송치 못함(경찰쪽으로). 서울 시내 중•고생 내일(22일) 오전 봉기한다는 정보있어 시교위, 문교부가 총동원, 교사 비상동원, 무마작업중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4:98-99).

영화 ‘화려한 휴가’는 시민군이 엄청난 양의LMG 실탄을 도청을 향해 발사한 사실을 보여준다. LMG 발사는 도청 점령을 노리는 시민군 군사 작전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누가 발사하였느냐의 문제가 있다. 그들은 학생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정체는 누구였는가?

우리가 지금껏 그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 무장단체가 도청을 향해LMG 기관총을 발사하였을 때 그것은 맞은 편의 시민군을 향한 발사이기도 했었다. 대동고 전영진 열사 등 일단의 시민군이 정반대 방향에서 도청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도청 주변에 이르렀을 때 시민군 LMG에 맞았을 수도 있다. 만약 그 주변에 행인이 있었다면 이것은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도대체 시민군 LMG 발포 명령자는 누구였는가? 여태껏 우리는 그들의 정체조차 모르고 있다. 민가로 에워싸인 도청을 향해 LMG 기관총을 발사하는 것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시민군 사망자 및 시민 부상자가 생긴 가장 큰 이유는 시민군끼리의 총격전 때문이었다. 김상중씨의 경우도 주유소 부근에서 시민군끼리 벌인 총격전에 총상을 입었다. 그는 어느 학교 부근 주유소 앞에서 총성이 울림과 동시에 자신이 총에 맞은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병원에서 돼지밥 줄 시간이 되자 매형과 나는 병원을 나섰다. 병원 앞 거리는 돌과 최루가스로 어수선했고 버스도 다니지 않았다. 23일 오후 4시쯤 무등중학교를 거쳐 돌아오면서 매형은 볼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갔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걷고 있는데 갑자기 주유소(무슨 주유소인지 기억 나지 않으나 무등중학교 부근에 주유소가 하나 있었음) 앞에서 총소리가 났다. 나는 무조건 뛰었다. "쏴버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왼쪽 옆구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푹 고꾸라졌다. 통증만 왔을 뿐 피도 나지 않았으나 일어설 수가 없었다. 엎드린 채로 살펴 보니 연탄배달 가게가 눈에 띄었다. 그쪽을 향해 나는 죽기 살기로 기었다. 대문을 두드리자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학생 2명이 나왔다. 대문을 열고 그 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들어가는데 계속 총알이 날아들었다……6시쯤 되자 총성이 멎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김상중 1989).

 이 사건의 가해자는 시민군이었음에도 5.18진영은 공수부대원에 누명을 씌워왔다. 21일 오후 공수부대가 광주외곽으로 철수한 후 광주에는 단 한 명의 군인도 남아 있지 않았다. 23일 광주에 공수부대가 있었는가?  21일 오후부터 27일 새벽 이전까지의 시간대에서 광주시내에서 울린 총성은 모두 시민군 발포에 의한 총성이었다. 자, 김삼중은 주유소 앞에서 총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고등학생 시민군 임호상은 실제로 대창주유소 일대에서 시민군끼리 총격전이 벌어진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덕림사에서 저녁밥을 먹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백운동 쪽에서 총소리가 났다. 대성국민학교 쪽으로 가보니 골목골목에 시민들이 숨어있는 것이 보였다. 거리는 물론이고 집집마다 불을 꺼버려서 캄캄했다. 시민군들이 대창주유소에서 총소리가 난 곳을 향해 총을 쏘았다. 우리는 그 총소리를 들으며 어둑어둑한 도로를 더듬어 대창주유소 건물내로 들어갔다. 갑자기 암호를 대라는 소리가 들렸다. 암호를 몰랐던 우리는 몹시 당황했다 (임호상 1988).

 5・18 부상자 김삼중은 주유소 앞에서 총소리가 난 후 “쏴버려!” 소리와 더불어 계속 총알이 날아들었다고 증언한다. 그는 그때가 오후 6시쯤이라고 했다. 고등학생 시민군 임호상은 대창주유소에서 총소리가 나자 시민군이 총소리가 난 곳을 향해 총을 쏜 때가 저녁식사 시간 직후였다고 증언한다. 따라서 김상중과 임호상은 동일 사건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주유소 앞에서 총소리가 나자 감상중이 도망갔을 때 시민군은 도망가는 자를 적으로 간주하고 계속 쏘았던 것이다. 그곳 시민군은 인기척이 있고 상대방이 암호를 모르면 사격하라는 지시를 받아두고 있었다. 이렇듯 김상중씨 총상 가해자도 시민군이었다.

군용차량을 다고 다니던 무장시민군끼리 총격전을 벌였던 백운동 인근 지역에서 총상 사망자들이 발견되었다.  역시 군용차량을 타고 백운동 지역을 다녔었던 고등학생 시민군 김수영은 자신이 그 지역에서 목격한 시신들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한번은 백운동에서 나주 가는 길목으로 지프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논두렁을 가리키며, "저기도 있다."고 해 가보니 남자 시체 8구가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김수영 1988).  

자, “머리에 띠를 두르고 무장을 한 계엄군과 같은 군인”이 누구인가? 시민군인가? 계엄군인가? 이 15명의 무장단체는 시민군이었다는 사실에 혼동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계엄군이라는 것은 세 가지 이유로 불가능하였다. 첫째로, 머리에 띠를 두른 장발족 계엄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둘째로, 21일경이면 계엄군이 모두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여 단 한 명의 군인도 남아있지 않았던 때였다. 셋째로, 계엄군은 가택 수색을 하지 않았다. 그 15명은 시민군이었다.  그 15명의 시민군이 조강일 군 집을 찾아온 날은 정확히 22일로서 그 이유는 그 날 아침 조강일의 아버지인 그가 시민군 총을 빼앗아 갔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친구 조강일이 시민군 암호도 모르면서 밤에 총을 들고 다니다가 시민군에게 사살당한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였을 때 조강일 아버지가 총을 빼앗아간 것이었다그 사실을 조강일의 단짝 친구 박규상은 이렇게 증언한다:


그날 저녁 계엄군이 시외곽으로 물러났으나 다시 들어올 것에 대비해 시민군들이 지역방위를 선다는 말이 들렸다. 나와 강일이 철신이는 홍재를 불러내 덕림사에서 보초를 서기로 했다. 배가 고파 주지스님 몰래 덕림사에서 식은밥을 갖다가 먹고 우리들은 보초를 섰다. 자정이 되도록 아무 일이 없자 절에서 내려와 부근의 대성국민학교 건너편에 있는 대창석유라는 주유소 쪽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암호!' 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당시 시민군 사이에서는 밤에 사용하는 암호가 있었는데 우리더러 그 암호를 대라는 것이었다. 암호를 몰랐으므로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쪽에서 다시 물어왔다.
"시민군이오. 계엄군이오?"
"시민군이오."
"손들고 나오시오."
그 사람을 따라 주유소 앞으로 가보니 시민군 몇 명이 기관단총으로 세워두고 근무를 서고 있었다. 여차하면 쏘려고 했는데 우리 보고 운이 좋다고 했다.
다시 덕림사로 돌아온 우리들은 그곳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에 어떻게 알고 왔는지 월산동 통장인 강일이 아버지와 덕림사 주지스님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빼앗았다 (박규상 1988).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군 편에서는 없어진 총기 행방을 알기 위해서라도 조강일을 찾아왔던 것이었으며, 이 무장단체 15명이 시민군이었다는 사실에 추호도 혼동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어떤 광주시민들은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고, 빨간 색이면 사과다” 식의 논리, 즉 “시민군도 군복입고 무장했으면 군인, 군인은 계엄군”이라는 고의적인 혼동으로 시민군 만행에 대한 누명을 애매한 군인들에게 씌웠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증언록의 실제 작성자, 즉 조삼남씨와 면담하여 정리한 최정숙이 5.18 진영에 불리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머리에 띠를 두르고 무장을 한 계엄군과 같은 군인”이란 길고 애매모호한 어구를 사용한 듯하다.

그런데 머리에 띠를 두른 군인은 계엄군이 아니라 명백히 시민군이었다는 사실을, 시민군은 21일 오후 시경부터는 이미 머리에 띠를 두르고 있었음을 대동고 시민군 유석은 이렇게 증언한다:

금남로는 사람과 차량이 붐벼 혼잡했고 또 도청에서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기에 차량들이 광주공원으로 집결했다. 나도 광주공원으로 가서 차량을 통제하며 공원으로 몰려드는 각종 차량들을 교통정리했다. 오후 6시경부터는 획득한 총기와 실탄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공원 앞을 지나는 차량에 배급했다. 차량당 카빈 소총 2,3정과 실탄 약간을 지급했다. 총기를 지급하면서 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머리띠를 매라고 했다 (유석 1988).

유석은 이어 오호 6시경에 춘태여고생 한 명이 시민군 총기 오발사고로 사망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공원에서 총기를 지급하는 도중에 오발사건이 몇 건 발생했는데 들리는 바로는 춘태여고생 한 명이 오발사고로 사망했다고 했다. 또 광주공원으로 위아래 푸른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군화를 신은 저격병의 시체 1구가 실려왔다. 이 저격병은 말일성도교회 앞에서 시민들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사살되었는데 엎드려총 자세로 숨져 있었다. 그 뒤로 또 1명의 저격병이 화니 백화점 앞에서 생포되었는데, 그 저격병은 "나는 전경이다"라고 저격병임을 부인했다 (유석 1988).
위의 증언에서 푸른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군화를 신은 저격병은 시민군이다. 21일에 트레이닝복 차림의 군인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후 6시이면 이미 공수부대가 전원 철수한 뒤였으며, 그 날 광주공원쪽에는 단 한 명의 군인도 있었던 적이 없다. 군화를 신은 시민군이 많았었다는 사실은 여러 시민군 사진들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따라서 유석의 증언은 광주공원에서도 시민군끼리 총격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어째서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이 발생하였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었겠지만 그 중 두 가지 이유를 우리가 확인할 수 있다. 첫째로, 무장시민군이 그날 21 오후 5시 30분에 도청을 점령한 후 첫 번째 내린 조치가 통행금지였다. 광주시 당국이 전날 내린 10시 이후 통행금지령이 지켜지기는커녕 시위대 버스가 전경 4명을 깔아죽였다. 그때 경찰이 시위대 야간통행을 단속할 수 있기는커녕 시위대가 무서워 그  4명의 전경 시신조차 병원으로 후송할 수 없었다. 이런 물렁한 광주시 당국의 통행금지령에 비해 시민군이 내린 통행금지령은 아주 엄격하였다.  오후 6시 이후부터의 통행이 금지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6시 이후 돌아다니는 사람은 현장 사살하겠다는 아주 엄격한 통행금지령이었다. 그 사실을 고등학생 시민군 김행주는 이렇게 증언한다:

21일부터 총기를 탈취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다녔다. 나에게 총을 가지러 갔다 오라고 했으나 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화순, 나주, 해남까지 총을 가지러 간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 해남 군부대, 일신방직까지 갔다 왔다고 했다. 밤이 되었다. 헬기는 여전히 위협적으로 공중을 선회하고 있었다. 시민군들이 "6시 이후 돌아다니는 사람은 발포하겠다."고 말했다. 그때는 이미 계엄군들이 도청을 제외한 광주시내 전지역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광주시내를 지키기 위해서 그런 발포령을 내렸다. 나는 그때 광주공원에서 집이 멀지 않아 집에 가려고 그곳을 나왔다. 광주공원에서 구동시장까지 처마 밑으로만 숨어서 갔는데 그때가 5시 40분경이었다. 계속 공중에 서는 헬기가 선회하고 있었고, 아무래도 집에 도착하기 전에 6시가 될 것 같았다 (김행주 1989).

 오후 6시 이후 돌아다니는 광주시민은 현장 사살 대상이었다.  그러나 시민군에게는 암구호가 전해졌다. 그런데 시민군이라 할지라도 암구호를 모르는 자는 현장 사살 대상이었다. 그래서 무장시민군이 해방구를 설치한 이후광주에서 시민군간의 총격전이 자주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러 고등학생 시민군이 증언하는 대로 그런 시민군 총격전이 시민군 기지와도 같았던 백운동에서 더욱 잦았던 것이다.

시민군이 내린 통행금지령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날 해질 무렵에도 외곽과 경계를 이루는 동네에서 시민군이 시민군을 향하여 총을 쏘는 사건들이 있었음을 대동고 시민군 유석은 이렇게 기록한다:

별다른 일 없이 외곽을 경비하던 중 우진 아파트 앞을지나는데 우리가 타고 있던 차량에 총알이 날아왔다. 모두들 차에서 내려 버스 밑에 숨어 있다가 총을 갖고 있던 몇사람이 총알이 날아온 곳으로 가보았지만 총을 쏜 것으로 생각되는 저격병을 잡지는 못했다. 우리들도 다행히 피해는 없었다. 외곽을 경계하러 월산동 쪽으로 갔을 때는 시민들이 주먹밥,김밥,음료수 등을 제공해 주었고 저녁 추위를 견딜 수 있게끔 옷가지를 날라다주었다 (유석 1988).

5월 21일 저녁식사시간 무렵 광주 외곽에서도 시민군 사격으로 시민 2명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음을 김치년은 이렇게 밝힌다: “이 시각에 외각 봉쇄를 맡았던 인접 대대에서는 픽업차량을 타고 교전중인 지역을 지나던 주민 4명이 총상을 입었다. 그 중 2명은 사망했다. 그런데 이들이 입은 총상은 카빈이었다. 시민군의 사격으로 민간인이 죽은 것이다” (김치년 1996, 439). 검찰 발표문도 시민군간의 간헐적인 총격전으로 시민군 사망자가 발생한 사실을 확증한다:


광주-담양간 국도와 순천행 고속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 교도소에서 외곽 봉쇄 작전을 수행하고 있던 3공수여단 병력과 교도소에 접근한 시위대 간에 간헐적으로 총격전이 발생했다. 그 와중에서 19시30분께 픽업차량을 타고 교도소를 지나가던 담양 거주 주민 4명이 카빈 총상을 받아 임은택(남.35세)과 고규석( 남 37세) 등 2명이 좌대퇴부 또는 흉부 관통 총상으로 사망했다 (5.18 사료편찬위원회 2009, 11: 740).


고등학생 시민군 김행주는 자신도 21일 저녁 발포하여 가로등 두 개를 깨뜨린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밤이 되니 가로등이 환하게 켜졌다. 옆사람이 카빈을 주며 가로등 때문에 헬기에 우리가 노출이 된다며 가로등을 쏴버리라고 했다. 광주공원에서 서현교회 쪽의 길가 가로등 2개를 총으로 쏘아 깨트렸다. 처음 쏴보는 총이었다. 공원에 모인 사람들이 조를 짜기 시작했다. 기동타격대는 아니었고 그 시초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우리는 질서를 지켰다. 각 조에 차와 총이 배당되었다. 내가 있던 조에는 버스가 배당되었다. 우리 조에게는 일신방직에 가서 거수자 색출을 하라는 임무가 떨어졌다. 우리는 일신, 전남방직을 살피러 갔다.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었더니 수위가 나왔다. 그렇게 정찰을 하러 천변도로로, 라이트를 끄고 서행으로 운전을 하며 카빈을 들고 창밖으로 바깥을 살피며 갔다 (김행주 1989).

 그 무렵 무장시민군이 이미 모든 도로를 장악하였기 때문에 공수부대의 유일한 퇴각로는 조선대 뒷산이었다. 그런데 시민군이 갈겨대는 LMG 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간담이 서늘했을까?  고등학생 시민군 김행주는 자기 조가그 퇴각로를 향해 LMG 1,500발을 쏘아댄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백운동 철도를 거쳐 화순 가는 길목으로 갔다. 그렇게 차를 타고 다니다가 도청 점거 소식을 들었다. 어둡고 추운 밤이었지만 이 소식은 우리의 사기를 충천시켜 주었고 우리는 모두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그때는 너무 컴컴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학동쯤에서 우리가 타고 있는 차 안에 LMG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차 안에서 누군가가 계엄군이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해서 그 산에 대고 LMG 1천5백 발을 공포탄으로 쏘았다. 물론 위협사격이었다 (김행주 1989).

 송기숙 교수는 22일 오전에 지원동에서도 소년 시민군들이 아무데나 총을 쏴대고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전망대에서 내려와 광주시내 지원동으로 들어서니 열서너 살밖에 안된 어린애들이 카빈총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동차는 숲속에 감춰져 있었고 가끔 애들이 장난으로 총을 쏴대는 광경이 목격되기도 했다. 우리는 오전 11시경 도청을 방문하여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계엄당국에 건의할 7개항 수습안이 결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月刊朝鮮특별취재반 1985, 456-457). 그 날 오전에도 시민군이 시민군을 계엄군으로 오인한 사건이 있었음을 용접공 시민군 김용균은 이렇게 증언한다:


22일. 온종일 돌아다닌 탓에 피곤이 몰려와 도청 부근의 여관 옥상에서 친구와 함께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총을 들고 도청 부근을 살펴보러 갔다. 그런데 언제 모였는지 도청 안은 많은 사람들로 굉장히 붐볐다. 친구와 나도 도청으로 들어가 도청 뒤의 숙직실 부근에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서방에서 시민군과 계엄군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그곳에 있던 시민들 몇 명과 나는 어제 화순에서 탈취한 카빈소총을 들고 지프차에 올라타고 서방으로 향했다. 서방 철길 부근에 이르러 우리는 주위의 시민들과 함께 철길 바로 옆 2층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올라가서 보니 동신고 건물 위에는 군복 바지를 입고 웃옷을 벗은 사람이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을 본 시민들은 공수부대로 생각하고 동신고 안에도 많은 군인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지 한 명씩 되돌아 갔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김용균 1989).

 웃옷을 벗고 총을 들고 서 있던 사람은 시민군이었음에도  시민군들 사이에서 이처럼 인식의 혼동이  자주 있었다.  바로 그 때 시민군 총에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사망한 사건을 시민군 김용균은 이렇게 증언한다:


나도 건물 옥상에서 내려와 그 건물 계단에 앉아 숨을 돌렸다. 바로 옆에는 교련복 바지를 입고 흰색과 파란 색의 체크무늬 상의를 입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앉아 있었다. 시민군들이 모두 빠져나간 건물 안에는 나와 그 학생 둘만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앉아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일어섰다. 그때 학생이 나를 붙잡았다. 긴장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지금 건물 밖으로 나가면 몹시 위험하니까 기다렸다가 나가라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 학생은 위험한 상황 속에서 혼자 남는다는 사실이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학생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갔다.

 
바로 앞에 있는 전봇대에 바짝 기대어 섰다. 그런 후 1분도 채 안 되었다. '탕' 하는 한 방의 총소리가 귀를 찢을 듯했다. 나를 향한 총성이라 생각하고 급히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건물 안에 남아 있던 학생이 마음에 걸려 그와 함께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심장이 멋는 듯했다. '아!' 하는 짧은 외마디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몸은 뻣뻣이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바로 조금 전에 나를 붙잡던 학생이 입구에 나뒹굴어 쓰러져 있었다. 계단에는 피가 낭자했다. 머리에 총을 맞은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총소리가 입구에 있는 학생을 명중한 것이었다. 계엄군들은 동신고에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 학생이 총을 맞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렇다면 건물 맞은 편 광주상고나 광주교육대학교 부근에도 계엄군들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직까지도 나에게 있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김용균 1989).

 계엄군은 그 전 날 광주에서 완전 철수하였으며, 이 사고발생 지역 인근 그 어디에도 계엄군은 없었다.  시민군에 의해 탈취된 오전 정이 넘는 총들이 광주에서 돌아다니고 있었을 때 이처럼 총기 사고가 빈번하였다. 시민군 전성준도 자신이 22일 시민군 차를 타고 조선대 사거리를 거쳐 시내 쪽으로 나오다가 다른 시민군 총에 맞은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때는 가로등도 신호등도 모두 없애버린 상황이고 운행하는 차량도 전부 라이트를 끄고 다녔기 때문에 주위는 어둠에 잠겨 조용했다. 다만 차 다니는 소리만 씽씽거릴 뿐이었다. 법원 앞에 도착했을 때 기사가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다니는 것도 좋은데 뭣을 좀 먹고 갑시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법원 앞 광장에 따로 앉아 김밥, 빵, 음료수 등을 먹었다. 스물다섯 명 정도였지만 전부 초면이어서 별로 이야기하지도 않고 먹었다. 기사가 또 말했다. "이렇게 돌아다녀봤자 별일도 없으니까 공원으로 다시 들어가서 알아보고 나옵시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조선대 사거리를 거쳐 시내 쪽으로 나왔을 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드르륵 총소리가 났다. 차의 오른쪽에서 총을 쏘았는지 나와 내 옆 사람이 총에 맞았다 (전성준 1989).

 고등학생 시민군 김행주는 왜 22일 오전에 부상을 입었는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처럼 가만 있는데 공수부대가 이유 없이 총을 쐈는가?  단 하나라도 그런 예가 있었던가?  아니다. 고등학생 무장시민군 김행주는 민간인 고속버스를 추격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그런 사실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날이 너무 추우니 유리창이 온전한 차로 옮기라고 했다. 우리가 옮긴 차는 중형 버스였는데 그 차로 14명쯤이 옮겼다. 그 차로 옮기고 조금 있으니 동이 트기 시작했다. 7시쯤이었다. 누가 시내를 한번 돌아보자고 했다. 날씨가 아주 좋았다. 화순 쪽을 돌고 시내로 들어오는데 광주역 쪽으로 오니까 흠집도 없이 깨끗한 광주고속버스가 막 나가고 있었다. 선두차를 잡고 어디를 가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서울에서 차가 없어서 운행을 하지 못하고 있어 서울로 가야 된다며 한번만 봐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래서 의심없이 그냥 보내주었다. 그런데 차가 10대나 길게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차가 많은 줄 몰랐는데 그것을 보니 순간 그 차들이 계엄군을 실러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서라고 소리쳤으나 그 차들은 호남도로 쪽으로 속력을 내어 도망 갔다. 우리는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차들은 고속버스였고 우리 차는 중형버스라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우리들이 고속도로로 계속 쫓아가니 차들이 교도소 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차들은 서울 쪽이 아닌 부산 쪽으로 빠지고 있었다. 그 차가 죽기 살기로 도망가는 만큼 우리도 죽기 살기로 쫓아갔다 (김행주 1989).

 서울행 민간 고속버스가 부산 쪽으로 빠져서라도 시민군 차 사정거리를 벗어냐야 했을 만큼 다급하고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그럴 때 국군은 당연히 시민군으로부터 생명을 위협당하는 국민을 보호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고속버스는 광주에 남아 있으면 시민군에 징발되었기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쓰고 빠져나가는 고속버스 운전수들이 있었으며, 그런 고속버스는 시민군 공격대상이었다.  멀리 있는 군인들은 그고속버스들이 승객들로 꽉 찬 버스인지 운전수만 있는 버스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무장시민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 줄 의무가 있었을 것이다.

19세의 재수생 시민군 김태헌은 22일 오전 시민군끼지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신의 총기 오발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하였다. 이것은 그가 이렇게 증언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지정된 지역으로 가기 전에 잠시 도청을 들러보기로 했다. 도청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찬 채 뭔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본 후 임무수행 지역으로 갔다. 순찰대 차량에는 운전기사 옆에 내가 타고 바로 옆 좌석에 다른 시민군이 탔으며 나머지 조원들은 뒤 적재함에 타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외곽지역의 거리는 한산했다. 계속 순찰을 하면서 간혹 비슷한 임무를 수행중인 시민군 차량을 만났다. 우리는 할당된 구간을 3차례에 걸쳐 왕복순찰을 했다. 한번은 운암동 쪽으로 갔는데 비아 쪽으로 걸어가는 아주머니 세 분이 있어 그분들을 태웠다. 나는 우리에게 정해진 구간을 벗어난다며 말렸지만 운전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들을 태운 우리 차는 계속 외곽지역으로 빠져나갔다. 이미 시민군의 경계선을 넘어섰다. 운전석 옆에 앉았던 나는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아 몹시 불안했다.
   아니나다를까 맞은편에서 계엄군의 차량이 오고 있었다. 우리는 뒤에 타고 있던 아주머니들을 내려서 도로가로 피하게 한 후 차를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우리를 본 계엄군 차량도 약속이나 한 듯이 방향을 돌려 일정한 거리가 될 때까지 물러섰다. 그리고 어느 쪽에서 먼저 총을 쏘았는지 알 수 없지만 거의 동시에 서로를 겨냥하여 발포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왼쪽으로 몸을 틀어 적재함으로 통하는 차창에 총구를 디밀고 계엄군 차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서로의 차를 향해 총구에서 한동안 불을 뿜었다. 계엄군이 그동안 광주에서 자행한 만행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들을 죽이지 못하면 틀림없이 우리가 죽게 되는 급박한 순간이었다.
   정신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데 갑자기 방아쇠가 작동되지 않아 총열을 살펴보니 노리쇠에 탄피가 걸려 있었다. 나는 얼른 안전스위치를 돌린 뒤 노리쇠를 밀고 오른손으로 탄피를 끄집어내려 했다. 순간 눈이 감겼고 어깨에서부터 허리 밑으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눈을 뜨려고 해도 눈이 떠지지 않고 양쪽 눈언저리가 으깨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김태헌 1988).

22일 아침 계엄군이 광주를 향해 들어온 적은 없었다. 전날 5시부터 퇴각한 공수부대는 22일 아침에도 되도록 광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철수하기 위해 도보 행진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광주쪽으로 오는 계엄군 차량은 없었다. 그 시간대에 시민군 군용트럭이 계속 그 도로를 쌍방향으로 지나다니고 있었을 뿐이었다. 청소년 시민군 김태헌은 맞은편 방향의 시민군 군용트럭을 보고 계엄군 차량으로 오인하고 발포하였다. 그러다 자기 총 노리쇠에 탄피가 걸리자 오른손으로 탄피를 끄집어내려 하던 순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스치고 지나간 실탄(아미도 탄피)에 눈을 다쳤다. 만약 정면에서 날아온 총에 맞았다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는 오른손으로 노리쇠를 누르고 탄피를 끄집어내려다가 격발사고로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여태껏5・18측은 애매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워왔던 것이다.

김태헌은정재희, 이광영, 이지현 등 30명과 더불어1982년 7월 광주 무진교회에서5 •18부상자회를 처음으로 만든 장본인 중 하나이다. 그런데, 본인의 부상사유는 청소년 시민군 총기오발사고, 본인의 총기오발사고 였음을 이제는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광주사태 31주년이 지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이제 광주사태는 역사기록의 문제인데 애매한 공수부대원들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 거짓이기 때문이다. 바른 역사 기록을 위해서라도 이제 이 사건은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기술되어야 한다.
 
시민군 총격전으로 부상당한 시민군 중에는 증산사 스님 시민군 이광영도 있다. 시민군들이 자기네끼리 총 쏘아놓고 애매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운 사건은 이광영이 이렇게 증언하는 사건이다:
 
적십자병원을 가기 위해 광주천변 도로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아줌마들이 몰려 와 우리 차를 막으며 내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내용인즉 바로 앞에 있는 구시청 사거리에 총을 맞은 청년들이 5-6명 정도 있는데 아직 죽지 않은 부상자가 있어 우리에게 구조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들어가는 사람에게 마구 총을 쏘아댔기 때문에 결국 구조할 사람은 적십자 대원인 우리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순간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적십자 완장을 차고 있는 이상 꺼져가는 생명을 살려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원 중에서 가지 말자는 사람도 있었으나 우리는 가야만 했다. 차를 몰아 어느 정도 가니 아니나다를까 길가에 수명의 부상자가 쓰러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갑자기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우리는 깜짝 놀라 골목으로 차를 대피, 부상자가 있는지 확인했더니 뒤쪽에 앉은 대원이 팔에 총을 맞았다. 나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총을 쏘기 시작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미치자 치가 떨렸다. 잠시 대원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졌다. 그냥 골목으로 대피하자는 의견과, 우리는 목숨을 버릴지라도 저 부상자들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그만하자, 우리는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무슨 소리냐. 그래도 저 사람들은 구해야 한다.' 나는 온몸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야말로 죽음을 눈앞에 둔 위태로운 상황에서 양심의 갈등이 너무나 컸다. 마침내 두명씩 의견이 나눠진 상태에서 기사 한 사람 말에 판결이 날 판이었다. 그런데 기사는 '좋다 한번 해보자'고 결단을 내리는 게 아닌가. 우리는 숨막히는 긴장 속에서 다시 차를 몰고 그 죽음의 현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그때 일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우리가 5•18 때 기분과 대중심리에 휩싸여 싸웠다고 볼 수도 있지만 죽음이 눈앞에까지 다가온 그러한 절박한 상황에서 총에 맞을 것을 각오하면서 나갔다는 것, 이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특히 기사는 운전도 잘할 뿐만 아니라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 다시 만나고 싶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차를 몰아 부상자들에게 접근, 그중 한 부상자를 싣기 위해 내가 먼저 팔을 잡아올리는 순간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척추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비명를 지르고 그대로 쓰러졌다. 나의 귀에는 어렴풋이 총소리가 연이어 '타타타' 들리며 대원들의 비명 소리가 뒤엉켜 들려왔고 차가 기독병원을 향해 허둥지둥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너무나 아파 비명을 계속 지르며 미처 올리지 못한 발을 올리려 했으나 그냥 차 밖에서 덜렁덜렁하는 것을 보며 '아! 나는 이렇게 죽어가는 구나' 생각했다. 그 와중에서도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는 소리가 들렸고 어슴푸레 병원응급실의 간판이 눈에 들어오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이 당시에 지프차에 탔던 5명 중 2명은 즉사하고, 2명은 부상당하고 운전사만 이상이 없었다) (이광여 1988).

이 사건은 22일에, 즉 광주에는 단 한 명의 군인도 없었으며, 수 천명의 무장시민군이 우글거리며 수천 정의 총들이 광주를 돌아다니고 있던 때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만약 이광영의 위의 증언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면 이 사건은 이렇게 설명된다. 구시청 사거리에서 무장청년들끼리 패싸움이 있었다. 이광영이 군용지프를 타고 사건 현장에 갔을 때 무장청년들 편에서는 군용지프가 수사관 지프로 인식되어 공격하였다. 설사, 이 설명이 가장 정확한 설명이 못된다 하더라도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은 또 하나의 무장시민군 발포사건이다. 도대체 어느 문명 국가에서 인구 80만의 도시에서 수십 만발의 실탄과 수 천 정의 총기가 마구 돌아다니는 것을 허용한다는 말인가? 시민군이 수십 만발의 실탄을 사용하는 만큼 인명 사고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광주에 군인이 단 한 명도 없었을 때 자기들끼리 이런 사건을 저질러 놓고 왜 애매한 공수부대에 누명을 뒤집어 씌운다는 말인가? 이광영이 5・18부상자회를 만든 장본인이었기에 이 사건 누명도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공수부대가 뒤집어썼다. 그러나 이제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

시민군은 시민을 죽여놓고 공수부대원을 죽였다고 거짓말하며 살인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던 듯하다. 한일남의 다음의 증언에서도 그런 사례가 감지된다:

23일에는 아침부터 이발관 주인과 함께 도청 앞으로 나갔다. 9시경 궐기대회가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12시경에 집회가 있었는데 구호는 '전두환은 물러가라! 최규하는 책임을 통감하라!...' 등이었다. 집회가 끝나 적십자병원 쪽으로 갔더니 공수부대 한 사람이 죽었다며 가마니를 덮어놨다. 가마니를 떠들어보니 머리는 긴 편이고 작업복을 입고 있는 것이 민간인 같아 보였다. 공원 쪽으로 해서 양동시장으로 갔다. 채소, 과일 썩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일남 1989).

 21일 오후 공수부대가 광주에서 철수한 이래 광주에는 공수부대원도 없었다. 야간까지 계속된 철수 중 낙오되어 시민군에 생포된 공수부대원이 한 명 있기 있었으나, 소준열 신임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이 직접 구명운동에 나서 시민군 상황실과 협상에 나섰기에 그는 죽지 않았다. 따라서 한일남이 식별한 대로 작업복 차림의 시신은 민간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 날 23일 저녁 때도 시민군이 광주시민을 향하여 함부로 발포하여 부상을 입힌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용접공 시민군이 이렇게 증언하는사건이다:


저녁 무렵 친구와 함께 지원동으로 갔다. 숭의실고 맞은편 건물 2층 옥상에서 다른 시민군 2명과 함께 외곽경비를 섰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쪽으로 빛이 스쳤다. 사방을 둘러보니 건너편 산밑의 딸기밭에서 5, 6명의 계엄군들이 딸기를 훔쳐 먹고 있었다. 우리는 계엄군들을 놀려줄 생각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보았다. 그중 한 명이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그들은 꽁지빠진 닭처럼 부상당한 동료를 데리고 급히 달아나버렸다. 총소리에 놀라 도망치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해서 보초를 선 우리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김용균 1989).
총에 맞은 사람이 부상을 당하였다면 그것은 위협 사격이 아니다. 조준 사격하였기 때문에 실탄이 그 사람에게 명중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실탄에 명중당한 사람은 사망할 확률이 높다. 사람이 총에 맞으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시민군도 있는가?  자기 총에 맞은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총을 쏘아대는 것은 더 이상 장난이 아니라, 살인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김용균은 계엄군을 쏘았다고 했다. 그러나 지원동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하기 이전부터 이미 시민군 점령 지역이었다.  공수부대는 남쪽 지원동과 정반대 방향의 무등산을 타고 철수하여 훨씬 북쪽 광주교도소에서 31사 병력과 교대하였다.  따라서 그 날 지원동에는 계엄군이 있을 수 없었다.  시민군 김용균 일행은 밤에 육안으로 딸기밭의 5~6명의 사람들이 계엄군임을 식별하였다는 말인가?  상대가 군인들인 줄 알면서도 그들이 작난삼아 총을 쏘았다는 것은 실로 황당한 거짓말이다.  만약 군인들이었다면 정당방위 사격을 하지 않겠는가!  공수부대가 맞대응하지 않고 급히 달아났단 말인가?  그렇다면 시민군 편에서 일방적으로 발포한 이 사건을 가리켜 5・18측에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는가? 이 사건은 시민군의 정당방위 발포도 공수부대의 집단발포 사건도 아니다.  분명 이 발포사건은 김용균 등 중학교 중퇴 학력 시민군 일행이 아무에게나 총을 쏘아 어느 광주시민에게 총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이것이 민주화운동인가?

고등학생 시민군 김행주는 기독병원에서 치료받던 어떤 시민군은 장갑차 타고 군경을 공격하려다 시민군 장갑차 안전사고로 부상을 입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날 오후가 되니 기독병원에서 처음에 같이 있었던, 정복철과 현용철을 포함해 3명이 기독병원에서 왔다. 정복철이라는 사람은 순천에서 지금 운전을 하고 있는데, 5·18 당시 장갑차에 타려다가 장갑차 윗문에 손이 끼어 완전이 바스라진 사람이다” (김행주 1989). 이 경우 시민군 정복철의 손 부상의 가해자는 누구였는가?

광주사태 기간 내내 시민군이 아주 빈번하게 장갑차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이런 사고들이 생겼다. 시민군은 시민을 추격하는데도 장갑차를 동원하였기 때문에 시민군 장갑차는 시민들에게 아주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하였다. 지난 2월 (2011년) 리비아 반군이 내란을 일으켰을 때 반군 점령 지역에서 많은 시민들이 체포되었는데, 그 체포 기준이 몹시 주관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반군은 자기 느낌에 카다피 정부군 편이라고 생각되면 이유없이 체포하여 감옥에 보냈다. 그 결과 반군 편을 들었던 사람들이 반군 감옥에 수감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였다.  그런데, 광주사태 때도 단지 시민군 느낌에 군인으로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시민이 시민군에 체포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어떤 시민이 단지 머리가 짧고 단정하다는 이유만으로 시민군에게 체포되고 시민군 장갑차 추격을 받는 황당한 에피소드를 이렇게 증언한다:

  어둠이 걷히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마침 담배가 떨어져 우리 건물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장갑차 안의 사람들에게 담배를 얻으러 가려는 참이었다. 건너편 숭의실고 건물 지하실에서 머리가 짧은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어딘지 모르게 수상쩍은 느낌이 스쳤다. 나는 옥상에서 그에게 "이리와 보시오"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그는 조금 걸어오다가 갑자기 담벼락으로 숨어버렸다. 나는 급히 옥상에서 내려가 총을 들이대며 "이리 나오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며 소리쳤다. 그제서야 그 사람은 나에게 다가왔다. 분명 그는 시민군인 나를 피하고 머리가 짧은 것으로 보아 민간인으로 위장한 군인임에 틀림없었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는 병원차에 그를 실어 도청으로 인계하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담배를 얻으려고 장갑차로 다가서는 순간 헤드라이트를 켠 택시가 쏜살같이 오고 있었다. 뒤에는 방금 전 수상한 사람을 태워보낸 병원차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앞선 택시는 내가 멈추라고 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장갑차도 병원차의 뒤를 이어 택시를 추격했다. 병원차와 장갑차는 택시가 지원동 쪽으로 도망치자 추격을 멈추고 다시 돌아왔다. 더 이상의 추격은 계엄군이 외곽을 지키고 있어 어려웠던 것이다. 알고보니 택시를 운전하던 놈은 내가 방금 전 잡아 보낸 군인이었는데 그렇게 도망을 쳐버렸다 (김용균 1989).

 군인이 모두 광주에서 철수하였는데, 군인이 거기 있을 리가 있었는가? 머리가 짧고 단정하면 전부 군인인가? 광주에 머리가 짧고 단정한 민간인은 없었는가? 머리가 짧은 남자뿐만 아니라 머리가 긴 여자도 간첩으로 몰려 시민군에 체포당하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시민군 김용균은 자기가 목격한 사례를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곧바로 상황실에 배치되었다. 간첩을 잡았다는 시민의 제보가 들어왔다. 상황실에 있던 5, 6명의 사람과 함께 택시를 타고 공원 부근으로 갔다. 광주공원 광장에는 많은 시민들이 여자 한 명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는 도청에서 나왔다고 얘기하고 그 여자를 데리고 도청으로 들어왔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여자는 간첩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의심할 여지가 없어 그냥 돌려 보냈다 (김용균 1989).    
광주사태 당시 학동 증심사는손성모 등 북한간첩들아지트였으며, 그래서 증심사 일대가 시민군이 특히 많이 배치된 시민군 작전지역이었다. 그만큼 시민군 총기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 곳이기도 했다. 화순 구두닦이 시민군 박내풍은 그가 학동에서 목격한 두 건의 시민군 총기 사고에 의한 사망자와 중상자에 대하여 이렇게 증언한다:  
   23일 정오쯤 되었을 때 박남선 씨가 조를 편성했다. 5인 1조로 짜졌는데, 나는 친구와 같은 조에 들어갔다. 우리 조에게는 백운동으로 가서 외곽지역을 경계하라고 지시했으나 나는 그 일보다 '시체담당'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자 수락되었다. 그때부터 우리 조는 각처에서 도청으로 옮겨진 시신들을 옷을 입혀 관에 넣고 관 위에 태극기를 씌우고 과일도 놓아주는 일을 했다. 그날 오후에 시민의 제보가 들어왔다. 학동 남광주시장 부근에서 시민 한 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 조 5명이 가보니 옆구리에 관통상을 당해 죽어있었다. 도청으로 싣고 가서 관에 넣었다.
   24일 새벽에 근무를 서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학동에 있는 제재소에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으니 운반하라는 것이다. 2층 강당에서 그 연락을 받고 앰불런스 운전수와 함께 갔다. 15살 정도의 학생이었는데 아직 죽지는 않고 실신해 있었다. 주위는 피로 낭자해 있었다.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총에 맞은 옆구리를 묶어 일단 지혈을 시켜 전대병원으로 갔다 (박내풍 1988).

5월 25일 오후 6시 이후에 황금동에서도 시민군끼리 총격전이 벌어졌던 사실을 목공 시민군 천순남은 이렇게 증언한다:
궐기대회가 끝나고 9시경 도청으로 들어가서 밥을 먹었다. 여섯 명이 함께 있었는데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고 동지애 하나로 행동하고 있었다. 무전기 3대를 우리가 탄 차에 배급받아 그날 저녁 상황을 판단하여 위험한 일이 있으면 도청에 알리기로 하였다. 상무관 앞에서 차에 타고 대기하던 중 밤 10시경 무전기로 "황금동 콜박스에 강도가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버스를 타고 황금동 콜박스 거리로 갔는데 어디에서 강도사건이 생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버스기사는 임영록이었다. 기동타격대란 사람들이 우리보다 일찍 와서 콜박스 쪽을 뒤지고 다니던 참이었다. 우리도 그곳을 뒤져보았지만 강도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계속 찾아보자고 학생회관 쪽으로 가면서 강도가 있는지 살펴보던중 학생회관 옆에 있는 여관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집으로 들어가 아무 일도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별다른 일은 없다고 했다. 여관집 주인이 우리들에게 밥을 주며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는 중에 총소리가 나길래 재빨리 여관 건물에 올라가 잠복했다. 학생회관 건물과 우리들이 있는 여관 사이에 건물들이 많아 어디서 총소리가 나는지 분간하기 어려웠으나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사람이 보여 M1총을 쏘았다. 한참 동안 총격전을 했어도 밤이라 어두워서 상황파악이 어려웠다. 거리가 조용해지자 옥상에서 내려와 여관 현관 복도에서 밤을 새우기로 하였다. 혹시 이 집으로 강도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청으로 무전연락을 해 놓고 여관에서 교대로 잠을 자기로 했다. 여관집 주인이 음료수와 먹을 것을 주었고 이불도 가져다주었다. 그 여관 이름이 무엇이 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천순남 1988).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윤상원이 사망한 원인은 그의 수류탄이 폭발하였기 때문이다. 5월 21일 무장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한 이래 윤상원은 시민군에 수휴탄 투척 훈련을 시켰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이 수류탄 투척 훈련용으로 연막탄 투척 연습을 하다가 자기 몸 가까이서 폭발하는사고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고가 윤상원 본인에게 있었다. 5월 27일 새벽 윤상원이 계엄군을 향해 선제사격함과 동시에 계엄군에도 자위방어권이 주어졌다. 자위방어를 위해 총을 맞쏜 계엄군 총탄이 윤상원 옆구리에 맞자 그가 휘청거렸다. 들불야학 동지인 김영철이 그를 자리에 눕히고 이불로 덮어주었으나 윤상원의 수류탄이 터져 이불과 커튼에 불이 붙어 불길에 휩싸인 채 그는 사망하였다. 윤재걸 기자의 기록에 따르면 시민군 수류탄이 폭발할 때 여러 명이 사망하였다. 그 경우 27일 새벽의 교전으로 인한 시민군 사망자 17명 중에는 시민군 수류탄 폭발로 인한 사망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3. 시민군 운전미숙으로 인한 사고


시위대 및 시민군 차량 운전자들 대부분이 운전면허가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알어난 교통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당시 전남대 학생처장 운전기사였던 오병길도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여기저기 군용차량이 흩어져 있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온 것 같았다. 자동차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용납품차량을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무작정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장에 있었던 납품차량은 시운전도 하기 전의 것으로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병길 1988).

광주사태 초기인 19일에 이미 시위대 차량 운전자들의 운전 미숙으로 부상자가 속출한 사실을 조철응은 이어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화염병에 불을 붙여 계엄군에게 던지려 했으나 차가 너무 빨리 달려 불이 붙지 않았다. 거기에다 트럭 운전기사가 운전을 제대로 못해 차가 갈지자로 달렸다. 갈팡질팡하던 중에 나도 무엇엔가 심하게 맞아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한참 후 깨어나보니 서석병원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의 얘기를 들으니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현장에서 다친 사람은 나 외에도 3명이 더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같이 타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나는 귀를 부상당했는지 귀가 퉁퉁 부어 있었다. 그 병원에는 친구 한 명도 뇌를 크게 다쳐 수술을 하고 누워 있었다 (조철응 1989).  
조철응은 귀가 퉁퉁 붓는 외상을 입었을 뿐이지만 그의 친구는 시위대가 낸 교통사고로 뇌를 크게 다쳐 수술을 했다. 시위대가 던진 돌이 시위대 머리 위로 떨어져 뇌 수술을 한 시위대뿐만 아니라, 시위대가 낸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뇌 수술을 한 시위대도 있었다. 19세의 재수생 시민군 윤석진도 시민군 징병 차량 운전수의 운전 미숙으로 자기가 손에 부상을 입은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당시 시위대 차량을 운전하는 살마들은 대개 운전면허중이 있는 사람보다는 운전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나 운전을 한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어서 매우 서툴렀다. 내가 탄 차고 마찬가지였다. 외곽으로 돌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손을 들면 태워주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서는 차를 타라고 했다. 대동고 조금 지나 효천쪽으로 갔을 때였다. 운전을 잘 못해서 급정거를 해버렸다. 적재함에서 각목을 들고 서 있던 나는 그 바람에 오른손 손가락 2개가 찢어져버렸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떻게 할 수도 없어 피가 툭툭 떨어졌다. 차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할수없이 대성여고 앞에서 혼자 내렸다. 어떤 집으로 들어가 붕대를 좀 달라고 했다. 다친 손가락에 약을 발라주더니 면장갑 한 켤레를 주었다. 면장갑을 끼고 다시 돌아오는 차를 타고 구호를 외치면서 시내로 돌아왔다. 그 차에서 내려 어떻게 하다 보니까시위차량이 부족하다고 하여 차량을 징발하러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윤석진 1989).
김영택 기자도 20일 오후 6시 55분 버스를 탈취하여 경찰을향해 돌진하던 시위대 9명이 가로수에 부딪쳐 중상을 입은 사실을 보도한다: “오후 6시 55분 광전교통 소속 전남 5아 3706호 버스에 탄 청년 9명이 광주관광호텔 앞에서 저지선쪽으로 차를 몰고 돌진하다가 가로수에 부딪쳐 중상을 입는 사고가 났다” (김영태 1988, 66).

21일 오전부터 이미 시민군 차량들이 운전미숙 등으로 인해 사고를 일으킨 채 도로에 방치되고 있었다 (광주매일 『正史5•18』 특별취재반 1995, 295). 재수생 시민군 김태헌은 21일 오전부터 시민군 차량 충동사고들이 발생한 사실을 이런 말로 증언한다: “시위대 차량은 무질서하여 가끔 차량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광주시내에서는 트럭, 시내버스, 직행버스 등이 시위와 시민들 수송에 이용되고 있었다. 차량시위를 하면서 보니 도청 앞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운암동 고속도로 진입로에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김테헌 1988). 윤석진은 시민군 차량 운전자 운전의 서툴렀음을 이어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 차는 대개 광주역 주변과 신우아파트 주변의 외곽도로를 돌면서 구호를 외치고 시민들을 실어다 일고 앞도로에 내려주는 일을 계속했다. 그래서 도청 앞 주변이나 금남로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도 코스가 일정하게 정해진 것도 없이 운전자가 스스로 정하든지, 아니면 차에 탄 사람들이 이쪽으로 가봅시다. 하면 그쪽으로 갔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청 앞으로 시민들을 모아오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차들은 서행을 했는데 그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운전자가 서툴렀고, 또 안에 타고 있는 사람 모두가 상체를 밖으로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도에도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다 (윤석진 1989).

주유소 종업원 시민군 김점중은 21일 오전부터 무기탈취하러 다니던 시민군 군용차가 미니버스를 받아 낸 사고로 10여명이 쓰러져 있는 것을 오후 한시 뱐경에 발견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21일 사방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차에 탄 사람들이 차창을 두들기며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나도 오전에 주유소에 있던 군용 지프차를 타고 남평 쪽으로 나갔다. 대학생이던, 유동의 신신목욕탕 큰아들 등 4명을 태우고 갔다. 그리하여 남평 무기고까지 갔으나 이미 무기는 시위대가 가져갔는지 하나도 없었다. 도로에 차량 행렬은 많았다. 남평 쪽 길목에서 도로변의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격려의 말도 해주었다. 1시 30분 정도 되었을까. 광주로 오던 길에 옥천여상고 조금 못 와 공사중이던 고가도로 근처에서 군용차와 미니버스가 충돌해 있는 것을 보았다. 미니버스는 이미 박살나 있었고 군용차는 멀쩡했다. 군용차에도 민간인이 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리가 잘라진 사람, 머리가 나간 사람 등 부상자가 10여 명 정도 쓰러져 있었는데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다. 지나가던 차들이 각기 환자들을 싣고 병원으로 수송을 했고, 나도 그 중 2명의 환자를 싣고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1시 30분 정도 되었을까. 광주로 오던 길에 옥천여상고 조금 못 와 공사중이던 고가도로 근처에서 군용차와 미니버스가 충돌해 있는 것을 보았다. 미니버스는 이미 박살나 있었고 군용차는 멀쩡했다. 군용차에도 민간인이 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리가 잘라진 사람, 머리가 나간 사람 등 부상자가 10여 명 정도 쓰러져 있었는데 눈뜨고는 못 볼 지경이었다. 지나가던 차들이 각기 환자들을 싣고 병원으로 수송을 했고, 나도 그 중 2명의 환자를 싣고 적십자병원으로 갔다. 적십자 병원에 도착해 보니까 환자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적십자완장을 찬 대원들이 밖에서 환자들을 인수해 들여갔다. 나는 그곳에서 이광영 씨도 보았다 (김점중 1988).

이 사고를 낸 시민군은 피해자에게 사과를 하거나 보상을 해 주었는가? 아니다. 시민군은 이 끔찍한 사고의 누명도 공수부대에 뒤집어 씌웠다. 1시 30분경 10여명의 중상자들이 병원으로 후솓되었고, 이것이 1시 30분에 집단 발포가 있었다는 유언비어의 원인이 되었다. 그 날 한시 반경 다친 민간인들 대부분은 시민군 군용트럭이 미니버스와 충돌하여 미니버스를 박살냈기 때문에 다쳤던 것이다. 이 사고로 다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피를 흘렸는지 이때부터 헌혈이 필요하게 되었다. 증심사 시민군 이광영이 헌혈 켐페인을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그리고헌혈 켐페인과 더불어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가 시작되었다. 헌혈을 요구할 때 시민군이 낸 교통사고로 다친 사람들을 위한 헌혈이 필요하다고 사실대로 말하며 호소하지 않고, 애매한 공수부대에 살인마 누명을 씌우며 헌혈을 요구했던 것이다.
김점중이 증산사 시민군 이광영 스님을 이때 보았다고 했다. 훗날 승복을 벗고 직업적으로 5・18부상자회 활동을 했던 이광영도 바로 그때부터 광주사태 선동 캠페인에서 헌혈 켐페인으로 활동 종목을 바꾸었다고 증언한다:
그때 적었던 구호는 '계엄을 철폐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 '최후의 일각까지', '오호 통재라', '오후 3시까지 도청으로 집결' 등이었다. 거의 모든 차량에 직접 다 쓰고 나니까 오후 2시 정도 되었다……적십자병원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응급실과 병실은 이미 꽉 차고 복도고 뜰이고 빈틈없이 환자들로 꽉 차 있었다. 의사는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다. "환자들만 데려오면 어떡해요. 약품과 피가 부족하니 그것도 좀 구해다 주셔야 지요." 거기서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이 바로 이것이구나 생각하고는 의사와 상의했다. 먼저 의사로부터 꼭 필요한 의약품의 품목을 신청받고 아울러 혈액을 수집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고 의복과 적십자 완장을 착용하고 들것 2개를 차에 실었다. 또 태극기 2개를 차 엔진 위에다 꽂고는 민간인 적십자 대원으로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봉사하며,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으며,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물러서지 않으며, 민간인을 적극 보호한다는 등의 다섯 가지 항목을 선언했 다. 그날 오후 내내 나는 정말 분주했다 (운전수를 포함하여 5명이 지프차를 탔다) (이광영 1988).

위의 김정중과 이광영의 증언으로 21일 오후 2시경 적십자병원에서 전개되었던 상황에 대한 그림이 선명해진다. 남평 등지에서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과속으로 달리던 시민군 군용트럭이 미니버스를 들이받아 발생한 교통사고로 많은 응급환자들이 적십자병원에 실려오자 응급실과 병실이 환자들로 꽉 차고 피가 부족했다. 이것이 광주사태 기간 중 헌혈 캠페인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때 애매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는 매커니즘이 형성되었다. 병원으로 환자들이 후송되어 올 때마다 그 누명은 공수부대가 썼으며, 헌혈 캠페인 역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는 유언비어 증폭에 악용되었다. 애매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는 거짓말은 그때 그럴 듯하게 들리고 먹혀 들어갔으며,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로 증폭되고 굳어졌다.

시민군 정준의 아래의 증언은 21일 무장시민군 군용차량들이 무기탈취하러 오가는 길에 미니버스를 들이받아 사망케 한 시신들이 그 다음날 어떻게 군인들이 죽인 시신들이었것처럼 왜곡되어 외신에 보도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병원은 언제나 어수선했다. 이날도 이런저런 잡일을 보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목에 카메라를 주렁주렁 달고 큰 가방을 맨 외국 사람들 2명이 적십자병원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내게 다가와서 "시체실 촬영을 좀 하려고 왔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신분증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UPI통신 기자,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보여주며 기자임을 재차 강조했다. "도와드리는 것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양만 내면서 사진만 찍고 보도되지 않는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또 얼마나 정확히 보도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으니……. 정확하게 사실대로 보도되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주 정확히 조사하여 본국에 보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묻는 말에 확실하게 말했다. 이 두 사람은 특파원 종군기자여서 그런지 통역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 말을 썩 잘했다. 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시체실로 들어갔다. 적십자병원에는 2개의 영안실이 있었는데, 각각 7평 정도 되는 곳에 20여 구가 넘는 시체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 시체는 모두 5•18 당시 시체들이었고 각각 비닐로 덮어두었다. 영안실은 얼음주머니를 쌓아두었기 때문에 얼음의 수증기로 인하여 마치 안개가 자욱하게 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자들 2명은 카메라 라이트를 켜고 비추면서 촬영을 시작했고, 나는 시체 위의 비닐을 벗겨주면서 그들을 도와주었다. 하나하나씩 비닐을 벗기며 촬영을 하던 중 머리가 보이지 않는 시체가 나왔다. 이빨 2개만 보이고 몸 전체는 구타의 흔적이 역력하게 보였다. 나는 도저히 계속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영안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도 따라서 나왔다. UPI 연합통신 기자는 계속 사진을 찍었다. 영안실에서 나와 병원 마당에 있는 나무 밑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아사히신문 기자가 옆으로 왔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해도해도 너무 했어요." 이렇게 말하고는 계속해서 훌쩍거렸다. 나는 갖고 있던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도록 그에게 주었다. 아사히신문 기자는 계속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앉아 있더니 다시 일어나 끝까지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UPI 연합통신 기자는 사진촬영을 다 마쳤는지 영안실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난 아사히신문 기자와 함께 또 다시 영안실로 들어갔다. 사진을 모두 찍고 영안실에서 나와 그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정중하게 하고는 꼭 보도가 될 것이라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정준 1989).

시민군 김점중은 21일 남평과 광주간 고가도로에서 시민군 군용차량에 깔려 머리가 나간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이 적십자병원에 후송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시민군 정준은 그 병원 영안실에서 머리가 보이지 않는 시체가 나왔다. 이것은 무장시민군의 만행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운전이 미숙한 무장시민군이 무기탈취를 위해 과속으로 고가도로를 달리다가 미니버스를 들이받아 죽게 한 사람 시신이었다. 그럼에도 시민군의 거짓말로 외신기자들에게는 군인들이 잔인하게 죽인 시신이었던 것처럼 전해졌던 것이다.

대동고 시민군 유석은 바로 그 시각에 담양에서도 무기 탈취를 목적으로 시민군 차량을 운전하던 운전수의 운전 미숙으로 한 시민군이 트럭에서 떨어져 뇌진탕에 걸린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가 담양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경찰서내에는 사람도 총도 아무것도 없었다. 담양경찰서로 가던 도중 산수 오거리 쪽을 지났는데 이곳에서 30세 가량의 남자를 태웠다. 이 남자는 언청이였는데 나뭇가지에 태극기를 묶어 들고 차량에 탑승했다. 이 사람은 담양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노래를 계속 불렀는데 그중에서 이 노래를 자주 불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의 개사곡이었다. "시민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영산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묻힌 계엄군을 무찌르고서 번개처럼 사라져갈 시민이여 잘 자라." 이 사람은 우리와 함께 담양경찰서까지 같이 갔다. 경찰서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오려고 트럭이 출발할 때 운전수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이 사내가 트럭에서 땅으로 떨어졌다. 담양에서 우리가 탄 트럭은 곧바로 전남대병원으로 그 사람을 후송했는데 '뇌진탕'이라는 진단을 받았다(생사여부는 확인하지 못했음). 병원에 신원파악을 위해 몇 명을 남기고 우리가 탄차는 노동청 쪽으로 해서 도청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도청으로 해서 금남로로 가기는 위험했으므로 돌아서 금남로로 갔다. 오후 4시경 금남로에 도착했다 (유석 1988).
21일 오전부터 시민군이 무기탈취하러 다니다가 낸 대형교통사고로 많은 사망자를 낸 사건 중에는 나주로 무기탈취하러 가던 중 일어난 사건도 있었음을 대동고 시민군 유석은 그가 동료 정찰대원에게 들었다고 했다:
세번째 나주로 무기를 탈취하러 가는 도중에 효천, 남평에서 크레인차가 길 아래로 굴러떨어져 사고가 난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야기였다. 목격했던 정찰대원은 "크레인 차량에 사람이 탈 좌석이 부족해서인지 크레인 위에 사람들이 앉아 가다가 차가 전복되어 크레인 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크레인에 깔려 목이 떨어져나가 있었고, 사고현장에는 약 12구의 시체가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유석 1988).

군용차량들을 탈취하여 운전하는 시민군 운전미숙으로 인한 교통사고로 22일 시민이 숨진 사례를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김영택은 이렇게 보도한다: “총기와 실탄을 받은 이들은 즉시 시내로 투입되어 차량을 타고 질주하고 다녔다. 이 때문에 지산동 무등파크맨션 옆길을 걷던 김오순(金五順・47)이 시위대 차량에 치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김영택 1996, 125-126). 자, 시민군 난폭 운전자가 시민군 차량으로 시민을 치어 죽였다. 그것이 민주화운동이었는가? 자기들이 사람을 죽여놓고 유언비어로는 애매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우며 광주사태를 선동한 것은 선량한 행동이었는가? 22일 광주에는 단 한 명의 군인도 없었다. 그럼에도 시민군이 일방적으로 퍼뜨리는 유언비어대로 정부군은 살인 누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어째서 시민군이 범인이었던 사망 사건들에 대해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가?

5・18무장시민군이 이렇게 시민들을 죽여놓은 후 단 한 푼이라도 보상하였는가? 보상은커녕 단 한마디의 사과도 없었다. 어떻게 이 집단만 살인범죄의책임을지지않았는가? 5・18시민군에게는 범죄 면죄부가 있었는가? 그들은 다른 이에게 누명을 씌우는 방법으로 자기들이 저지른 범죄 사건들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였다. 이 날 이사건 직후 그들은 ’전두환 살육작전’이라는 제목의유언비어 문건을 대량 퍼뜨렸다. “이날 시내는 물론 도내 그리고 전주지역까지 뿌려진 유인물 중에서 ‘전두환 살육작전’이라는 똑같은 제목, 똑같은 내용으로 된 두 가지 전단이 나돌았다. 8절 크기의 갱지 앞뒤 면을 빽빽하게 채운 긴 내용이었다” (김영택 1996, 130).

적십자병원을 비롯한 각 병원 영안실에는 광주사태가 아닌 평상시에도 시신들이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광주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시신들을 도청으로 운구하여 광주사태 선동에 이용한 것은 일종의 도둑질에 해당할 것이다. 무직 시민군 정준의 아래 증언은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그런 도둑질을 하여 광주사태를 선동하였음을 보여준다:

기자들이 다녀간 다음날 오후쯤 되었을 것이다(5월 23일 추정, 조사자주). 도청 상황실에서 연락이 왔다. 각 병원에 있는 확인된 시체들을 입관시켜 도청 분수대로 모두 옮겨줄 것을 지시했다. 나는 연락을 받은 즉시 관을 사기 위하여 양동 장의사 집을 찾아갔다. 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가고 한두 개밖에 없었다. 돈을 받지 않고 그냥 가져가라고 했다. 병원에 있던 후배들을 시켜서 트럭이나 모든 차를 동원하여 관을 구하여 오도록 지시했다. 관이 어느 정도 모아지자 적십자병원에 있던 시체들을 관에 넣기 시작했다. 안치되었던 시체들은 40-50구 정도 되었다. 대부분의 시체들은 부피가 불어나서 관에 넣기가 힘들었다. 중학생쯤 되어보이던 시체는 어깨쭉지에 총을 맞아 죽어 있었는데 시위광경을 구경하다 총에 맞았다고 했다. 키가 큰 시체는 관의 크기가 맞지 않아 뚜껑이 닫아지지도 않았다. 이웃 주민들은 적십자병원 주변 곳곳에서 입관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집에 보관해 둔 태극기를 갖다주기도 했다. 그 태극기를 관 위에 덮어주기도 하고 시체 전체를 태극기로 덮어주기도 했다. 시체는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많았고 나이 많은 사람도 간혹 끼어 있고 어린애도 눈에 띄었다. 입관이 대강 마무리되고 정리가 되자 관을 차에 싣기 시작했다. 관을 실은 차는 모두 5대 정도 되었다. 그리하여 차에는 가족 되는 사람들 2명씩을 태우고 차 라이트를 켜고 적십자병원을 출발했다. 태평극장을 지나 충장로파출소, 한일은행을 거쳐 도청 분수대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나는 차에서 메가폰을 들고 "억울하게 계엄군 총에 맞아 돌아가신 애국 시민들이 지금 이곳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모두 애도의 뜻을 표해주십시오" 하면서 도청과 금남로 주변에 모여 있는 시민들에게 외쳤다. 도청 분수대를 주변으로 엄청나게 많은 광주시민들이 운집해 있었고 집회를 하고 있는 듯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연단 위에서 연설을 하고 있었다. 장례차가 지나간다고 외쳐대자 시민들은 차가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었다. 시민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애국가를 불렀고 도청 주위의 분위기는 일제히 숙연해졌다. 차는 도청 분수대를 한바퀴 돌고 난 후 관을 내렸다 (정준 1989).

시민군이 여러 병원의 시체들을 입관하여 도청으로 운구하여 왔다. 그 중 여러 시체들은 광주사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시체들이었다. 어떤 시체들이 광주사태와 관련이 있었는가? 무기를 탈취하러 다니던 무장시민군이 낸 대형교통사고로 죽은 시민군들이었다. 또 어떤 시체들이 광주사태와 관련이 있었는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범죄를 저지를 시민군들이 처벌을 받거나 보상을 하기는커녕 자기들이 낸 사고로 희생된 시체를광주사태 선동에 악용하였다. 무직 시민군 정준도 광주사태와 아무런 관련 없는 시신들 및 시민군이 낸 교통사고와 총기 오발 사고로 죽은 시신들을 도청으로 운구하면서 메가폰을 들고 “억울하게 계엄군 총에 맞아 돌아가신 애국 시민들이 지금 이곳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모두 애도의 뜻을 표해주십시오”라고 외쳤다. 실로 이것은 엄청난 거짓이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적반하장이 아니던가!

5월 21일 오전 10시 시체 두 구를 끌고 나주로 가서 정오부터 무기탈취를 하였던 시민군이 신북과 영암을 거쳐 해남과 완도의 경찰서 및 군부대 습격 후 73대의 대병력으로 광주로 돌아오고 있었다. 군용트럭으로 73대의 시민군 병력이면 가히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 만한 병력이었다. 당시 진압봉만 든 공수부대 병력이 10 대의 트럭으로 동원된 것에 대해서 광주의 원성이 그토톡 높았다면 73대 트럭의 중무장한 시민군 병력은 가히 엄청난 병력이었다. 훗날 월북한 윤기권이 대동교 박행삼의 제자였는데, 해남으로부터 이런 시민군 대병력을 끌고 광주를 향하여 오던 박행삼은 광주를 향해 달려오던 해남시민군 중에도 시민군이 낸 윤화사고로 죽거나 다친 시민군들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73대의 차를 이끌고 노안을 거쳐 송정리에 도착했다. 노안과 송정리 사이에 다리가 있었는데 기중기 한 대가 다리 난간을 들이받고 추락해 있었다. 차들을 멈추고 사람들과 다리 아래로 갔다. 추락한 차에는 세 사람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즉사했고, 한 사람은 빠져나왔는데, 나머지 한 사람은 차에 끼여 있어서 도저히 우리들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차는 아세아자동차에서 빼내온 차라고 했다. 차에 낀 사람은 계속해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노안국민학교에서 줄다리기 할 때 쓰는 줄을 빌려왔다. 기중기를 묶어 위에서 트럭 세대가 끌었는데 기중기는 끄덕도 하지 않고 밧줄만 끊어져버렸다 (박행삼 1988).

만약 영화 ‘화려한 휴가’의 이야기가 사실이려면 23일 전남대병원의 시신들이 모두 총상을 입었어야 했다. 그러나 대동고 시민군 유석은 아무리 눈을 비비고 보아도 총상 입은 시체는 없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5월 23일(금) 오전에 나는 집에서 몰래 나와 전대병원에 안치되어 있는 시체를 살펴보았다. 전남대병원은 시체실 안과 밖에 안치되어 있는 시체를 확인하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전경이나 계엄군의 시체는 시체실내에 안치되었고 일반시민들의 시체는 시체실 앞에 있었다. 일반시민들의 시체는 구타로 인해서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고 또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다. 총상이나 자상을 입은 시체는 없어 보였다 (유석 1988).

도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하는가? 시민들의 시체는 모두 멍들어 있었다. 구타로 인해 멍들었는가? 그러나 20일 이후 맞는 쪽은 군인들이었으며, 21일 저녁 이후 광주에는 단 한 명의 군인도 없었다. 오직 운전미숙으로 인한 시민군 교통사고들만 있었을 뿐이었다. 시민군 차량 교통사고로 시민들이 여기저기 부딪치고 여기저기 떨어졌을 때도 멍이 들지 아니하였겠는가?

26일 술 취한 시민군이 낸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시민군이 부상을 입었음을 염동유는 이렇게 증언한다:

우리는 조를 짠 후 시외곽지역으로 편성을 했다. 산수동 오거리, 동운동, 광천동, 공용터미널 쪽 등 주요 거리에 경계를 폈다. 우리 조는 백운동 로터리를 기점으로 전남대병원까지 경계를 서기로 했다. 우리는 배치를 받고 바로 백운동 로터리로 출동했다. 막 가자마자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전봇대에 부딪혀 사고가 나 있었다. 가보니 청년이 약간 술에 취해 있었다. 우리는 그를 차에 싣고 전대병원 응급실로 데려다주었다 (염동유 1989).

 고등학생으로서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던 조강일의 사망원인도 술을 너무 많이 마셔 발명한 간암이었다. 함께 유언비어 유인물을 제작하여 유포하였던 그의 친구 박규상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문학소년이던 강일이도 광주항쟁 이후에 글을 썼으나 그도 심한 좌절감에 빠져 계속 술을 마시다 1986에 간암으로 끝내 죽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많은 얘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던 강일이가 죽고 나자 나는 더욱더 생활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박규상 1989).

이처럼 남의 차를 탈취하고 기름을 강탈하여 과속으로 운전하다 낸 시민군 교통사고 희생자들 및 과음 등으로 인한 질병 희생자들을 5• 18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들로 인정해 줄 때 무엇이 민주화운동이냐의 질문이 끝없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운전에 미숙한 시민군이 차를 탈취하고 기름을 강탈하여 과속으로 운전하다 대형 교통사고들을 낸 것이 절대 선(善) 인가? 그런 부적절한 행위들을 미화시키더라도 꼭 애매한 공수부대에 누명을 씌워야만 하는 것인가?


 
글 작성일: 2011년 8월 21일 / 최종 수정일 2012년 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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